이용구(李容九)는 1905년 11월에 일진회의 명의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일진회선언서를 발표했으며 12월에 일진회의 회장이 되었다. 1906년 9월 시천교(侍天敎)를 세우고 교조가 되었다. 1907년 5월 일진회의 이름으로 정부의 국채보상운동,반을사늑약운동을 추궁하여 내각의 사퇴를 주장하는 탄핵문을 제출했다. 같은 해 6월 헤이그 특사사건이 일어나자 일진회원을 동원하여 고조 광무제의 퇴위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정미늑약과 군대 강제 해산에 반대하는 정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11월 무장조직인 일진회 자위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군 탄압에 앞장섰다. 1909년 12월 일본의 배후조종에 따라 일진회 임시총회에서 한국황실을 영구히 안전하게 할 것, 한국정부를 폐지하고 일본정부가 직접 정치를 할 것, 통감부를 폐지할 것, 일진회를 제외한 다른 단체는 해산할 것을 결의, 일진회 합방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어 한일합병을 주장하는 글을 순종 융희제,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소네 통감에게 보냈다. 경술늑약이 늑결되자 일제로부터 은사금 10만 엔을 받았다. 1910년 9월 일진회가 해산명령을 받고 일제로부터 외면당하자 매국행위에 대한 민중의 반감을 피해 일
황학수(黃學秀)는 1898년(광무 2) 대한제국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참위로 임관된 뒤, 친위대 및 시위대 소대장을 거쳐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 교관, 안동진위대장,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 교관을 역임했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고향으로 내려가 지방유지들과 협력,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설립하여 운영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의정원 의원, 군무부 비서국장 등을 지냈다. 임시정부가 분열되자 무장독립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간도로 건너가 1925년 북간도의 독립군정부인 신민부(新民府)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7년에는 김좌진(金佐鎭)의 뒤를 이어 참모부위원장 겸 군사위원장이 되어 활약했다. 1928년 3부통합회의에 신민부 대표로 참석했으나, 3부가 통합되지 못하고 혁신의회(革新議會)와 국민부(國民府)로 양분되자 혁신의회의 중앙집행위원·군사위원장에 취임했다. 1930년 2월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홍진(洪震)을 중심으로 이청천(李靑天)·신숙(申肅)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고, 그 산하의 한국독립군 부사령관이 되어 항일전투를 지휘했다. 만주사변 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간부들과 함께 중국
이지용(李址鎔)은 1887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895년 칙명을 받아 일본을 유람하고 돌아왔으며, 궁내부 협판을 역임하다가 1901년 주일 공사를 지냈다. 1903년 10월 무렵 일본 측과 협상하여 대한제국이 일본을 돕도록 힘썼으며, 1904년 2월 외부대신으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 엔을 받고 한일의정서 조인에 협조했다. 이지용은 법부대신,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등을 거쳐 1905년 내부대신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찬성, 늑결(勒結)함으로써 을사오적의 하나가 되었다.1910년 8월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勒結) 후,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고 총독부 중추원 고문(中樞院 顧問)에 임명되었으며 정 3위 훈 1등으로 1928년 사망했다.
권중현(權重顯)은 1902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의 교장 임시 서리가 되었고, 1903년에는 육군법원장에 임명되었다. 1904년에는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되었다. 철도원 총재 임시 서리도 겸했다.1904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 위문사로 파견되는 등 일본의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서보대수장을 받았다.1905년 농상공부대신으로서 을사늑약에 찬성하여 을사오적이 되었다. 을사오적에 포함된 뒤 1907년 나철의 을사오적 암살단과 강원상의 암살 목표가 되었다. 이후 군부대신을 지내면서 의병 진압 명령을 내리며 정미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1908년 일본 정부가 내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이 늑결(勒結)된 뒤 10월 16일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았고, 은사공채(恩賜公債) 5만원을 수령했다. 총독부 중추원 고문(中樞院 顧問)과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을 지냈다.1912년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고 정5위에 서위되었으며, 1915년에는 다이쇼대례기념장이 서훈되고 1918년에 종4위로 승서되었다.
송병준(宋秉畯)은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을 따라 통역관으로 귀국하였다. 일본군 통역관으로 대한제국 귀국한 후부터는 완전히 친일파로 변신하여, 비밀리에 일제의 지시를 받아 이용구(李容九) 등과 함께 일진회를 조직하였다. 윤시병(尹始炳)과 함께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는데 가담했다. 이때 일본군 병참감 오오다니 소장의 통역을 맡으면서 용산지역에 일본군 사령부에서 주보(酒保: PX)를 경영했다.헤이그 특사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는 고조 광무제 강제 퇴위운동에 앞장섰다.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을 지내면서 일진회의 일한합방상주문 제출을 조종하는 등 대한제국 국민들이 합병을 간절히 원하는 듯한 여론을 조작,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그 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국권피탈을 위한 매국외교를 하여 전국민의 비난과 지탄을 받았다. 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勒結) 이후 송병준은 경술늑약 늑결에 대한 공로를 인정 받게되어 한일 강제 병합 후 일제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 작위를 받게 되었고, 총독부 중추원 고문(中樞院 顧問)이 되었다.
이재곤(李載崑)은 1880년 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을 시작으로 홍문관 교리와 지방의 현감 등을 거쳤다.1896년 비서원경, 1898년 종정원경 등을 지내며 고위직에 올랐다. 1907년 정미늑약 늑결 때는 학부대신으로서 공을 세워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서훈받았다. 신사회, 대동학회, 대한여자흥학회, 한자통일회, 국민연설회 등의 각종 친일 단체에서 임원을 맡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하였고,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저격당해 사망했을 때는 한자통일회 지회장으로서 한자통일회 이토추도회를 개최하였다. 1910년 8월 경술늑약(庚戌勒約)이 늑결(勒結)된 뒤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子爵) 작위와 은사공채 5만원을 받고, 총독부 중추원 고문(中樞院 顧問)에도 임명되었다. 1912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한일 강제 병합 후에도 꾸준한 친일 활동을 했다. 1915년 총독부가 후원하여 조직된 불교 종단인 삼십본산연합사무소 고문을 맡았으며, 1917년에는 불교옹호회 고문도 역임했다. 1915년 다이쇼 일왕 즉위 축하를 위한 행사가 한성 신사에서 열렸을 때 참석했고, 1917년 순종 융희제가 일본 왕실 참배를 갈 때 수행했다.
임선준(任善準)은 1885년 별시(別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승정원에서 관직을 시작했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과 시종원(侍從院) 좌시종 등을 거쳤다.1907년 이완용의 친일 내각에서 내부대신을 맡아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 강제 퇴위와 정미늑약(丁未勒約) 늑결 과정에서 적극 협력했다. 1908년에는 탁지부의 수장인 탁지부대신에 임명되었다. 일본 소유의 군과 철도 용지에 대해서 세금을 면제하고 의병에게 살해당한 사람의 유족에게는 보상금을 지급하는 등 노골적인 친일 정책을 폈다.1910년 8월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勒結)에 협조한 공으로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다. 1911년에는 5만원의 은사공채(恩賜公債)를 받았고, 이듬해 종4위에 서위되었다.
이완용(李完用)은 고조 광무제를 협박하고 을사늑약을 늑결한 을사5적의 수괴이다. 일제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 총리대신 겸 궁내부대신이 되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진회(一進會) 회장 송병준(宋秉畯)과 함께 고조 광무제에게 책임을 추궁, 양위할 것을 강요하고 협박하여 순종 융희제에게 양위케 했으며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을 주도하였다. 1909년 11월 4일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 날 장충단에서 시종원경 윤덕영, 한성부민회 대표 윤효정 등과 함께 이토 추도회를 열고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을 비난했다. 1910년 8월 총리대신으로 내각회의를 소집하여 합병에 관한 건을 상정하고, 어전회의가 소집되자 의장 자격으로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회가 설치되자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병합전권위원의 한 사람이 되어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관사로 찾아가 데라우치 통감과 경술늑약을 늑결하였다.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勒結)의 공을 세워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의 작위와 잔무처리수당 60여 원, 퇴직금 1,458원 33전, 총독부의 은사공채 15만 원을 받았다. 1912년에 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윤덕영(尹德榮)은 경기도, 황해도 관찰사와 철도원 부총재 등을 지냈다. 조카인 순정황후가 황후에 책봉된 다음해인 1908년 시종원경에 임명되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장충단에서 이토 추도회를 열었다. 1910년 8월 윤택영, 민병석과 함께 고조 광무제를 협박하는 등 경술늑약 늑결에 공을 세워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7년 일본에서 관심을 가지던 중대사였던 순종 융희제의 일본 황실 참배를 성사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1919년 영친왕(英親王)의 정략혼인을 4일 앞두고 고조 광무제가 갑자기 붕어(崩御)했는데, 윤덕영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를 독살한 인물로 의심받고 있다.1925년에는 총독부 중추원 고문, 1940년 사망 직전에는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었다.
민병석(閔丙奭)은 1897년 대한제국 건국 후 궁내부 특진관, 헌병대 사령관, 각부의 대신, 시종원경 등의 고위직을 지냈으며, 대한천일은행을 비롯하여 직조회사와 농업회사 경영에 참여하는 등 산업계와 금융계에서도 활동하였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 초빙 작업을 위해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저격당하자 장례식에 조문 사절로 다녀왔다. 1910년 8월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勒結) 에 경술국적의 한 사람으로서 적극 협력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에는 이왕직(李王職) 장관이 되어 영친왕과 마사코의 정략혼인에 깊이 개입하였다. 1912년 메이지 일왕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1925년부터 1939년까지 총독부 중추원 고문(中樞院 顧問)을 5회 중임하였고, 친일 애국금체회의 발기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