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수(韓聖洙)는 1944년 1월에 학병에 징집되어 중국전선에 투입되었고 강소성 서주지역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천신만고 끝에 중일전쟁의 최전방인 부양에 위치한 한국광복군 3지대에 입대하였으며 광복군 3지대가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10분교에 임시로 설치한 한국광복군훈련반에서 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부양에 잔류하여 3지대의 기간요원으로 활동하였다. 김학규 지대장에게 간곡히 요청하여 상해를 중심으로 한 화남지역 공작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에 홍순명, 김영진 등과 함께 상해에 침투하여 한인청년들을 모집하고 공작거점을 마련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군자금을 요청하기 위해 상해에 거주하는 한국인 부호 손창식에게 접근한 한성수는 1945년 3월 13일에 동지 7명과 함께 상해 주재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일본군을 탈출한 전력 때문에 더욱 잔혹하게 고문을 당했으나 한국광복군의 기밀을 누설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일본군 군법회의(軍法會議) 법정에서 일본어 사용을 끝까지 거부하는 한편, 일본의 태평양전쟁은 반드시 패할 것이며 한국광복군이 당한 희생만큼 침략자인 일본도 고스란히 당할 것이라고 질타했으며 일본군 군법회의(軍法會議) 재판정을 상대로 죽음을 두려
이동휘(李東輝)는 1907년 일제의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에 분개하여 강화진위대 동지들과 항일의병봉기에 나섰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전후하여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고 특히 구국교육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강화와 평양 등지에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세우고 국학 및 근대학문과 군사교육을 병행하여 구국인재양성의 요람으로 활성화시켰다. 1908년에는 서북학회를 창립하는 한편 이동녕(李東寧),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에 의해 조작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투옥되었다. 1911년 북간도로 망명한 이동휘는 간민회(墾民會)를 조직하고, 1913년에는 연해주로 거점을 옮겨 권업회(勸業會)에 참여하는 등 한인의 자치와 결속을 도모하고 국내에서 전개하던 애국계몽운동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무장투쟁론을 구현하기 위해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건립을 추진하고 독립군을 육성하기 위해 대전사관학교(大甸士官學校) 등을 설립하였다.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좌·우익노선과 외교독립론·무장독립투쟁론이 하나로 결집되어 상해 통
김복한(金福漢)은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단발령의 강요로 전국이 소용돌이치는 와중에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행동에 나섰다. 12월 1일 이설·안병찬 등과 함께 홍주성에서 거병하여 창의소를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 거사는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한성으로 압송되어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고조 광무제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는 중차대한 위기에 처하자, 12월 2일 이설과 함께 상경하여 일본 세력을 축출하자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구금된 김복한은 낙향하여 안병찬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1906년 5월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한 의병 부대가 홍주성을 점령하였으나, 홍주의병도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김복한은 의병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구금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파리강화회의에 대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운동을 전개하였다. 영남과 호서의 유림들이 연대하여 연명한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만들어 보냈으며 이 파리장서운동으로 공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최석순(崔碩淳)은 1919년 남간도의 의병계열 독립군 단체인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집서(輯西)지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2년 8월 남간도 독립군 단체의 통일조직인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여하여 의용군 2중대장을 맡아 활약하였다. 1924년 4월에는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하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대동단결을 해야 한다는 선언서에 남만 군인대표 78명과 함께 서명하였으며, 5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가 결성되자 참의부 의용군 2중대장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참의부 최고 지도자인 참의장의 역할을 겸임하여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지휘하는 등 혁혁한 활동을 벌였다. 참의부는 1924년 5월 19일 압록강 일대를 순시 중이던 사이토 총독을 기습 공격하여 국경지대의 안정을 대내외에 선전하려던 총독부의 계획을 무력화시켰다. 일제는 남간도지역의 독립군 부대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계획하여 실행하였다. 1925년 2월 참의부(參議府) 참의장(參議長) 겸 2중대장으로 국내 진공작전과 군자금 모집, 일제 기관 파괴 등의 안건으로 참의부 소속의 5개 중대 군사회의를 집안현 고마령(高馬嶺)에서 주재하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제의 초산경찰서 경찰대 65명은
최용신(崔容信)은 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회 때 협성학생기독교청년회 대표로 참가하여 본격적으로 YWCA의 농촌계몽 사업에 참가했다. 1929년부터는 황해도 수안과 경북 포항 등지에서 봉사 활동을 하였다. 1931년 10월 YWCA 농촌지도원으로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샘골)에 파견된 최용신은 예배당을 빌려 강습소를 개설하고 아동과 청년,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통한 문맹퇴치에 힘을 기울였다. 생활 개선과 농가 부업 장려를 위한 부녀회와 청년회를 조직하여 주민들 상호간에 신뢰감을 조성하는 데도 앞장섰다.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탄압을 받는 등 어려움은 많았지만 굳은 노력으로 1932년 5월 강습소는 정식인가를 받았으며, 천곡학원(샘골학원) 건축발기회를 조직하고 유지들 및 YWCA의 보조로 1933년 1월 낙성식을 거행했다. 보다 장기적이고 실천적인 농촌계몽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34년 새로운 지식과 학문을 충족시키고자 일본에 건너가 3월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입학하여 뒤늦게 향학열을 불태웠으나 각기병에 걸려 학업을 중단했다. 9월 귀국과 동시에 YMCA 보조금 중단으로 운영난에 빠진 천곡학원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명하(李命夏)는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늑약이 강제 늑결되어 국권이 위협받고 일제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과감히 관직을 버리고 쓰러져가는 국권을 바로 잡고, 국망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의병운동에 투신하였다. 류인석의 문하로 문경에서 거의한 이강년 의병진에 참여하여 소모장(召募將)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군경과 무장투쟁을 벌이고, 친일관리들을 숙청하여 민족의 기를 드높였다. 이강년 의병장과 함께 1907년 말 13도창의군을 결성하여 한성진공작전을 전개하는데 힘을 보탰다. 이강년 의병장의 지시로 각지로 다니며 의병운동의 재기를 촉구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직후 경술늑약이 늑결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진룡 의병장과 함께 무장투쟁을 계속하여 갔다. 국내에서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서간도 일대의 의병계열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여 대한독립단을 창단하고, 무장대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대한독립단 무장대(武裝隊)에 참여하여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면서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였다. 의주(義州)·철산(鐵山)·용천(龍川)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조직인 보합단(普合團)과 연계투쟁을 전개하면서 의주·용천·선천 등지에서 친일파 관리들을
송병선(宋秉璿)은 1867년 충북 옥천의 이지당(二止堂)에서 시작된 강회활동을 시작으로 1905년까지 전국 각지를 순례하면서 143명의 사우와 1,100여 명에 이르는 제자들을 양성, 규합하였다. 이를 통해 대한제국 시대 일제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인력을 배양하고 국권회복의 토대를 마련했다. 1877년부터 1905년에 이르기까지 20여 차례가 넘는 상소를 통해 무분별한 개화정책과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를 개선하고자 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을 막고자 상소운동을 전개하여 정부를 상대로 내정의 정비, 강력한 군사력 배양, 외세의 척결을 주장하여 시정에 반영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884년의 신사봉사 8개조를 통해 대내적인 안정을 꾀하고 일제의 세력을 철저히 배격하여 국권회복의 토대 마련을 주장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2차례 상소를 통해 을사늑약의 파기와 을사5적을 처단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고, 주권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각국의 사신들에게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려 외교관계를 이용하여 무효화를 시도하였으나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고조 광무제를 직접 만나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한 방책을 강구하고자 1905년 12월 한성으로
김철(金澈)은 1917년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상해로 망명하였고, 1918년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자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초 선우혁·서병호 등과 함께 비밀리에 국내로 들어와 국제정세를 알리며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여 3·1 대한광복운동 봉기를 도왔으며 상해로 돌아와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수립운동을 폈다. 그해 4월 10일 1회 임시의정원의 전라도 의원으로 당선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장 제정 및 정부 조각에 참여하였고, 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임시정부의 재무위원 겸 법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8월 5일 임시정부 교통차장에 임명되어 당시 취임하지 않았던 총장 대리를 겸하면서 활약하였다. 1922년 김구 등과 시사책진회를 결성하여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를 앞장서 추진하였다. 1924년 임시정부 회계검사원 검사장, 1926년에는 국무령제 정부의 각료인 국무원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부흥에 힘썼다. 1930년에는 안창호·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조직에 동참하고 국무위원제 정부의 군무장이 되었다. 1932년에는 상해 한인동포들의 권리증진과 생활안정을 위해 조직된 교민단체인 대한교민단 정치위원으로 선출
현익철(玄益哲)은 1911년경부터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간도로 망명하였다. 간도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하였지만, 여의치 않자 귀국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은행권 위폐를 시도하려다 일경에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18년 다시 간도로 망명하여 서간도 흥동학교 교사로 민족교육에 힘썼고, 3·1 대한광복운동 직후에는 서간도지역의 유력한 독립운동기관인 한족회, 서로군정서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에는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하여 독립군 활동을 펴면서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 작전을 수행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서간도로 망명하여 1924년 남간도 지역 독립운동 통합 조직인 대한통의부의 외무위원장, 1925년 정의부 중앙집행위원 겸 재무부장, 1929년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과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7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1936년 말 일경의 감시를 피해 중국 상해로 다시 망명한 뒤 임시정부와 함께 남경, 장사로 이동하면서 조선혁명당을 재건하여 그 대표로 항일 민족역량의 통일을 위해 애쓰고, 앞장서 독립운동 정당 통일운동을
윤병구(尹炳求)는 1903년 10월 하와이로 건너가 호놀룰루에 조직된 한인 구국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1905년에는 하와이 한인사회 대표로 선출되어 이승만과 함께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하와이 한인 동포들의 독립요청서를 직접 전달하였다. 또한 헤이그 특사 이상설과 이위종이 1907년 뉴욕에 도착하자 이들과 유럽 각국을 순방하며 한국 특사로 활동하는 등 우리 한민족의 자주독립 열망을 전 세계에 알리는 구국 외교활동을 전개하면서 미주 한인사회의 중추적인 인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미주 한인들의 결합과 독립운동방안을 모색하고자 1908년 덴버에서 이승만, 박용만 등과 북미 대한인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하고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를 중심으로 강제 병합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1912년에는 대한인국민회 2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미주 각 지역으로 순회강연을 다니며 미주 한인들의 독립정신을 일깨우는데 앞장섰다. 1919년 3ㆍ1 대한광복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인국민회 교섭위원으로 선출되었고,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1차 한인대회에 참가하여 미국정부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청원서 작성자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19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