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金性洙)는 1915년 4월 운영난에 시달리던 중앙학교(中央學校)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 전력하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에는 경성방직회사(京城紡織會社)를 창립하여 민족자본 육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듬해 4월 3·1 대한광복운동을 계기로 형성하기 시작한 민족주의를 육성하면서 일제에 항거한 민족의 대변지 동아일보를 창간하여 계몽에 힘썼으며 일제의 언론 탄압으로 동아일보사가 사원들의 월급도 지불하지 못하는 경영난에 빠졌을 때 사재(私財)를 털어 어려움을 극복하기도 했다. 1922년 동아일보를 통해 전개한 물산장려운동과 1923년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 등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했으며, 1932년 3월 교육구국의 이념으로 경영난에 허덕이던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인수하여 일제에 맞섰다. 1935년부터 8·15 대한 광복이 되기까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우리 문화재의 일본 유출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학교 도서관에 비장할 고서(古書)와 박물관에 진열할 골동품 수집에 전력을 다했다. 1945년 9월 16일 천도교회관에서 송진우와 함께 우익세력의 정당인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당했
김경천(金敬天)은 1919년 2·8 대한광복선언을 계기로 귀국해 6월 초 이청천과 함께 간도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했고,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현역 일본군 장교인 김경천의 가세는 무장 독립 운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1919년 말 경에 김경천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 의용군을 모집하여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중국인 마적단과 싸웠으며,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 총사령관으로서 전투를 거듭하면서 시베리아 지역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21년 수청의병대의 지도자가 되었고 러시아의 혁명 세력과 연합하면서 연해주 지역의 한국인 지도자로 소련의 인정도 받게 되었다.1922년 수청의병대는 대한혁명단으로 개칭하였으며, 김경천은 사령관을 맡았다. 그해 말에는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이 조직되었고 김경천은 동부사령관을 맡았다. 이후 정세 변화로 러시아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이 소강 상태에 빠지면서, 연해주 무장 독립 운동의 선도격이던 김경천의 입지는 좁아졌다. 1922년 이후로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국경경비대의 장교로 일했다.
“부산이 확 뒤비지나?”-김정길, 문성근, 문재인 웃깁니다.4.11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부산판이 뒤틀리고 있다.작년 12월26일, 부산에서 김정길, 문성근, 문재인 3인이 느닷없이 이곳 부산에서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고 출마선언을(김정길 부산진을, 문성근 부산북강서을, 문재인 사상구) 하였다. 이들 3인은, 이날 출마의 변 일성이, “이명박 정부의 실정으로 고통 받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드리기 위해 저희 세 사람은 힘을 합쳐 민주주의 성지 부산에서 돌풍을 일으켜 야권의 총선승리를 이끌어 내겠습니다”로 시작되는 3인의 출마선언 변을 지켜보면서 ‘아! 장열하게 전사할 3인이 뭉쳤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 뇌리를 스치는 것은 “어쩌면 이들 3인에 의해 장열한 전사가 아니라 절망하고 고통 받는 우리 주변의 소박한 이웃과, 서민들에게 희망과 웃음을 줄 수 있는 작은 바램이 ‘4월의 하늘을 물들일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설레 임 으로다가 왔다. 지금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은 쇄신을 부르짖으며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체제로 몸부림치며 요란스러운 쇄신의 종을 울리지만 그 쇄신의 종은 이미 녹슬은 종이
구춘선(具春先)은 1903년 간도관리사 이범윤이 사포대를 조직하여 한국인의 보호에 나서자 온성 대안 양수천자(凉水泉子)에 보호소와 병영을 설치하고 간도에 살고있는 한국인 보호에 진력하였다. 1905년 이범윤이 연해주로 망명한 후 한인보호소를 운영할 수 없게 되자 용정촌으로 거점을 옮겼다.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3·1 대한광복운동이 전개되자 3월 13일 길림성 용정에서도 한성에서의 독립선언에 대한 축하식이 거행되었다. 3월 13일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인사들이 대부분 참석한 가운데 독립운동을 체계적이고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조선독립의사회가 조선독립기성총회로 개편되어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3·1 대한광복운동 직후 이익찬·윤희준·방달성 등과 함께 용정에서 대한독립신문을 간행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조선독립기성총회는 그 명칭을 대한국민회로 개칭하였으며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2월 연해주 방면으로부터 군총을 입수하여 독립군의 무력을 강화하였다. 같은 해 10월 29일 간도에 있는 간북대한의민회, 대한신민단, 대한광복단, 대한국민회 등이 병합하여 임시정부의 지휘 감독을 받는 총판부(總辦部)를 결성하였을 때 연길(
한용운(韓龍雲)은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때 태화관(泰和館)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출옥 후인 1922~23년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했고,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적극 참여해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했으며,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무산되었다. 한용운은 여성해방운동과 농민·노동 운동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불교의 자주화운동에 앞장섰으며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김법린·최범술·김상호 등이 조직한 청년 법려 비밀 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으며, 1936년 신채호의 묘비 건립과 정약용 서세 100년 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40년 창씨개명(創氏改名) 반대운동과 1943년 조선인 학병 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더타임스 이종납 편집장] “저는 더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고 박근혜 전 대표가 말했듯 따지고보면 지금 이 순간한나라당도 ‘더 얻을 것도 더 잃을 것도 없다.’지난 8.3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부결될 때부터 10,26 재보선에서 서울시장 패배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처참하고 무참하게 무너지는 한나라당이 아니었나?차기 총선에서 수도권 전멸 우려가 팽배해졌고 안철수 등장으로 박근혜 대세론마저 붕괴될 조짐을 보이면서 전통적인 보수 지지층이었던 40-50대마저 등을 돌려 ‘한나라당 몰락’이 목전에 전개되고 있었다.곳곳에서 한나라당 재창당이니 해체니 하며 환골탈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일부 의원들은 정치생명을 건 탈당까지 감행하고 있었다.이런 시점에 한나라당의 재창당에 버금가는 쇄신을 위해 사실상 한나라당의 생사여탈권을 거머쥔 ‘박근혜 비대위’가 출범했고 당내외에서 11명의 비대위원이 선출돼 그들이 당의 진로를 위해 총대를 맸다. 이들 중 보수논객이면서도 다소 좌파적 가치를 지닌 이상돈 비대위원이 이 눈치 저눈치 보느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할 말 제대로 못해온 기존 정치세력을 향해 모처럼 화끈하게 일갈했다. 이 위원은 “이재오 의원은 현 정권의 실
최익현(崔益鉉)은 1868년 10월 경복궁 중건의 중지, 취렴정책(聚斂政策)의 혁파, 당백전(當百錢)의 폐지, 사대문(四大門) 문세(門稅)의 폐지 등을 주장하며 흥선헌의대원왕을 비판했다. 1873년 11월 상소하여 만동묘(萬東廟)의 철폐를 비롯한 흥선헌의대원왕의 실정을 통박하고, 하야를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10년간 집권해온 흥선헌의대원왕이 물러나고 고조 광무제가 친정을 하게 되었다. 1876년 1월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이 추진되자 일본과의 강화(講和)는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으로 무한한 탐욕을 당해낼 수 없고 일본과 교역하게 되면 반드시 경제적 파탄을 초래할 것이며 양인(洋人)의 사교(邪敎)가 들어와 우리의 전통적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이유로 궁궐 앞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1894년 6월 경복궁 쿠데타가 일어나고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친일 개화파 정권을 적으로 규정하면서 개화정책의 전반적 폐지를 요구했으며,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의 처단과 역적들을 비호하는 일본에 대한 문죄를 요구했다. 1895년 8월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포천
조만식(曺晩植)은 1913년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취임했다. 이후 오산학교 교감을 거쳐 1915년 교장이 되었고, 1919년 2월 3·1 대한광복운동을 위해 교장직을 사임하기까지 무보수로 민족교육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3·1 대한광복운동 직후 보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평양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1월 만기를 1개월 앞두고 가출옥했다. 그해 10월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일제가 교장 취임을 승인하지 않아 1년 만인 1921년 4월 사임했다. 같은 해 5월에 숭실전문학교 강사로 2년간 봉직하는 동시에 평양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로 취임해 1932년까지 활발한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1922년 오윤선과 함께 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국산품 장려운동을 전개했다. 1923년 김성수·송진우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해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했고, 1925년 4월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지만 1년 만에 6·10 대한광복운동으로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1926년 9월 평양의 숭인중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일제측의 교장 승인 거부로 192
임병직(林炳稷)은 1913년 이승만(李承晩)의 소개로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주립대학에 입학했으며, 재학 중 한국학생평론을 창간하여 편집장을 맡았다. 이후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설립한 한인중앙학원·한인기독학원 등의 육영사업을 지원했다. 1919년 국내에서의 3·1 대한광복운동 소식이 3월 중순 현순(玄楯)의 보고에 의해 미국 각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하자, 4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이승만·서재필(徐載弼)·조병옥(趙炳玉)·장기영(張基永)·김현철(金顯哲)·류일한(柳一韓) 등 150여 명의 재미교포·유학생들과 함께 한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의 앙양과 미국 여론을 환기시킬 목적으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여 서기장(書記長)으로 활약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에 근무하면서 대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친서를 일본공사관에 전달했다. 1920년초 이승만을 수행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갔다. 1921년초 임시정부 외교부 참사 황진남(黃鎭南)과 파리·런던 등을 순회하며 유럽 각국에 일본 침략의 만행과 대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1941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재미한족연합회가 구성되자, 김호(金乎)·한시대(韓始大)·김병연(金炳淵)·송철(宋喆) 등과
[더타임스 여동활 칼럼니스트] 지난 17일 김정일이 사망한지 이틀이 지나도록 우리 정부는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안보태세다.이런 경천동지할 정보를 사전에 파악을 못한 것은 정부의 엄청난 직무유기이며 지탄의 대상이다, 또 정보기관의 대북정보분석 능력도 궤멸수준에 가깝다.19일 처음 국내방송에서 예고뉴스가 나갈 때 멘트된 내용을 보면 분명히 북한내부에 심상치않은 움직임이 있었고 방송도 이전의 북한의 정규 프로그램과는 전혀 다른 낌새가 나타났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제강화’‘우상화’ 등 전혀 엉뚱한 추측과 해석만 내놓았을 뿐 ‘김정일사망 가능성’같은 정보를 사전에 감지하지 못한 정보기관은 분명히 그 책임을 통감해야 된다.아직 북한은 분명히 대한민국의 주적이다. 김정일 사망소식이 들려오자 방송언론들도 일제히 김정일을 추모하는지 아니면 북한정권을 위로하는지 재탕삼탕 뉴스를 내보내는 것을 보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북한은 대한민국을 적화하려고 남침을 도발했고, 수많은 국민들을 도탄으로 몰아간 당사자들이다. 휴전한지 50년이 지난 얼마 전까지 이유없이 민간지역에 포탄을 퍼부었고 군함을 격침시킨 당사자들의 괴수다. 아직도 그 전쟁의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