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타임스 여동활 칼럼니스트] 김문수 지사가 미국에서 “안철수 원장을 영입하기 위해서 박근혜 전 대표가 기득권을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박근혜 전 대표가 총선 공천권을 포기하고 내년 대통령 후보도 포기하라”고 했다. 참 비겁한 김문수 지사, 남의 나라에 가서 막말을 해도 너무 도에 지나치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발언들이 제동없이, 여과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상식에 있는 언행으로 세상에 알려라. 박근혜 전 대표가 무슨 총선 공천권을 가졌는가? 지난 총선에서 친박에 대한 학살공천을 자행하고도 아직도 모자라 또 박 전 대표만 물어뜯고 있나?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에 토 달기는 뭣하지만 그래도 할말은 해야겠다, 한나라당을 구하고 지켜낸 박 전 대표 밀어내고 민중당 남민전 출신들에만 공천을 주어야 올바른 공천이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대안을 밝히면서 허접한 소리를 해라,지금 한나라당 주역들은 모두 김문수 지사가 지난날 공천심사위원장 시절에 공천한 사람들 아닌가? 광역단체를 이끌고 있는 공인으로서 하는 발언치고는 너무 무책임한 언동이다. 누가 언제 박 전 대표에게 공천권을 주었는가? 공천권이나 주고 포기하라 말라해야 하지 않겠는가?김문수 지사는 사회를
지난 지자체 선거에 이어 이번 서울시장 재보선에서 20대와 30대에 참패하자, 보수우파 진영에서도 세대론을 조금씩 조금씩 거론하기 시작했다. 또한 한나라당에서는 안철수 원장의 청춘콘서트의 짝퉁 격인 드림토크를 기획하여, 2030세대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수우파 진영의 2030 담론은 호통과 아첨으로 나눌 수 있다. 대한민국이 공짜로 건국된 나라가 아닌데, 어찌 너희 젊은이들이 벌써부터 국민세금이나 빼먹으려 하느냐는 호통과 그다지 재미도 없는 말장난 늘어놓고, 세금퍼주기식 정책만 내놓으면 2030세대의 표가 돌아올 거라는 아첨 말이다. 일단 아첨은 아예 머리 속에서 지우는 게 좋다. 아첨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표 얻을려는 정치공학적 발상이라는 게 너무 쉽게 드러난다. 대표적인 실책이 한나라당의 반값 등록금 정책이다. 차라리 진정한 보수우파라면 반갑등록금 외치기 전에, 20대의 다수에 해당하는 사병 월급 현실화 방안이 훨씬 더 설득력있는 정책이었을 것이다. 오직 젊은 세대를 표로만 보니, 퍼주기 정책의 우선순위도 따지지 못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반면 호통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단지 20대와 30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 세대가
서울시 보궐선거가 끝난 후 정치권 최대 이슈로 한미FTA가 급부상했다.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 이후 중상주의 정책을 채택한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성장해왔다. 공업화와 수출지상주의는 땅덩어리 작은 나라치고는 경제적으로 매우 큰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2010년 우리나라의 경제 순위는 GDP 기준 세계 15위를 기록했다. 기특한 일이다.그러나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따른 경제적 성과 못지않게 정치의 근본적인 목적인 ‘부의 균등 배분’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김영삼씨의 겉멋 정책 때문에 철저한 준비도 없이 OECD에 가입하는 바람에 우리는 1998년 혹독한 IMF를 겪게 되었으며, 김대중정권 때는 그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강대국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비정규직 제도를 채용, 이후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경제구조로 급격히 바뀌면서 중산층은 점점 줄어들고 서민으로 전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IMF사태는 한국에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강제로 입식한 슬픈 사건이요, 론스타같은 부패한 다국적 기업에게 사냥감을 몰아준 의도된 음모 같다. 세계경제는 유럽에서처럼 한치 앞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추락과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특히 미국 경제의 상징인 신
[더타임스 이종납 편집장] 조선이 건국된 지 얼마 안 돼 태종 때 모든 신료들이 하나가 되어 왕 계승 1순위였던 세자 양녕대군을 폐위시키려 하자 당시 이조판서로 있던 황희가 유일하게 세자폐위를 반대했다.황희는 “장자를 폐하고 아랫사람을 세움은 재앙을 부르게 되는 근본이고, 또 세자가 비록 미쳤다고 하나, 그 성품은 가히 성군이 될 것이오니, 치유에 주력하시기 바란다.”며 폐세자에 반대하는 주장을 굽히지 않아 결국 귀양까지 갔다.관용의 재상으로 알려진 황희는 이처럼 목숨이 오락가락 할 상황속에서도 원칙과 소신을 견지해 왔고 후일 더 크게 중용되어 조선시대를 통틀어 최고, 최장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오늘날 이념실종과 정치적 혼란이 거세지는 등 작금의 정치상황도 묘하게 돌아가지만 방법과 가치는 달라도 각기 처한 곳에서 ‘국익을 위해 독배’를 드는 경우가 더러 있다. 박세일 선진통일연합 상임의장과 이완구 전 충남지사 그리고 오세훈 전 서울시장 이들 3인은 각각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정책적 노선차이 때문에 현직을 박차고 나온 인물들이다. 박세일 의장은 지난 2004년 제17대 총선 때 국회의원이 되었고 박근혜 전 대표가 한나라당 대표로 있을 당시 정책위의장
노백린(盧伯麟)은 1900년 한국무관학교 교관, 육군연성학교 교장을 맡았으며 을사늑약 늑결과 군대 해산, 경술늑약 늑결에 반대했다. 1907년 안창호, 전덕기, 양기탁, 이동녕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1915년 미국으로 망명했고 미국 하와이 주에 머물면서 미군의 도움을 받아 박용만과 함께 한인 독립군 부대를 조직했다가,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여 1920년 캘리포니아 주 북부에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공군 독립군을 양성했다.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직후 결성된 한성임시정부에서 군무부총장을 맡았고,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군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까지 지냈으며 신채호, 박용만 등과 함께 무력을 통한 독립 운동을 지지하는 쪽에 속했다. 1919년 임시정부 군무부총장으로 임명되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선발되었으며, 2대 군무총장으로 재선임된 후, 미국에 머물면서 1920년 2월 20일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서 교포인 김종린(金鍾麟)의 적극적인 재정지원으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였는데, 1920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에 맞춰 JN-4D 2대를 이용선·이초 두 사람이 조종한 것이 한국인이 처음 비행기를 조종한
홍진(洪震)은 1898년 평리원(平理院) 판사, 충주재판소 검사를 지냈다. 1910년 경술늑약이 늑결되자 변호사가 되어 한성·평양 등지에서 애국지사를 변론하는 법정 투쟁을 계속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연락 책임을 맡아 활동했고, 4월 한성임시정부의 조직에 참가하여 법무차장이 되었고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법제위원장으로 헌법 개정, 국무위원 개선 등 제도 정비에 노력했고 11월에는 충청도 선거위원장으로도 활약했다. 1921년 4월 장붕(張鵬)의 뒤를 이어 상하이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단장이 되었고, 5월에는 의정원 의장이 되었다. 그해 8월 대(對)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의 간사장이 되어 한국의 완전독립을 주장하고 일본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했으며, 의정원 의원 25명의 연서로 태평양회의의 각국 대표에게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다. 다음해 7월 국민대표회의 문제를 둘러싸고 임시정부에서 의견대립이 생기자 김구(金九)와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노력했다. 1923년 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선임된 뒤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1926년 7월 국무령(國務領)이 되었으며, 9월 외무총장까지 겸임하면서 비타
[더타임스 이종납 편집장] 박근혜 전 대표가 “한국 정치가 위기다”라고 작금의 상황을 한마디로 언급했듯 세상이 놀랍게 바뀌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침묵의 나선형 이론’처럼 소수로 전락하고 있는 ‘보수’들이 이제는 ‘보수를 보수’라 하지 못하고 ‘보수의 끼’마저 감추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제는 국민들도 ‘보수’라고 하면 ‘수구’로 인식되기 때문에 ‘진보를 추구하는 보수’나 ‘개혁적 보수’라는 말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예전과 같이 ‘현 지도부사퇴’나 ‘임기응변식 정책발표’같은 조삼모사식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현 상황을 뒤바꿀 수 없는 최악의 위기에 내몰려 있다. 보수진영 조차도 급변해가는 정치상황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특정리더의 개인적인 주장이나 입장차이로 인해 갈갈이 찢어진 상태로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거두절미하고 보수진영과 한나라당이 살 길이자 난마와 같이 얽혀있는 정국을 수습할 마지막 카드는 박근혜 전 대표를 정치전면에 내세우는 일뿐이다. 범보수진영이 부르짖고 있듯이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 박 전 대표뿐이라면 ‘보수대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명분과 권한과 책임 등 모든 전
[더타임스 지만호 칼럼니스트] 지난 10월 26일 치른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거대 집권 한나라당 대 시민운동가와 이를 지원하기 위한 야권전체와의 한판싸움이었다. 삼심제로 보아서 시민운동가가 3대2로 이긴 싸움이다. 온 몸을 후벼 파는 독살을 무기로 싸우는 두 후보를 보는 객중의 구경 꾼 들 속엔 온 몸이 쓰리도록 함께 아픈 사람도 있는가 하면 서글픈 감정으로 돌아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차라리 어느 한쪽이 정책선거에서 하프게임으로 승패가 끝났다면 기절 한번하고 일어섰겠지만 네거티브공격으로 서로에게 주고받은 아픔의 고통이야 말로 치유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이러한 사연은 우리의 선거 고질병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역 갈등 조작에서 부터 용공색깔론으로 단골메뉴의 약발이 떨어지고 나니 이제는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조작하는 네거티브선거가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기에 말이다. 가장 서비스 적이고 유권자 편에 서는 정책 대결이 있음에도 별무 메뉴로 뒤 처져 있는 게 아쉬운 문제였다고 지적하지만, 그러나 정책 대결은 자칫 하면 부도 성 공약으로 흐지부지 폐기될 수가 있는 게 단점이다. 준비된 자료와 철저한 계산으로 공부하는 시간적 여유가 부족한 상태에서
10월26일 날 치른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거대 집권한나라당 대 시민운동가와 이를 지원하기 위한 야권전체와의 한판싸움이었다. 삼심제로 보아서 시민운동가가 3대2로 이긴 싸움이다. 온 몸을 후벼 파는 독살을 무기로 싸우는 두 후보를 보는 객중의 구경 꾼 들 속엔 온 몸이 쓰리도록 함께 아픈 사람도 있는가 하면 서글픈 감정으로 돌아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차라리 어느 한쪽이 정책선거에서 하프게임으로 승패가 끝났다면 기절한번하고 일어섰겠지만 네거티브공격으로 서로에게 주고받은 아픔의 고통이야 말로 치유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이러한 사연은 우리의 선거 고질병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역 갈등 조작에서 부터 용공색깔론으로 단골메뉴의 약발이 떨어지고 나니 이제는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조작하는 네거티브선거가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기에 말이다.가장 서비스 적이고 유권자 편에 서는 정책 대결이 있음에도 별무 메뉴로 뒤 처져 있는 게 아쉬운 문제였다고 지적하지만, 그러나 정책 대결은 자칫 하면 부도 성 공약으로 흐지부지 폐기될 수가 있는 게 단점이다. 준비된 자료와 철저한 계산으로 공부하는 시간적 여유가 부족한 상태에서 내 놓은 정책이야 말로 틀림없이 부도가
이유필(李裕弼)은 1900년대 초 안창호·전덕기·양기탁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12년 일본 정부가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할 목적으로 날조한 105인사건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유배형에 처해져 1년간 진도에 유배되었다.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발생하자 평안북도 의주 등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상하이로 망명했다.1919년 임시의정원 창설에 참여하였고 4월 상해 임시정부 내무부 비서국장을 역임했으며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 창간을 주도했다. 1920년 안창호와 임시정부 선전위원회를 설치하였고 그해 8월에는 미국 상하원의 의원단을 찾아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1921년 4월 한·중 양국이 대일항쟁에 공동 대처하자는 취지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 설립에 참가했다.1922년 김구, 손정도와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경리부장이 되었으며 1926년 김구가 노병회 이사장직에서 사퇴하자 후임 이사장에 취임했다. 1923년 8월 한인거류민단 민단장에 선출되어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장도 겸임하였고 잡지 민성(民聲) 등을 창간, 발행하였다. 1924년 12월 1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이 되었으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