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국회에서 한미FTA 비준안이 통과된 후 야5당과 좌파 진영은 여의도, 광화문 등 서울 도심에서 막무가내 시위를 벌이고 있다. 경찰은 집회신고 없이 벌이는 한미FTA 반대 시위를 해산하려 하지만 야당 등은 ‘정당연설회는 집회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사실일까. 시민과 함께 하는 변호사들(이하 시변)에 자문을 구한 결과 “집회는 그 형식보다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시변 공동대표인 이 헌 변호사는 “일주일 동안 한미FTA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보여준 행동을 보면 누가 봐도 ‘정당 연설회’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실질적으로 집시법 적용대상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일단 야간집회가 불법이라는 조항은 헌법불합치 판정이 났으니까 논외로 하더라도 ‘정당 연설회기 때문에 집회신고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건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설명했다. 다른 법률 전문가는 백 번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도로를 점거해 교통을 방해하는 것까지 정당연설회라고 주장하는 것은 누가봐도 억지라고 지적했다.한편 지난 26일 박창덕 종로경찰서장을 폭행한 시위대와 참가자 등이 ‘경찰이 왜 거기에 정복을 입고 들어오느냐, 자작극 아니냐’는 음모론 제기도 ‘집회 및 시위에
이광민(李光民)은 1915년 백부인 이상룡(李相龍)을 따라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한 뒤 봉천성(奉天省) 류하현(柳河縣)에 있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수료했다.이듬해 봉천성 통화현(通化縣) 삼도구(三道溝)에 있는 동화학교(東華學校)에서 교원으로 재직하면서 청소년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24년 7월 10일 1923년에 개최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가 개조파와 창조파로 양분되어 결렬되자 창조파에서는 연해주 해삼위(海蔘威)를 기반으로 이곳에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정부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연해주 내의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하여 추방당하고 중국 동삼성에 진출한 신숙(申肅)·윤해(尹海) 등과 양기탁(梁起鐸)·편강렬(片康烈)은 이장녕(李章寧)·박관해(朴觀海)·이청천(李靑天)을 설득하여 전만주통일의회 주비회 발기회(全滿洲統一議會 籌備會 發起會)를 조직하였는데 이광민은 군정서(軍政署) 대표 중의 한사람으로 참가하여 협의하였다. 1926년 1월 정의부(正義府) 중앙총부에서 내정과 외부 조직을 확장하려고 동삼성 각지와 국내에 위원을 파견하여 군인과 군자금을 모집할 때 파견되었으며 1926년 10월 24일 정의부 중앙위원 11인 중 한사람으로 선출되었으며
권준(權晙)은 1917년 광복회(光復會)조직에 참여하여 격렬한 대한광복운동을 전개하다가 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했다. 1921년 북경(北京)에서 김원봉(金元鳳)과 같이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군자금 조달과 폭탄 제조 등의 임무를 맡아 종로경찰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의 폭탄 투척과 동경 이중교(二重橋) 투척 등을 적극 지원했다. 1926년에 쑨원이 세운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수료하고 북벌전(北伐戰)에 참전하여 활약하기도 했다. 1926년 한구(漢口)에서 개최된 한국, 중국, 인도, 몽고, 안남(安南), 대만인 등으로 조직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집행위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1932년 남경(南京)에서 중국 정부의 후원을 받아 한국인군사학교를 설립하고 그 교관으로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입당하여 활약했다.1934년 중국군 연장(連長)으로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면서 항일전에 참전했다. 1944년 중경(重慶)에서 임시정부에 들어와 내무부 차장에 임명돼 활약하였다.
대한민국의 격동기라고 할까!1955년에서 1963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가 약720만 명에 이른다고 하니 적은 숫자가 아니다.이 세대가 70-80년 한국 경제를 부흥시키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였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끌은 주역들이다.고난의 시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과 못 다한 인생의 보람을 자식에게나마 다 쏟아 넣느라 진작 본인의 미래를 잊고 살아온 세대이다.어찌 보면 가시나무 새와 같은 인생을 살아온 역정이다. 한 마디로 나를 잊고 국가의 미래를 위한 희생 세대라고 하면 정답일 게다.이런 세대가 지금 정년을 맞이하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다는 기사를 보면 보통문제가 아닐 성 싶다.한 마디로 국가를 위해 뭐? 주고 자식을 위해 뭐? 을 몽땅 주고 나니 지장보살이 되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이다.호강에 젖어 양 강에 초 친다는 호남 지방의 우수 개 소리처럼 20-30대는 대학을 나오고도 실업에 지쳐있다.이들의 분노는 보궐선거 마다 야당에 표를 몰아주었다. 정작사회의 공로자격인 베이비 붐 세대는 어찌해야 좋을 것인지 고민 중이다.그 동안 애국하는 자세로 묵묵부답으로 지냈다고 하나 미래가 불안정한 작금에 와서는 누가 가장 복지정책을 잘 이행할
신숙(申肅)은 1907년 대한제국 탁지부 인쇄국에서 근무하면서 김남수(金南壽)·김남규(金南奎) 등과 함께 청파동에 문창학교(文昌學校)를 설립하고 육영사업에 진력하였다. 1909년 친일행각을 펼친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 처단을 계획하였으나 일제의 감시가 삼엄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으며, 이후 천도교 대구 대교구장을 지내는 등 천도교에서 활동하였다. 3·1 대한광복운동 직전에는 독립선언서의 교정과 인쇄작업을 맡았으며, 3·1 대한광복운동 이후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20년 4월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상해로 망명하였고 천도교 상해전교실을 설치하였으며 천도교 이념에 바탕을 둔 통일당(統一黨)을 조직하였다. 1920년 9월 북경으로 가서 군사통일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군사단체의 통일과 무장독립운동 노선을 주장하였다.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에 창조파 대표로 참여하여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국민대표회의가 해산된 뒤 창조파는 국호를 한(韓)으로 하는 국민위원회 정부를 세웠으며 내무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톡·길림·하얼빈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1927년 이도하자(二道河子) 부근의 송봉산
류관순(柳寬順)은 공주에서 전도하던 감리교 선교사 사부인(史婦人 :Alice Hammond Sharp)의 권유로 1916년 이화학당(梨花學堂) 보통과에 입학하였으며, 보통과를 졸업한 1918년 이화학당 고등과에 입학하였다. 사부인(史婦人) 엘리스 샤프는 집안 사정이 어려운 류관순을 배려하여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한성에서 3·1 대한광복운동에 참가. 학생들이 다칠 것을 걱정한 프라이 교장이 3.1 대한광복운동 참여를 만류했으나, 학교 담을 넘어가서 3.1 대한광복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3월 10일 모든 학교에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류관순은 같은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 류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갔다.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아우내(천안 병천)에서 3.1 대한광복운동을 지휘했다. 일본 헌병대는 류관순의 부모를 죽이고 류관순을 체포하여 검사국으로 이송하였다.류관순은 공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선고되었으며 경성 복심법원에 항소하여 징역 3년형이 언도되었다.1920년 9월 28일 서대문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獄死)하였다.
[더타임스 장지연 칼럼니스트] 10.26 보궐선거 이후 불기 시작한 시민사회세력들의 정치권에 대한 영향력은 이제 외곽을 벗어나 정치권 진입이라는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정치적 조언을 떠나 직접 세력화된 정치집단을 만들어 여의도 진입은 물론 대권이라는 큰 틀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그러나 이들 시민사회세력들의 이러한 꿈은 경험의 미숙과 본질을 벗어난 욕심으로 인해 완성되지 못하고 도화지 속의 스케치로 끝날 수도 있다.현재 확실한 창당목표를 가지고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한반도선진화재단 박세일 이사장의 경우 애초에 기대했던 모습과는 달리 혼란스런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이번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안철수의 돌풍이 이어지고 시민단체 출신인 박원순 변호사가 경선에서는 민주당 후보를 본선에서는 한나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이 된 것은 국민들이 기존 정당에 대한 실망의 표현이자 기존 정치인들에 대한 심판이었다.새로운 보수정당 탄생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창당을 하겠다고 나선 박 이사장의 경우 국민의 뜻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발언을 하고 있다.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가치와 정치적 기준을 뼈대로해 새로운 집을 지어 많은 식구들을 자신이 지은 집으로 모이게 해야
박용만(朴容萬)은 1904년 보안회(保安會)가 주도한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에 의하여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으며 옥중에서 이승만과 만나 동지가 되었다. 출옥 후 1905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미국의 네브라스카주 덴버로 가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06년 헤이스팅스 대학,1908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 입학해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군사학을 부전공으로 택하고 ROTC 과정도 이수하였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09년에는 네브라스카주 커니에 있는 한인 농장내에 한인소년병학교(The Young Korean Military School)를 열어 30여 명의 학도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1910년에는 헤이스팅스대학 구내로 이전하였다.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을 맡았으며 국민개병설(1911년)과 군인수지(1912년)를 집필했다. 미국 체류 중 네브라스카에서 옥중 동지 이승만을 재회하였다. 1913년 2월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했다.1914년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大朝鮮 國民軍團)을 창설하여 미주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하였고, 국민보 주필을 맡는다. 1917년 뉴욕에서 열린 약소국 동맹회(弱小國 同盟會)에 참석하였으며,
이승희(李承熙)는 서양 종교의 배척과 내정개혁을 요구하는 시사소(時事疏)를 올렸다.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을사오적의 처형과 을사늑약의 파기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려, 그해 12월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4월 석방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경북 성주의 국채보상단연회(國債報償斷煙會) 회장이 되어 활동했으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서한을 보내 일제의 침략 만행을 규탄했다. 같은 해 일제 통감부의 강압에 의해 고조 광무제가 퇴위하자 일본 정부에 항의하고 세계 여론에 강제 퇴위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일제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이 더욱 노골화되자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이상설(李相卨)·류인석(柳麟錫)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승희는 1909년에는 이상설(李相卨) 등과 함께 간도(間島)와 연해주(沿海州])의 국경지대에 있는 길림성(吉林省) 봉밀산(蜂密山)에 황무지를 구입, 100여 가구를 정착시켜 한인독립운동기지인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고,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14년에 요동(遼東)으로 가서 한인공교회(韓人孔敎會)를 창설하고, 공자묘(孔子廟) 등 중국 각지의 유교성적지(儒敎聖跡地)를 순례
김창숙(金昌淑)은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라는 상소를 올렸고,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 성토 건의서를 냈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1907년 대한협회(大韓協會)가 설립되자 대한협회 성주군지부를 조직하고, 총무에 취임하였다. 1909년에는 사립학교인 성명학교(星明學校) 설립에 참여하였다. 일진회가 한일합병론을 주장하자 동지를 규합하여 이를 규탄하는 글을 중추원에 발송하였다.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이 늑결되자 통곡하면서 울부짖었다. 이후 술에 취해 방랑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압송되었다. 부산을 떠나 대구로 압송된 뒤, 경찰서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 대표들이 연명으로 서명,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에게 우편으로 제출하였으나 좌절되었고 수백명의 유학자들이 체포되었다.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