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복(安龍福)은 1693년(숙종 19년) 울릉도에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3월 박어출과 함께 일본인 어부들에게 납치되어 인슈(因州)로 끌려갔으며 호키슈(百耆州) 번주(藩主)가 막부(幕府)에 보고하자 막부는 설득하여 돌려보내라고 명령했고 6월 30일 안용복은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안용복은 호키슈 태수…
채응언(蔡應彦)은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의병부대에 투신하였다. 초기에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점차 능력을 인정받아 이진룡 의병부대의 휘하 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평안남도 · 강원도 · 황해도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
한성수(韓聖洙)는 1944년 1월에 학병에 징집되어 중국전선에 투입되었고 강소성 서주지역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천신만고 끝에 중일전쟁의 최전방인 부양에 위치한 한국광복군 3지대에 입대하였으며 광복군 3지대가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10분교에 임시로 설치한 한국광복군훈련반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동휘(李東輝)는 1907년 일제의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에 분개하여 강화진위대 동지들과 항일의병봉기에 나섰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전후하여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고 특히 구국교육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강화와 평양 등지에 보창학교…
김복한(金福漢)은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단발령의 강요로 전국이 소용돌이치는 와중에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행동에 나섰다. 12월 1일 이설·안병찬 등과 함께 홍주성에서 거병하여 창의소를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 거사는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한성으로 압송되어 10년 유배…
최석순(崔碩淳)은 1919년 남간도의 의병계열 독립군 단체인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집서(輯西)지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2년 8월 남간도 독립군 단체의 통일조직인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여하여 의용군 2중대장을 맡아 활약하였다. 1924년 4월에는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하여 임시…
최용신(崔容信)은 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회 때 협성학생기독교청년회 대표로 참가하여 본격적으로 YWCA의 농촌계몽 사업에 참가했다. 1929년부터는 황해도 수안과 경북 포항 등지에서 봉사 활동을 하였다. 1931년 10월 YWCA 농촌지도원으로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샘골)에 파견된 최…
이명하(李命夏)는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늑약이 강제 늑결되어 국권이 위협받고 일제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과감히 관직을 버리고 쓰러져가는 국권을 바로 잡고, 국망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의병운동에 투신하였다. 류인석의 문하로 문경에서 거의한 이강년 의병진에 참여하여 소모장(召募將)으로…
송병선(宋秉璿)은 1867년 충북 옥천의 이지당(二止堂)에서 시작된 강회활동을 시작으로 1905년까지 전국 각지를 순례하면서 143명의 사우와 1,100여 명에 이르는 제자들을 양성, 규합하였다. 이를 통해 대한제국 시대 일제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인력을 배양하고 국권회복의 토대를 마련했다. 1877년부…
김철(金澈)은 1917년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상해로 망명하였고, 1918년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자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초 선우혁·서병호 등과 함께 비밀리에 국내로 들어와 국제정세를 알리며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여 3·1 대한광복운동 봉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