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익철(玄益哲)은 1911년경부터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간도로 망명하였다. 간도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하였지만, 여의치 않자 귀국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은행권 위폐를 시도하려다 일경에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18년 다시 간도로 망명하여 서간도 흥동학교 교사로 민족교육에 힘썼…
윤병구(尹炳求)는 1903년 10월 하와이로 건너가 호놀룰루에 조직된 한인 구국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1905년에는 하와이 한인사회 대표로 선출되어 이승만과 함께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하와이 한인 동포들의 독립요청서를 직접 전달하였다. 또한 헤이그 특사 이상설…
최시형(崔時亨)은 1861년(철종 12년) 동학교도가 되었고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2대 교주가 되었다. 1864년 조선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에 은신하였다가,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 울진으로 돌아다니며 포교에 힘썼다.1871년(고조 8) 이필제(李弼濟)가 그의 승낙 없이 교조 신원…
전봉준(全琫準)은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내게 하고 양민의 재산을 수탈하는 행위를 일삼았고 1893년 물세를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만석보 밑에 다시 보(洑)를 축조하여 불법으로 세를 징수하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음력 2월…
이준용(李埈鎔)은 1907년 8월 14일 영선군(永宣君)에 봉해져 종1품 숭정대부의 자품을 받고 대한제국 육군 참장(參將)이 되었으며, 12월에 이화대수장(李花大綏章)을, 1908년 9월 서성 대수장(瑞星大綬章)을 차례로 받았다.1909 - 1910년 친일 단체 신궁봉경회 총재를 맡아, 한국의 건국 시조인 단군을…
이재면(李載冕)은 1864년 문과에 급제하여 고위 관직을 거쳤다.1882년 12월 청나라에 유폐중이던 아버지 흥선헌의대원왕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1883년 3월에 일시 귀국하였다. 5월에 다시 청나라에 가서 흥선헌의대원왕을 봉양하였다.1892년 봄,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
이두황(李斗璜)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 우선봉으로 공주전투에서 전봉준부대를 이인역(利仁驛)에서 격퇴하고, 전주를 탈환하는 등의 전공을 세웠다. 이어 청일전쟁에 참전하여 통역과 정찰활동을 했다. 1895년 양주목사가 되었다가 일본인이 교관인 훈련대 2대대…
우범선(禹範善)은 1876년 무과 시험에 급제한 뒤 황해도 지역에 배치 받아 근무하다가, 1881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창설되었고 별기군에 참여하면서부터 일본을 배후로 둔 개화 세력과 가깝게 지냈으며 명성황후와 대립하여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1894년 일본군이 명성황후 세력을 실각시킨 뒤 개화파…
윤효정(尹孝定)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탁지부주사로 근무하였고, 1898년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하다가 고조 광무제 강제 퇴위 음모사건에 관련되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고베에서 박영효·우범선과 조일의숙을 세워 한국의 유학생을 수용하였다. 윤효정이 우범선과 교제하며 그가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최석민(崔錫敏)은 의정부와 내각의 관리로 일하다가 지방의 군수로 오랫동안 근무했다. 최석민은 관제 정비와 지방 제도, 세금 분야 등의 실무 전문가로 점차 고위직에 올랐다.1906년 내부협판(內部協辦) 및 지방세조사위원에 임명되었고, 1907년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대한제국 황실의 국유 재산을 조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