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구(李容九)는 1905년 11월에 일진회의 명의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일진회선언서를 발표했으며 12월에 일진회의 회장이 되었다. 1906년 9월 시천교(侍天敎)를 세우고 교조가 되었다. 1907년 5월 일진회의 이름으로 정부의 국채보상운동,반을사늑약운동을 추궁하여 내각의 사퇴를…
황학수(黃學秀)는 1898년(광무 2) 대한제국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참위로 임관된 뒤, 친위대 및 시위대 소대장을 거쳐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 교관, 안동진위대장,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 교관을 역임했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고향으로 내려가 지방유지들과 협력, 동명학교…
이근택(李根澤)은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하여 발탁되었다. 명성황후가 환궁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1884년 무과에 급제한 후 단천부사·길주목사 등을 지내고 충청도 수군절도사·병조참판을 역임한 후 1897년 친위연대 3대대장으로 정부 전복을 음모하다가 제주…
이지용(李址鎔)은 1887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895년 칙명을 받아 일본을 유람하고 돌아왔으며, 궁내부 협판을 역임하다가 1901년 주일 공사를 지냈다. 1903년 10월 무렵 일본 측과 협상하여 대한제국이 일본을 돕도록 힘썼으며, 1904년 2월 외부대신으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 엔을 받고 한…
권중현(權重顯)은 1902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의 교장 임시 서리가 되었고, 1903년에는 육군법원장에 임명되었다. 1904년에는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되었다. 철도원 총재 임시 서리도 겸했다.1904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 위문사로 파견되는 등 일본의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서…
송병준(宋秉畯)은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을 따라 통역관으로 귀국하였다. 일본군 통역관으로 대한제국 귀국한 후부터는 완전히 친일파로 변신하여, 비밀리에 일제의 지시를 받아 이용구(李容九) 등과 함께 일진회를 조직하였다. 윤시병(尹始炳)과 함께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는데 가담했다…
이재곤(李載崑)은 1880년 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을 시작으로 홍문관 교리와 지방의 현감 등을 거쳤다.1896년 비서원경, 1898년 종정원경 등을 지내며 고위직에 올랐다. 1907년 정미늑약 늑결 때는 학부대신으로서 공을 세워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서훈받았다. 신사회, 대동학회, 대한여자…
임선준(任善準)은 1885년 별시(別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승정원에서 관직을 시작했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과 시종원(侍從院) 좌시종 등을 거쳤다.1907년 이완용의 친일 내각에서 내부대신을 맡아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 강제 퇴위와 정미늑약(丁未勒約) 늑결 과정에서 적극 협력했다. 1…
이완용(李完用)은 고조 광무제를 협박하고 을사늑약을 늑결한 을사5적의 수괴이다. 일제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 총리대신 겸 궁내부대신이 되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진회(一進會) 회장 송병준(宋秉畯)과 함께 고조 광무제에게 책임을 추궁, 양위할 것을 강요하고 협박하여 순종…
윤덕영(尹德榮)은 경기도, 황해도 관찰사와 철도원 부총재 등을 지냈다. 조카인 순정황후가 황후에 책봉된 다음해인 1908년 시종원경에 임명되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장충단에서 이토 추도회를 열었다. 1910년 8월 윤택영, 민병석과 함께 고조 광무제를 협박하는 등 경술늑약 늑결에 공을 세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