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녕(李東寧)은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1898년 이종일이 경영하는 제국신문에 사설을 집필했다.1902년 이상재와 손잡고 YMCA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양기탁, 신채호, 조성환과 같이 청년회를 조직한 뒤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며 김구, 이회영을 알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늑결되자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1906년 북간도로 망명, 이상설과 함께 한국 최초의 해외 사립학교인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 한국동포의 2세의 민족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대한광복운동의 기수들을 길러냈다. 이 때 이상설이 2명의 특사와 함께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가자 한때 귀국하여 안창호 · 전덕기 · 양기탁 · 이동휘 · 이갑 · 유동열 등 동지들을 모아 신민회를 조직했다. 이동녕은 안창호 · 이회영과 협력하고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 공립협회와 대한매일신보의 조직과 발행을 지원하였다. 한편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설립함에 있어서도 크게 조력하였다. 삼원보에 망명하여 이석영 · 이철영 · 이회영 · 이시영 형제 및 이상룡과 함께 한국인 자치기관인 서로군정서를 설립하고 교포들의 신분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이동녕은 이상
미국 유학생 신분이던 안창호(安昌浩)는 1905년 한인친목회를 발족시켜 한인공립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제에 강탈당하자, 1907년 귀국하여 대한국인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는 애국 계몽 운동 외에도, 1909년 김좌진·이갑(李甲) 등과의 서북학회 창립을 했다.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신민회, 대성학교 설립 등을 위해 서울과 평양 등에서 여러 차례 연설을 했으며 탁월한 웅변력으로 수천 인파의 마음을 사로잡곤 했다. 1907년 2월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의 초청연사로 초빙되어 강연했다.1908년 안창호는 대성학교를 평양에 설립하였고 1909년 청년학우회의 창설에 가담했다. 191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의 중앙 총회 조직에 참석하고 국민회 초대 총회장에 선임했다. 신한민보(新韓民報)를 발간하고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창립하고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고 이어 국무총리 대리에 선출했다. 대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우선 인재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며 인재 육성과 실력
한나라당이 잘못된 판단으로 깊은 수렁으로 계속 빨려 들어가고 있다.부자 아빠를 둔 50%의 아이들에게는 당분간 급식비를 걷어야한다며 금시초문의 투표까지 걸고, 게다가 간신히 얻은 시장직마저 헌신짝 버리듯 당과 상의도 없이 도박하듯 오세훈 서울시장은 올인하고 있다. 그야말로 물귀신 작전이 따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3.3% 이상의 투표참여율을 달성하기에는 누가 보더라도 힘들다고 본다. 작년 6.2 지방 선거 때 오시장이 얻은 표는 208만 6127표로 25.4%에 머물고 말았다. 때문에 이번 선거에서는 279만 표를 넘어야 33.3%를 채울 수 있다. 유권자 수는 정확히 279만5760명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측은 휴일도 아닌 평일에 이루어지는데다 관심도 적기에 이 수치를 채우기 힘들다 보고 있다. 아니, 이승만 시절 사사오입으로 억지 부리다 정권마저 무너져 내린 수치에도 근접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러한데 여당의 홍준표 대표와 나경원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친이계에서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는 명분 약한 선거에 깊숙이 관여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출구전략마저 없이 홍 대표는 33.3%를 넘지 못하면 민주당 책임이라는 궤변으로 미리 결과를 예측한
이상설(李相卨)은 1896년 성균관(成均館) 교수가 되고, 탁지부(度支府) 재무관에 임명되었으며 1904년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했을때,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해 8월에 보안회(保安會)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大韓協動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이상설은 1905년 법부 협판,의정부 참찬을 지내며 외국 서적을 참조하여 만국공법(萬國公法)등 법률을 번역하고 연구했으며 을사늑약 당시 을사늑약 강제 늑결의 결사 반대와 을사5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고조 광무제에게 5차례 올렸고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국권 회복,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1906년 이동녕, 정순만 등과 함께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령 연해주 지역인 연추로 가서 이범윤과 국권회복운동에 논의하였고, 간도 용정촌으로 가서 여준,왕창동,박무림 등과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신학문과 항일 민족교육에 힘썼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다음해 서전서숙을 문을 닫아야만 했다. 1907년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의 발의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2회 만국 평화 회의가 개최되자, 고조 광무제는 이상설을 정사로 하고, 고조
요즘 무상급식 문제로 오는 24일 투표가 예정된 가운데 말들이 많다.청와대나 나경원 의원은 투표에 적극 참여하라는 간접 의사표시나 트위터 글로 인하여 야당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받거나 심지어 선거법 위반으로까지 비화될 전망이다.왜 이런 문제에 여당이 수렁에 깊숙이 빠져야하는지 한나라당 지도부는 모르는 것 같다. 작금 서민들 삶은 부자감세 및 간접세 증가 등으로 죽을 맛이다. 당장 작년보다 배 가까이 오른 야채 등의 농산물 값은 차치하고라도 휘발유 가격에서도 이미 민심은 폭발 직전이다. 정부의 정책은 전세가격 정책에서 보듯 항상 후수를 두거나 돈 많은 사람 집 더 사라고 하는지, 다수의 세입자 입장과는 거리가 멀다. 경제 및 사회 전반에 관한 정책도 공생이니 공정사회니 뭐니 말은 요란해도 실제로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고 국민은 도처에서 아우성이다.특히 22조원도 넘는 국가 예산을 4대강 사업에 왜 올인하는지? 과연 얻은 것은 무엇인지 국민들은 묻고 있다. 수 십 만개의 일자리 창출? 홍수 예방? 오히려 대다수 국민은 환경파괴를 염려하며 지금이라도 당장 중지하기를 바란다.작금 밑바닥 민심은 그야말로 폭발 직전인데도 여당은 이를 모르는 것 같다. 가히 내년 수도권 지
[더타임스 장지연 칼럼니스트]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사활을 걸고 있는 무상급식실시 서울주민투표에 박근혜 전 대표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오세훈 서울시장의 2012년 대선불출마 선언에도 불구하고 박 전 대표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발언 한번 하지 않고 있고 친박계 의원들도 움직이질 않고 있다. 한 술 더 떠 유승민 최고위원은 “서울시 주민투표에 당 이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최고위원회의에서 말 하고 있다. 정말 한심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지금 박 전 대표가 여야 차기 대선후보 중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앞서 나가고 있다고 하지만 과거 이회창 총재나 고건 전 총리에 비하면 현저히 낮다. 내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대통령후보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한나라당 전체 당원들의 단합된 지지를 받아 내지 못 한다면 야권단일 후보에게 패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지금 냉정히 분석해 보면 전반적으로 한나라당 후보가 야당 후보에 비해 매우 불리한 상황이다. 이미 박 전 대표의 지지기반이 취약한 서울과 경기지역의 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들이 민주당으로 도배 되어 있다. 강원도와 충남에서도 민심이 한나라당을 떠 난 상태고 부산 경남지역 역시 민심이 심상치 않은 상황이다. 지난번 지방선거에서
안중근(安重根)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대한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로 갔다.1906년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으며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했다. 1907년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활동했으며 7월 이토 히로부미에 의한 고조 광무제의 강제 퇴위와 정미늑약의 늑결, 군대 해산에 따라 강원도에서 정미독립전쟁을 했다. 안중근(安重根)은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부대를 창설하기 위해 두만강 부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의 임시사찰(臨時査察)이 되었고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대한독립군 부대의 창설을 협의하는 한편,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 부대 창설의 준비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최재형(崔在亨)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연해주의 한인촌을 돌아다니며 대한독립군을 모았으며 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이범윤을 총독, 김두성(金斗星)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참모중장이 되었으며 두만강 부근의 노브키에프스크를 근거지로 훈련을 했다.1908년 6월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 함경북도 경흥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격파했으며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하여 경흥,신아산 전투에서
이준(李儁)은 1895년 법관양성소에 입학, 1896년 2월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되었다.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참여했으며 11월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계몽활동에 앞장섰다. 1902년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개혁당을 조직하여 정치개혁운동을 전개했다.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항하여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를 조직, 총무를 맡아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대한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자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맡아 결국 일본의 요구를 저지시켰다. 12월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하여 공진회(共進會) 회장을 맡아 반일투쟁을 주도했다. 1905년 윤효정(尹孝定)·양한묵(梁漢默) 등과 같이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했으며, 11월 일제가 강압으로 을사늑약을 늑결하자 조약폐기를 요구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했다. 1906년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하여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설립했으며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발기하여 유학생들의 장학사업에 힘썼다. 1906년 평리원(平理院)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활약
류인석(柳麟錫)은 주리적 성리학자인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전통적 유교질서인 정(正)에 대비하여 서양세력의 침략 및 서양 문명의 수용을 사(邪)로 규정하고 이에 대항하려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받아들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전국에서 개국 반대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홍재구(洪在龜) 등 강원도·경기도 유생 46명과 함께 척양소(斥洋疏)를 올려 개국이 부당함을 상소했다. 1895년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공사 미우라에 의한 명성황후(明成皇后) 살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斷髮令)이 시행되자 유생들의 을미독립운동이 일어났고 류인석은 총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전국 사림(士林)에게 격문을 띄워 개화에 반대하는 척왜양(斥倭洋)의 대의를 호소했다.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제 늑결되자, 전국 유림들에게 의토(義討)·언토(言討)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1907년 정미늑약이 강제 늑결되고 군대 해산이 이루어지자 전국민의 조직적인 성토대회로 일본을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한광복운동 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고 이범윤(李範允)·이남기(李南基)·이상설(李相卨) 등의 추대를 받아, 13도의군(十三道義軍) 도총재(都總裁)가 되어 13도
심순택(沈舜澤)은 1879년 예조판서로서, 일본 대리공사(代理公使) 하나부사 요시타다와 강화도조약에 의거하여, 함경도 원산진 개항을 의결하였다. 1881년 정부의 기구 개편에 따라 통리기무아문사(統理機務衙門事) ·기계군물함선당상(機械軍物艦船堂上)이 되어 신무기 제조 및 군사훈련을 청(淸)나라에 의뢰하는 한편 일본 군사 시설의 시찰을 장려하였다. 심순택은 1884년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하고 사대당(事大黨) 내각의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우리 나라는 단군 이래 삼대의 문물을 계승하여 천하 문명이 우리에게 있고, 제황(帝皇)의 통(統)이 또한 우리에게 있으므로 독립의 기초를 세우고 자주의 권을 행할 때가 되었으며 하늘과 조종(朝宗)의 뜻이라고 칭제(稱帝)를 주청하였다. 1897년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을 지내고,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大臣)에 임명되었다. 대한(大韓) 이라는 국호와 광무(光武) 라는 연호를 쓸 것을 주청하였으며 의정대신으로서, 환구단을 축조하고,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의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는 것을 지휘하였다. 고조 광무제의 대한제국 건국과 동시에 대한제국 초대 의정대신이 되었다. 1901년 대한제국 건국 1등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