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타임스 지만호 칼럼니스트]우리나라 연령별 가장 인구수가 많은 20/30대, 지금 이들에겐 가장 부끄러운 꼬리표가 달려 있다. OECD국가 중 자살 율 1위, 취업률 꼴찌란 이름표다.교육 율 세계상위권에 들어있으며, 고등학교 졸업의 80%를 넘는 젊은이들이 대학을 나왔지만 이들에겐 OECD 국가 중 최고의 실업율과 자살이란 불운의 현실속에서 해매고 있다.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 구조에 따른 모순에도 이유야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정치 지도자들로부터 얻은 신뢰에서 더 큰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들의 단골 메뉴인 포플리즘이 선거 때 마다 젊은 유권자를 활용하고서는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야 말로 오늘날의 청년실업 대란으로 몰고 온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지난 30여 년간 정치성포플리즘으로 인한 국고 낭비가 청년100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었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대한민국 선거사상 선거혁명을 일으켰다는 지난16대 대통령 선거만 보더라도 그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확률은 0%로였다. 그러나 젊은 층의 투표 참여로 당선이란 결과를 만들어 이변을 일으켰던 것이다. 한 마디로 젊은이들은
서광범(徐光範)은 1879년 김옥균, 박영효와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1882년 4월 김옥균과 함께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였고, 9월 박영효의 종사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신진 문물을 견학하였다. 1883년 6월 보빙사 민영익의 종사관으로 미국의 주요 도시를 시찰하였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후 1년 만에 귀국하였다.1884년 12월 근대식 개혁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거사하였다. 1894년 12월 2차 김홍집 내각의 법부대신(法部大臣)으로 기용되었으며 내부대신인 박영효와 2차 갑오개혁(甲午改革)을 적극 추진하였는데 사법제도의 근대화에 노력하여 재판소 구성법, 법관양성소 규정 등을 제정하고 참형(斬刑)이 비인도적임을 지적하여 교수형(絞首刑)제도로 대체하였다. 4차 김홍집 내각(1895. 10)에 학부대신(學部大臣)에 기용되었다가, 12월 주미특명전권공사로 활약하였다.
박영효(朴泳孝)는 1870년대 중반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개화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으며 유대치를 중심으로 김옥균·홍영식·서광범 등 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정치적 혁신을 부르짖고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고자 했다.1882년 제물포 조약에 따른 사과 사절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태극(太極) 문양과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四卦) 도안의 조선, 대한제국의 국기 태극기(太極旗)를 처음 그려서 사용했다. 1882년 음력 12월 19일 한성부판윤으로 임명되었다. 1883년 음력 3월 17일 광주부(廣州府) 유수로 발령을 받았다.개화당 요인들과 협의하여 1884년 음력 10월 17일 우정국 청사의 낙성연(落成宴)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내각이 조직될 때 친군전후영사(親軍前後營使) 겸 좌포장(左捕將)이 되어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정변이 실패하자 역적으로 몰려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더타임스 장지연 칼럼니스트] 요사이 언론에 회자되고 있는 문재인의 운명론이 정치권의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야권의 유력 대선후보와는 달리 정치현장과 동떨어진 거리에서 비교적 조용히 활동하고 있는 문재인 노무현재단이사장이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에서 높게 나타나자 이미 정치권에서는 그의 대선출마를 기정사실로 받아드리고 있는 분위기다.문재인 이사장이 급부상하면서 그의 운명에 대한 분석들이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잇는 가운데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운명론도 함께 등장하고 있다.그 이유는 박근혜 전 대표나 문재인 이사장이 정치권에서 비교적 조용한 행보를 보여 온데 비해 두 사람 모두 지지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는데 있다. 필자는 서로 말 수가 적은 이 두 사람의 운명이 각기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주변 환경과 맞물려 그 명암이 바뀔 가능성이 클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우선 박근혜 전 대표의 경우 여야 통틀어서 차기 대선주자 중 압도적인 지지율로 1위를 달리고 있지만 8월 24일 실시되는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의 결과에 의해 순항을 하느냐 거친 파도를 만나냐에 대한 운명이 결정되어진다.만일 오세훈시장이 무상급식에 실패를 거둘 경우 박 대표는 대세론과 함께 비교적 손
김옥균(金玉均)은 1877년 의관 유홍기를 통해서 역관 오경석이 가져왔던 서적을 입수하여 탐독하였고, 박규수·유홍기·오경석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을 습득하였으며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과 함께 개화당(開化黨)을 이루어 그 지도자가 되었다.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박정양, 홍영식 등과 함께 일본 제국을 시찰했고,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굳혔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고문 겸 부사로서 일본에 다녀온 뒤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하였으며, 개화독립당을 조직하였다. 저서 치도약론을 집필하였는데, 도로 정비에 관련된 내용으로서 치도국 설치, 기술자 양성, 기계 구비, 오물 처리법 등을 포함한 17개 세목의 내용을 논하였다. 인민평등, 문호개방 등 개혁을 단행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 사대당의 중심 인물을 숙청하는 등 정변을 주도하여 당시 신정부의 호조 참판 겸 혜상공국 당상(惠商公局 當上)에 취임했다. 그러나 정변이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상재(李商在)는 1881년 박정양(朴定陽)이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으로 일본에 갈 때 수행원이 되어 도일(渡日), 동행하였던 홍영식(洪英植)·김옥균(金玉均)과 깊이 사귀었다. 1884년 우정국 총판(郵政局 總辦)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主事)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다가,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駐美公使)에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 박정양이 내무 독판(內務 督辦)이 되자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경연 참찬(經筵 參贊)이 되었고, 학무아문 참의(學務衙門 參議)로 학무국장(學務局長)을 겸임하면서 신교육령(新敎育令)을 반포하여 실시하였다. 1895년 학부참사관(學部參事官)·법부참사관(法部參事官)을 지내고, 1896년 국어학교 교장·내각총서(內閣總書) 및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을 거쳐 의정부(議政府) 총무국장이 되었다.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였다. 1905년 의정부참찬(參贊)에 임명되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을 준비하였다.
서재필(徐載弼)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에 가담하였고 전영(前營) 정령관(正領官)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1885년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1893년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1894년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1895년 12월에 귀국하였으며, 1896년 1월 중추원(中樞院) 고문에 임명되었다. 서재필은 1896년 4월 정부 예산을 얻어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고 모화관(慕華館)을 인수·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프랑스의 에투알개선문을 본뜬 독립문(獨立門)을 세웠다. 펜실베이니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다가 3·1 대한광복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대한제국 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국친우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을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규탄하였다.
1870년경 개화사상가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 들어가 과거 준비를 하던 유길준(兪吉濬)은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읽은 후 과거를 포기하고 실학과 중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에 관한 책을 탐독하게 되었으며 1877년 2월 박규수가 병사한 후 김윤식(金允植)과 함께 시인(詩人) 강위(姜瑋)의 지도를 받으면서 온건개화파가 되었다. 1882년 10월 13일 박영효를 수신사(修信使)로 하는 사절단(使節團)은 3개월간 일본의 각 기관을 시찰하고 지도자들과 만났을 뿐만 아니라 각국 사절과도 폭넓게 접촉하여 의견을 교환했다.유길준은 사절의 통역을 맡아 활약했다. 외아문 주사(外衙門 主事)를 지내고 한성부에 신문국(新聞局)을 설치하고 신문 발간을 도왔다. 보빙사(報聘使)의 수행원이 되어 미국의 각 기관을 시찰한 뒤 정사(正使) 민영익(閔泳翊)의 허락으로 유학생으로 남았고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으로 가 E. S.모스에게 8개월간 개인지도를 받고 바이필드의 더머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며 유럽 여행 후 1885년 12월 16일 인천에 도착했고 1895년 서유견문(西遊見聞)을 발간하였다. 일본에 있던 유길준은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고조 광무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정미늑약이 늑결되었다는 소식
이시영(李始榮)은 1887년 형조좌랑 등을 거쳐 1888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와 경연청 서연관(書筵官)을 지냈다.1892년 이후 홍문관교리·홍문관수찬, 승정원 부승지 등을 지냈다. 이후 승정원 우승지, 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의 부제조(副提調), 이후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 궁내부 수석참의 등을 지냈으며 1905년 외부 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이 되었고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반대하였다. 1907년 중추원 칙임의관(勅任議官), 1908년 법부(法部) 민사국장(民事局長), 한성부재판소 소장, 한성고등법원 판사 등을 지냈다. 1909년 대한제국 법부 법률기초위원이 되었다. 1910년 8월 남간도의 유하현 추가보(柳河縣鄒家堡)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다. 1911년 4월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露天群衆大會)를 열어 경학사(耕學社)라는 자치단체를 창설하고 이상룡을 사장에 추대하여 일면 민생(民生), 일면 교육(敎育)이라는 두가지 목표를 내걸고 이주 동포들의 정착과 농업생산을 지도하였다. 1912년 일제 밀정의 감시를 피해 신흥강습소를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
신채호(申采浩)는 1905년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11월 20일 장지연의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시일야방성대곡 집필을 도왔고 장지연이 투옥되자 황성신문을 이끌었다.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1906년 박은식의 도움으로 베델이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으며 기호흥학회, 가정잡지, 대한협회 월보 등에 기고하는 등 활발하게 언론 활동을 하였다. 1907년 안창호가 주도하여 비밀리에 결성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취지문을 작성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1910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신한촌(新韓村)이 형성되는데 참여하였으며 연해주에서 발간된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의 발행에도 참여했다. 1911년 12월 권업회라는 교민단체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1912년 광복회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1914년 서간도 환인현 홍도천에 머물며 동창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쳤는데 국사 교재로 조선사를 집필하였다.1915년 북경에 체류하고 중화보와 북경일보에 글을 기고하면서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