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진(金嘉鎭)은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1877년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에 발탁되었고 1883년 유길준과 함께 외교통상 업무를 관장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主事)로 임명되었다. 188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撰)이 되었다. 김가진은 개화정책을 주도하였는데 중국 양무운동을 시찰하였으며 주차일본공사관참찬관(駐箚日本公使館參贊官)에 임명되어 수년간 동경에 주재하였으며 이후 주일본판사대신(駐日本辦事大臣)으로 임명되었다.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1895년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이 되었으며 개혁정책의 실무를 담당했다. 1895년 4차 김홍집 내각에서 상무회의소 발족, 건양협회(建陽協會) 창립에 가담하였다.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가 창설되면서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독립문을 조성하는데 기여하였으며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가담하여 헌의 6조의 실행을 촉구하였다.1904년 외무대신, 법무대신, 중추원 부의장을 역임하였고 대한자강회, 대한협회에 가담하여 적극 활동하였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대한광복운동에 투신하였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대
남궁억(南宮檍)은 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의 수행원으로 상하이에 갔고 궁내부 별군직을 역임하고, 1894년 내부 토목국장을 맡았으며 흥화학교에서 영문법과 국사를 가르치고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는 창립총회를 가졌으며 남궁억은 독립협회의 수석 총무와 사법 위원을 겸하였다. 1898년 황성신문사 사장이 되었고 1902년 러·일의 한국분할설과 러일협정을 공박하였으며, 성주목사와 양양군수를 역임하고 양양에 현산학교를 설립하고 1907년 대한협회 회장이 되었으며 1908년 교육월보를 간행하였고 관동학회 회장이 된다.1910년부터 8년간 배화학당 교사로 9년간 재직하였다. 일제가 민족 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일장기, 벚꽃 보급에 항거해 모곡리의 감리교 전도사로 일하던 남궁억은 민족정신 고양을 위해 무궁화 묘목을 전국에 보급하였다. 1918년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내려와 모곡 감리교회를 세우고 전도사로 목회하면서 더불어 교회 내에 4년제 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의 대북정책은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햇볕정책으로 정의 할 수가 있다.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이러한 햇볕정책을 얼음정책으로 철저하게 전환 시킴으로 인해서 남북관계는 최악을 맞고 있다고 단정 할 수 밖에 없다. 북한은 지금 김정길 위원장의 건강 문제와 김정은 으로의 세습문제 등으로 북한 내부를 결속시킴으로써 통제기능 강화 등 여러가지 정치적 목적으로 남북관계를 대결 국면으로 전환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과거 정권의 대북정책인 햇볕정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남북대결 구도를 부채질 하는 정책으로 한반도를 전쟁위기로 몰고가서는 안된다. 이제라도 이명박 정권은 대북정책을 어둠과 얼음의 정책에서 新햇볕정책으로 전환하는 길만이 남북이 공생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최근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는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박근혜 대세론,은 지난 2007년 대선당시 이명박 대세론,과 유사한 형태로 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내년 총선과 대선을 관리해야 할 대표가 대세론을 내세워 특정인을 한나라당의 대권 후보로 규정하는 발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러한 발언에 대하여 한나라
한규설(韓圭卨)은 1898년 중추원 의장이 되었으며, 독립협회가 고조 광무제에게 의원 설치를 건의하자 이에 호응해 새로운 중추원관제를 공포하게 했다. 11월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이 체포되고 독립협회의 혁파가 논의되자 이들을 석방하고 민의를 존중하자고 주장했다. 법부대신에 임명되었으나, 1899년 정부의 반격으로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될 때 해임되었다. 1901년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었고, 1902년 다시 법부대신이 되었다. 1904년 12월 미국에게 대한제국의 독립 유지를 위한 노력을 당부하는 고조 광무제의 밀서를 이승만(李承晩)·윤병구(尹炳求)에게 전달했다. 1905년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었으며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늑결하려 하자 일제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반대하다가 경운궁 수옥헌(漱玉軒)에 감금되고 면직당했다. 을사늑약 이후 중추원 고문 궁내부 특진관을 지냈으며, 1907년 4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소장이 되었다.
박정양(朴定陽)은 1881년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이용사(理用司)의 당상경리사(堂上經理司)가 되었다. 관제 개혁 등에 앞장섰으며, 1882년 대사성·이조 참판·좌승지를 거쳐 1883년에 기기국 총판(機器局 總辦)·내무 협판·협판군국사무·대사헌·협판교섭통상사무 (協辦交涉通商事務)·도승지·협판내무부사를 역임했다. 1887년 미국 특파 전권공사(全權公使)로 부임하여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등 외교활동을 하였다.1894년 호조 판서·교정청 당상(校正廳 堂上)·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갑오개혁으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신설되자 회의원(會議員)이 되었다. 김홍집의 1차 내각에 학부대신이 되고 1895년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과도 내각을 조직했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총리대신 서리와 궁내부대신 서리를 겸임했다. 9월 내각을 의정부로 개혁하자 참정대신(參政大臣)이 되고 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석하였다.11월 독립협회에 대한 황국협회(皇國協會)의 폭력탄압사건이 발생하여 개각이 되자 내부대신이 되었다. 온건중립파로 이상재(李商在) 등 개화파(開化派) 인사들을 돌보았다.
조병세(趙秉世)는 1877년 대사헌,대사헌을 거쳐 1887년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88년 예조·이조의 판서가 되고, 1889년 한성부 판윤·우의정을 거쳐 1893년 좌의정이 되었다. 1894년 중추원 좌의장(中樞院 左議長)이 되었다. 1896년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위하여 시무(時務) 19조를 상소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 늑결되자 국권 회복과 을사5적의 처형을 주청하기 위하여 고조 광무제를 만나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고 민영환(閔泳煥)과 함께 백관을 인솔하고 입궐하여 을사늑약의 무효와 을사5적의 처형을 연소(聯疏)하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당하였다. 표훈원(表勳院)에 연금되었고 곧 풀려났으나 경운궁 대안문(大安門) 앞에서 석고대좌하며 을사늑약의 파기를 주장하다가 다시 일본 헌병에 강제 연행되었으며 그후 가평으로 추방되었으나 다시 상경하여 표훈원에서 유소(遺疏)와 각국 공사 및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이용익(李容翊)은 1887년 광무국(鑛務局)이 설치된 이후 함경남도광무감리로 임명되어 그 지역 광산을 관리했다. 1890년 서북광무감리, 1896년 서북제부금광사무감독(西北諸府金鑛事務監督)을 거쳐 1897년 각부각군금은동철매탄각광사무(各府各郡金銀銅鐵媒炭各鑛事務)에 임명되어 전국 광산을 감독하였고 1898년 궁내부 소속 광산감독사무가 되어 황실 소속의 광산을 관장했다. 1897년 전환국장이 되어 백동화(白銅貨)를 대량 발주하여 국가 재정에 충당했으며 1903년 중앙은행조례·태환금권조례(兌換金卷條例) 등을 반포했다. 1904년 내장원경(內藏院卿)을 겸임하며 대한제국 황실 재정 강화에 노력했다. 각 도에 광산감리를 임명하여 광산을 관리하게 하고 역토(驛土)·둔토(屯土) 등 국유지를 내장원에 귀속시키고 봉세관(捧稅官)이 도조(賭租)를 징수했다. 홍삼을 제조하는 삼정과(蔘政課)를 증설하여 홍삼의 제조 및 판매를 관장하며 전매했으며 1898년 철도사(鐵道司)를 설립하여 감독을 맡았고 궁내부에 서북철도국이 설치되자 서북철도 감독을 맡아 경의선·경원선 부설을 추진했다. 1901년 지계아문총재관(地契衙門總裁官)이 되어 토지소유자에게 지계를 발행하여 토지의 소유권을 법인(法認
윤치호(尹致昊)는 1881년 신사유람단 조사(朝士) 어윤중을 수행하여 일본에 건너가 1883년 4월까지 체류했다.1883년 5월 초대 주한미국공사 L. H. 푸트의 통역으로 귀국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임명되었다. 그뒤 통역으로서 푸트와 고종, 개화파 간의 교량 역할을 하면서 청나라의 간섭 배제와 미국과의 유대 강화, 각종 정치기구 개편에 힘썼다. 1895년 김홍집 내각의 외부 협판과 박영효 내각의 학부 협판을 지냈으며 1896년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1897년 독립협회 운동을 이끌면서 토론회 개최 등 국민계몽 활동에 힘을 쏟았다. 1898년 3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주관하여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 등 반러시아 운동을 전개하였다. 1898년 8월 2대 회장이 되었으며 10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주최,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국정에 반영시켰다.1906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어 교육의 확대와 산업 개발로 자강독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표방하고 국민사상 계몽에 노력했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평양의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임병찬(林炳瓚)은 1912년 9월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의 밀명을 받아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으로서 일본 정부와 총독에게 일제의 대한제국 불법 침략을 지적하고 국권 반환을 촉구하는 요구서를 보내고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비밀리에 대한광복운동단체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하였다. 임병찬은 임응철(林應喆) ·이인순(李寅淳)·곽한일(郭漢一)·전용규(田瑢圭)와 협의하고 1912년 12월 독립의군부 조직을 전라남북도로 확대하였으며 1913년 2월 임병찬은 전라남북도 순무총장(巡撫總將) 겸 사령장관에 임명되었다. 1914년 본부를 서울로 옮기고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하였으며 대한독립의군부로 개칭하였다. 총사령(總司令)에 추대된 임병찬은 조직을 개편하여 중앙원수부(中央元帥府) 아래에 병마도총장(兵馬都總長)과 참모총약장(參謀總約長)을 두고, 한성·강화·수원·개성·광주에 5영(五營)을 설치하였으며 각 도·군 단위의 조직을 완성하고 대표를 선정하여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고 1914년 5월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신규식(申圭植)은 1902년 보병 부위(副尉)까지 진급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지방 진위대(鎭衛隊)와 연결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했고 1907년 군대해산 후 윤치소(尹致昭)·신창휴(申昌休) 등과 함께 광업회사를 발기하고 실업계를 계몽하기 위해 월간지 공업계(工業界)를 창간했으며 1901년부터 문동학교(文東學校),중동학교(中東學校),청동학교(淸東學校)에 관여하여 교육활동을 하는 한편,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등에 참가했다.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쑨원이 이끄는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가맹, 10월 우창 의거에 참가했다. 1912년 5월 망명자들과 상하이 교민이 늘어가자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다. 동제사(同濟社)에는 박은식·김규식·홍명희·신채호·조소앙·문일평·여운형·장건상 등이 참여했는데 회원이 300여 명에 이르렀고 중국 상하이 본부 외에 베이징·톈진과 간도·연해주·구미·일본 각지에도 지사를 설치했다.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함께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발기하고, 환구중국학생회에 가입했다. 한인학생의 중국 및 구미의 각급학교 진학을 위한 예비교육기관으로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고, 군사교육을 위해서 약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