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삼(金東三)은 1907년 안동에서 류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과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세웠으며 1909년 박중화(朴重華)와 함께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조직하여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한성의 양기탁(梁起鐸) 등 신민회(新民會) 간부들과 회합하여 독립운동기지 설치와 독립군 양성을 협의했다. 1911년 남간도 류허 현에서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윤기섭(尹琦燮)과 함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조직하여 한인들의 민생과 교육, 군관 양성에 노력했다. 1913년 여준(呂準)·이상룡과 함께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했으며, 류허 현의 밀림에 백서농장(白西農場)을 개설하였다. 1918년 길림성 왕칭현에서 서일(徐一)·여준·김좌진(金佐鎭) 등 39명이 민족대표로 서명한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후 한족회(韓族會)를 결성하고 서무부장에 취임했으며, 남간도 독립운동의 총본영으로 군정부를 조직했으며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참모장으로 독판(督辦) 이상룡을 보좌했다. 1922년 요령성 싱징현에서 통군부(統軍府) 조직을 주도하고 교육부장을 지내다가, 통의부(統義府)로 조직이 개편되자 위원장에 뽑혔다
1894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한 이승만(李承晩)은 1895년 미우라 일본 공사가 명성황후를 살해하자 이를 보복하기 위한 사건에 관계되어 지명수배를 당했으나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 후 서재필(徐載弼)이 주도한 독립협회(獨立協會) 간부로 활동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했으며, 협성회보(協成會報)의 주필로 활동하고 1904년 고조 광무제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가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저지를 호소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승만은 1910년 일제의 불법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에 의해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이 되자 귀국하여 대한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후진 양성에 힘썼다.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같은 해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4년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건너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하여 대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미국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독립외교론을 주장했다. 이승만(李承晩)은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선임되었
이회영(李會榮)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늑결되자 1906년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안태국(安泰國)·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을 책임자로 삼아 동지 획득과 한인 교육에 주력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늑약 늑결의 강압성을 폭로하려는 계획을 세워 고조 광무제에게 건의하고,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을 간도로 파견했다. 동지들을 평양 대성학교, 안동 협동학교, 정주 오산학교에 파견하고,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했다. 1909년 양기탁(梁起鐸) ·김구(金九)·이동녕·주진수(朱鎭洙)·안태국·이승훈(李昇薰)·김도희(金道熙)와 신민회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간도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하고, 류허현 삼원보 추가가(鄒家街)로 건너가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과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했다.1911년 최초의 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1912년 퉁
김구(金九)는 1896년 미우라 일본 공사에게 살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여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조 광무제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1910년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였고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한인애국단을 조직,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남경에서 장제스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일본 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1940년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조직인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그 사령관에 이청천(李靑天)을 임명하였다.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고,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했으며 1944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다시 선임되었다. 1945년 8·15 대한 광복으로 귀국하였는
[더타임스 김형기 기자] 2012년은 총선과 더불어 대선을 앞두고 여야를 막론하고 예비 대선 주자들의 움직임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여당인 한나라당에서는 박근혜, 김문수, 그리고 오세훈 현 서울시장도 언제 대권 레이스에 합류할지 모르는 사항이다. 한나라당 내에서의 판세를 보면 박근혜 전 대표가 현재로선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대권 후보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설사 한나라당의 대선후보가 된다고 하더라도 더욱더 대통령에 당선 된다는 확신도 보장도 없다. 그만치 내년 대선은 총선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정치 지형의 변화에 따라 여러가지 변수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권은 그렇다 치더라도 야권을 보면 더욱더 복잡하다. 우선 손학규 대표가 현재로선 가장 유력한 대권 후보지만 김정길, 문재인, 정동영, 정세균 등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본격적으로 대권 레이스에 합류하게 되면 당내 경선도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또한 당내 경선을 통하여 후보가 된다고 하더라도 야권 통합 및 단일화 문제 등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로 대권 레이스는 지리하게 줄달리기를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욱더 큰 변수는 이미 지난 6월12일 광주에서
강우규(姜宇奎)는 일제가 경술늑약으로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자 1911년 북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들과 연계하여 대한제국의 독립을 의논했고 4년 후 랴오허 현으로 이사하여 독립운동을 모의하였다. 1917년 길림성 동화현에 광동중학교를 세워 한인 교육에 전력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노인단 길림성 지부장이 되어 일제 총독을 암살하기로 결심하였으며 러시아인으로부터 수류탄을 구입하고, 1919년 9월 2일 하세가와의 후임으로 사이토 마코토가 임명되어 부임한다는 것을 알고 허형과 함께 한성으로 잠입했다. 강우규는 사이토 총독의 내한 당일 남대문역에서 하세가와의 후임으로 새로 임명된 사이토 총독을 폭살하기 위해 러시아인으로부터 구입한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터졌지만, 사이토 총독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대신 사이토 신임 총독을 호위하던 일본인 경찰을 비롯한 사상자가 37명이 나왔다.
이범윤(李範允)은 간도(間島)의 대한국인 보호를 위해 1902년 6월 간도시찰원으로 파견되었으며, 1903년 10월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가 되었다. 토문강(土門江)에 거주하는 대한제국 한인들을 순찰·위로하고 호구를 조사하여 1만 3,000여 명을 편적(編籍)시켰다. 간도의 대한국인을 보호하기 위해 장정을 모집하여 사포대(私砲隊)를 조직해 군사훈련을 시키고 모아산(帽兒山)·마안산(馬鞍山)과 두도구(頭道溝) 등에 병영을 설치했다. 10호를 1통(統), 10통을 1촌(村)으로 하는 행정체계를 수립하고 도민에게 세금을 징수하여 군대유지비를 충당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 군대에 가담하여 사포대를 이끌고 나가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었고 러시아 황제에게 훈장을 받았다. 노키에프스크로 가서 최재형(崔在亨)이 세운 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최재형·이위종(李瑋鍾)·엄인섭(嚴仁燮) 등이 조직한 동의회(同義會)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모금활동을 추진했으며 이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의병부대를 정비하기 위해 최재형·이위종에게서 자금을 지원받아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의회(彰義會)를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최재형의 적극적인
서일(徐一)은 1911년 간도로 가서 명동학교(明東學校)와 청일학교(靑一學校)를 설립했으며 독립군단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었고 1918년 간도와 러시아령에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독립전쟁으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취지의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를 발표했다. 1919년 3월 중광단을 정의단(正義團)으로 개편하여 김좌진을 맞아 전투태세로 개편하고 단원을 모집하는 한편 무기도 구입하여 독립군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8월 정의단은 무장독립군을 보유한 항일단체이자 북간도 전지역을 행정구역으로 삼는 행정부를 겸비한 군정부(軍政府)로 개편·발전되었다. 12월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군정부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하면서 총재에 취임했다. 서원(署員)은 1,600명 정도로 러시아에서 구입한 무기로 무장했고, 속성(速成)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훈련을 시키는 한편 경찰 사무와 정보 연락을 했으며, 지방산업을 진흥시키며 소학교와 야간강습소를 설립하였다. 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으나 일본군의 대토벌작전으로 인해 주력부대를 북간도 미산현 당벽진(當壁鎭)으로 이동시켰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서로군정서군의 이
1920년 3월 이범석(李範奭)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의 부름을 받고 북로군정서 연성대장(硏成大長)으로 부임하였다. 1923년 10월 5일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청산리(靑山里)에 도착하였다.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이 청산리 주위를 포위하여 오자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은 임시 전투조직을 개편하고 총사령관 김좌진, 군정서 참모장 나중소(羅仲昭), 사령관 부관 박영희(朴英熙) 등으로 개편 편성되었으며 이범석은 북로군정서 연성대장(硏成隊長) 겸 중대장이 되어 보병부대 1개 대대를 백운평(白雲平) 숲속에 매복시켰다. 소총, 중기관총, 수류탄 80만발의 탄환을 집결한 뒤 10월 20일 새벽 그는 우진 이민화(李敏華), 좌진 한근량(韓根凉) 중우 진의 김동(金動), 중좌진의 이교성(李驕成)에게 각각 2백발의 탄환을 직접 분배하였다. 10월 20일 9시경부터 청산리 백운평에서 일군과 교전이 시작되어 날이 저물도록 격전을 전개하고 일본군의 선봉부대를 기습공격하여 섬멸시켰다. 일본군 주력부대 5만이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집중 사격을 가했다. 1차 선발대와 2차 선발대가 전멸하고 3차 선발대가 나타났다가 우왕좌왕 흩어질 때 이범석은 마상에서 독전 연
김좌진(金佐鎭)은 1905년(광무 9) 한성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7년(융희 1) 홍성에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한성으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오성학교(五星學校) 교감을 역임하였으며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1916년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간도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그 해 12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청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김좌진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으며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간도에서는 가장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