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형 칼럼리스트 ] 처칠이 언젠가 건배를 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건강이나 부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행운만을 빕니다". "왜냐하면 타이타닉호에 탔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강했고 부유했지만, 그들 중 운이 좋았던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고위 임원은 9/11 테러에서 살아 남았습니다. 그날 아들의 유치원 첫 등교일이라 데려다주느라 회사에 늦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 남성은 도넛을 사러 가는 차례였던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어느 여성은 알람이 울리지 않아 늦잠을 자는 바람에 살아 남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뉴저지 교통 체증에 걸려 회사에 늦었고, 어떤 사람은 버스를 놓쳤고, 다른 이는 커피를 쏟아 옷을 갈아 입느라 늦었습니다. 자동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아 못 간 사람도 있었고, 집에 전화를 받으러 되돌아갔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부모는 아이가 유난히 느리게 준비해서 지각했고, 어떤 남성은 택시를 잡지 못해 결국 회사에 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날 새 신발을 신고 출근하던 한 남성이 있었습니다. 신발이 불편해 발이 부었고, 그는 약국에 들러 밴드를 사기 위해 멈췄
[ 김덕엽 칼럼니스트 ] 올해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은 지금, 한·일관계의 과거사 문제는 여전히 완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을 지키고 행동으로 옮기는 주체는 이제 더 이상 정부 만이 아니다. 바로 시민·사회다. 우베시 장생탄광 유해 발굴 운동은 그 대표적 사례로, 일본과 한국의 시민들이 함께 역사를 직시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장생탄광 제5차 방문단에서 한국과 일본 잠수사들이 함께 유해 조사를 수행하고, 추모곡을 부르며 손을 맞잡은 순간은 ‘국경을 넘어서는 기억의 외교’가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줬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는 사건이 아니라, 앞으로 한일관계가 어떻게 ‘기억과 책임’을 공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천적 모델이었다. 포스트기억 시대라는 말은 더이상 과거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기억을 이어가야 하는 과제를 뜻한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과 시민단체들은 강제동원과 위안부 문제를 일본 사회 안에서 꾸준히 제기해 왔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무토 이쿠호 활동가 등은 역사 왜곡에 맞서 꾸준히 목소리를 냈고, 한국과 일본 청년들이 참여하는 한·일 청소년 평화포럼은 ‘공동 기억의 장’을 만들어왔다. 또한 위안부 피해자들
[ 김덕엽 칼럼니스트 ]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은 올해 정치와 외교가 흔들릴 때마다 우리는 묻는다. 한·일관계의 지속성을 지탱해온 힘은 무엇인가. 그 답은 정부가 아니라 시민의 기억이었다. 1990년대 초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었다. 국가 외교가 외면한 진실을 국제사회에 올려놓은 역사적 선언이었다. 그 순간부터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는 한·일 외교의 또 다른 주체가 되었다. 위안부 피해자 증언 운동을 시작으로 강제동원 진상조사와 소송 지원, 국제사회(UN, ILO, ICC 등) 대상 인권 외교 활동 이 모든 것은 외교의 공백을 메운 기억의 연대이자, 시민의 외교였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 사과는 번복되었고, 외교 합의는 국민 신뢰를 잃었다. 그러나 시민은 멈추지 않았다. 일본 시민사회와 연대해 지속적인 기억 운동을 벌였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한일 청소년 교류, 양국 공동보고서 작성 등 구체적 실천을 통해 “기억의 외교”를 제도화해왔다. 2023년부터 이어진 장생탄광 유해 조사 및 추모 활동은 새로운 운동이 아니다. 1990년대 이후 위안부·강제동원 운동의 연장선이다. 유족들과 일본 시민단체가 함께 기
[ 김덕엽 칼럼니스트 ] “당신은 누구를 대신하여 말하고 있는가?” 해당 질문은 기자, 외교관, 정치인 모두에게 던져야 할 근본적 물음이다. 한·일관계처럼 기억과 책임, 감정과 실리가 교차하는 외교의 현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올해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우리는 이 시간을 자축할 만큼 안정된 관계를 누리고 있는가, 대통령 파면, 내각 교체, 외교 침묵. 국내외 정치 격랑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기억'이었다. 기억은 잊히지 않았다. 외교가 주저할 때, 시민이 움직였고, 정치가 분열될 때도 국회는 대화의 통로를 남겼다. 그리고 현장의 기록과 상징은 한탄으로 끝나지 않고, 미래를 설계하는 자산이 되었다. 그동안 외교는 종종 '기술'의 문제로 다뤄졌다. 말의 정교함과 타이밍의 절묘함, 문구의 전략성. 그러나 그것으로 외교가 성립한 적은 없다. 특히 한·일관계는 외교 기술로는 봉합될 수 없었다. 사죄는 반복됐지만, 구조는 바뀌지 않았고, 국민 감정은 해소되지 않았다. 진정한 외교란 신뢰다. 신뢰는 문장으로 쌓이지 않는다. 그것은 태도에서 시작된다. '기억을 회피하지 않는 태도',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태도'로서 말이다. 지난 3
[ 김덕엽 칼럼니스트 ] 한국과 일본은 올해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았지만, 이른 축하의 말은 조심스러웠다. 대통령 탄핵으로 인한 한국 외교의 공백, 그리고 일본 내각의 잇단 교체와 보수화 흐름은 양국 외교에 깊은 불확실성을 더했다. 이러한 시기, 정부가 멈춘 자리에서 누가 외교의 연속성을 지탱했는가. 그 답 중 하나는 ‘국회’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일의원연맹이 있었다. 1975년 창설된 한일의원연맹은 반세기 동안 양국 국회의원 간 신뢰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당파를 초월한 초국가적 연대, 정례적인 교류, 그리고 위기 시기마다 반복된 물밑 대화는 이 연맹이 보여준 독자적인 외교의 자산이다. 이 연맹은 실무 차원의 외교가 멈췄을 때, 정치적 감각과 인간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제2의 외교 채널’로 기능했다. 예를 들어, 2024년 한일 교과서 갈등이 고조되었을 당시에도, 양국 의원 간 비공식 서신 교환과 대화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외교의 흐름을 유지하게 했다. 강경한 대립보다는 대화의 여지를 남기는 정무적 균형이 필요한 상황에서, 의회 외교는 감정을 다독이고 해석의 균형을 조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제 의회 외교에서의 한계도 분명하다.
[ 김덕엽 칼럼니스트 ] 지난 6월 20일 한·일 시민들이 다시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장생탄광 앞에 섰다. 장생탄광 제5차 방문단. 이번에도 정부는 없었다. 정치도 외교도 결여된 그 자리에서, 시민은 외교의 주체가 되었다. 기억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기억 위에 연대는 뜨겁게 쌓였다. 1942년 장생탄광 붕괴 사고로 183명의 노동자가 바다에 수장되었다. 그 중 136명이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였다. 80여 년이 지나도록 유해는 회수되지 않았고, 한국과 일본 정부는 침묵했다. 그러나 침묵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시민들이다. 조덕호 대구대 명예교수와 최봉태 변호사가 이끄는 귀향추진단은 일본 시민단체, 다이버들과 함께 유해 발굴 작업에 참여했다. 실패로 끝난 발굴에도 시민들의 마음은 꺾이지 않았다. “유해가 수습되고 고향에 안치될 때까지 한국과 일본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조 교수의 말은 단순한 바람이 아닌, 시민외교의 선언이었다. 장생탄광의 시민외교는 단순한 자원봉사가 아니다. 이곳은 ‘기억’을 매개로, ‘존엄’을 향해 나아가는 윤리적 외교의 장이다. 정부의 공백을 시민이 메우고, 정치의 무능을 연대가 덮는다. 시민들이 직접 유족을 만나고, 현장
[ 김덕엽 칼럼니스트 ] 2025년 한·일 국교정상화 60년의 시간 위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외교는 누구의 몫인가? 정치가 불안정하고, 외교는 반복되고, 감정은 봉합되지 않는 이 장기 구조 속에서 지속성과 신뢰의 외교를 가능하게 한 주체는 누구였는가. 그 답은 단순하지 않다. 바로 정치권의 제도 외교와 시민사회의 윤리 외교가 병행된 이중 채널 외교였다. 2020년대 중반 한일관계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정부 외교는 공백을 드러냈다. 그때 움직인 것은 국회였다. 한일의원연맹, 한일협력네트워크, 의회 포럼 등 의원단 차원의 교류는 외교의 연속성과 회복력을 일정 부분 견인해왔다. 국회는 정부 간 외교가 막힐 때 비공식 대화의 통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의원외교는 구조적으로 제약을 안고 있다. 정부의 외교기조에 종속되기 쉽고, 정권 교체 시 지속성이 불안정하다. 무엇보다 국민의 감정과 거리두기 된 채 ‘대화만의 외교’로 오해받는 위험이 있다. 이에 비해 시민사회는 기억을 근거로 하는 외교의 다른 주체가 되어왔다. 지난 4월, 제4차 장생탄광 방문단은 일본 우베시를 직접 찾아 한일 잠수부가 공동으로 유해를 조사하는 상징적 현장을 만
[ 김덕엽 칼럼니스트 ] 2025년은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기점으로, 양국은 수교를 통해 실리를 중심으로 한 외교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양국 관계는 여전히 "갈등과 봉합"의 되풀이 속에 머물러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외교는 반복되었지만, 국민의 감정은 치유되지 않았고, 기억은 합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정치권은 늘 ‘현실적 해결’을 말한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015년 위안부 합의, 2023년 강제징용 피해자 제3자 변제안. 그 어떤 합의도 국민적 신뢰를 획득하지 못했다. 왜일까. 그것은 정치가 외교를 ‘합의의 기술’로만 접근했기 때문이다. 국민 감정이라는 구조적 층위를 생략한 채, 타협만을 반복한 결과이다. 윤석열 정권이 파면된 지금, 한일관계는 또 한 번 불확실성의 문턱에 서 있다. 문제는 단지 외교 기조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외교를 누가 주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60년간 정치와 관료 중심으로만 설계된 외교의 구조 속에서, 시민은 언제나 배제되어 왔지만, 역설적이게도, 시민만이 관계의 연속성을 만들어왔다. 기억을 지키고, 문제를 고발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