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영(李始榮)은 1887년 형조좌랑 등을 거쳐 1888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와 경연청 서연관(書筵官)을 지냈다.1892년 이후 홍문관교리·홍문관수찬, 승정원 부승지 등을 지냈다. 이후 승정원 우승지, 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의 부제조(副提調), 이후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 궁내부 수석참의 등을 지냈으며 1905년 외부 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이 되었고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반대하였다. 1907년 중추원 칙임의관(勅任議官), 1908년 법부(法部) 민사국장(民事局長), 한성부재판소 소장, 한성고등법원 판사 등을 지냈다. 1909년 대한제국 법부 법률기초위원이 되었다. 1910년 8월 남간도의 유하현 추가보(柳河縣鄒家堡)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다. 1911년 4월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露天群衆大會)를 열어 경학사(耕學社)라는 자치단체를 창설하고 이상룡을 사장에 추대하여 일면 민생(民生), 일면 교육(敎育)이라는 두가지 목표를 내걸고 이주 동포들의 정착과 농업생산을 지도하였다. 1912년 일제 밀정의 감시를 피해 신흥강습소를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
신채호(申采浩)는 1905년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11월 20일 장지연의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시일야방성대곡 집필을 도왔고 장지연이 투옥되자 황성신문을 이끌었다.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1906년 박은식의 도움으로 베델이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으며 기호흥학회, 가정잡지, 대한협회 월보 등에 기고하는 등 활발하게 언론 활동을 하였다. 1907년 안창호가 주도하여 비밀리에 결성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취지문을 작성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1910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신한촌(新韓村)이 형성되는데 참여하였으며 연해주에서 발간된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의 발행에도 참여했다. 1911년 12월 권업회라는 교민단체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1912년 광복회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1914년 서간도 환인현 홍도천에 머물며 동창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쳤는데 국사 교재로 조선사를 집필하였다.1915년 북경에 체류하고 중화보와 북경일보에 글을 기고하면서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박은식(朴殷植)은 1898년 9월 장지연·남궁억·나수연(羅壽淵)·류근(柳瑾)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 보급하였으며 공동주필에 취임하였다.1904년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자 주필이 되어 사설을 썼으며 1906년 신석하, 김달하, 김병도와 함께 서우학회(西友學會)를 결성하여 기관지 서우의 주필로 취임하였고 1908년 서북학회를 창설하고 서북학회월보를 창간하였다. 1907년 비밀결사회인 신민회가 결성되자 그는 그 곳에 가입하여 교육ㆍ출판 부문에서 민족계몽운동에 힘썼다.1911년 4월 중국 환인현 흥도천에 머무르면서 동명성왕실기 ㆍ 몽배금태도 ㆍ 명림답부전 ㆍ 천개소문전 ㆍ 대동고대사론 등을 집필하였고 1915년 한국통사를 간행하였으며 1919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집필하여 책으로 냈다. 1919년 10월 15일 국민교육의 연구 장려 및 유학생 파견, 지도 등의 목적으로 하는 대한교육회(大韓敎育會)를 상해에 조직하였으며 회장 겸 편집부원으로 활약하였다.임시정부가 1925년 3월 대통령 서리 겸 국무총리 박은식을 2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였으나 7월 국무위원제로 바꾼 후 국무령에 이상룡을 추천하여 당선시켰다.
양기탁(梁起鐸)은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구국 계몽 운동에 뛰어들었고 개혁당에 참가했다.1904년 궁내부에서 영어 통역을 맡게 되면서 베델과 함께 영자 신문 코리아 타임즈를 발간했다. 1905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는데 참여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에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안회에 가담하였다. 1907년 안창호의 신민회에 참가하였고 간도에서 편강렬과 함께 무장 독립 운동 단체인 의성단을 결성하였고, 흩어진 운동 단체를 통합한 통의부와 정의부, 고려혁명당, 국민부 결성에 가담했으며 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1933년 10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고 1935년 10월까지 재임하였다.
이상룡(李相龍)은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가야산에서 거의하고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이강년(李康年)을 지원했으며 류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했으며,1909년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를 결성하여 회장을 지내면서 시국강연을 개최했다. 1909년 신민회 간부 비밀회의에서의 결정에 따라 독립운동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1911년 2월 서간도로 망명했다. 1911년 최초의 간도지역 항일자치단체로 개간과 영농에 종사하는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여 경학사장에 추대되고, 그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했으며 산업·교육 우선주의와 군사중심주의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2년 경학사를 발전시켜 퉁화 현 합니하(哈泥河)에 교포들의 자치기관인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고 허혁(許赫)에 이어 단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신흥강습소도 이전하여 제2의 기지를 정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을 계기로 서간도(西間島)의 독립운동도 무장운동의 길로 들어서게 되어 류허현 삼원보(三源堡)에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했고 임시군정부(臨時軍政府)를 조직한 후 대
윤봉길(尹奉吉)은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편지를 남긴 채 가족도 모르게 집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고 간도에 도착하여 대한독립군의 김태식(金泰植)·한일진(韓一眞) 등과 함께 간도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했으며 농무회(農務會)를 조직하고 계몽강연을 했다. 1931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해 프랑스 조계 내에 있는 안중근(安重根)의 동생 안공근(安恭根)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교포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말총모자 공장 미리공사(美利公司)에서 일을 하며 노동자 친목회와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활발히 활동하면서 영어학교에도 다녔다. 김구는 일제가 상하이에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에 전승축하기념식을 개최할 계획을 탐지하고 폭탄 투척 거사를 준비했으며 윤봉길은 4월 26일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된다는 내용의 입단선서를 했다.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식장에 던져 일본군 수뇌부를 폭살(爆殺)했다. 거사 직후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12월 19일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훙커우 공원 거
[더타임스 장지연 칼럼니스트]정치권의 관심사로 떠오르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내년 총선출마에 대한 문제가 지역구 출마로 결론이 나자 갑론을박이 한창이다.한때 수도권 또는 비례대표로 출마 할 것이라는 예측과 함께 대선을 위해 총선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마저 나온 상황에서 박 전 대표의 대구 달성지역 출마결심은 의외의 결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박 전 대표의 이러한 결정은 내년 총선에서 박 전 대표의 지원을 내심 바라고 있던 많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는 충격적인 결과다. 박 전 대표의 이 같은 결정은 친박계 의원들 사이에서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라고 이야기들 하고 있다.필자는 이러한 한나라당 의원들의 바람을 떠나 냉정히 분석해 볼 때 박 전 대표 자신의 대선 승리를 위해서 지역구는 물론 일부에서 제기하는 비례대표마저 포기하는 결단을 보여 줘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현재 여야 대권 주자 중 지지율이 월등히 앞서가고 있는 박 전 대표에게 내년의 대선은 가장 좋은 기회이자 대통령에 당선될 확률이 그 어느 때 보다 높은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한나라당 내부의 예상치 못한 변화와 야권의 단일화 등을 고려해 보았을 때 최후의 진검승부를 한다는 사즉필생(死卽必生)의
이봉창(李奉昌)은 1931년 1월 대한광복운동에 투신하고자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갔으며 이봉창 의사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김구 단장을 만나 일본 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일왕 폭살(爆殺) 계획을 세우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면서 한달에 한번씩 김구 단장을 만나 거사를 준비했다. 1931년 12월 13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1931년 12월 17일 김구 단장의 전송을 받으며 동경으로 출발했다.동경에 도착한 이봉창 의사는 히로히토 일왕이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키 연병장에서 열리는 신년 관병식(觀兵式) 참석 정보를 입수하고, 이 날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김구 단장에게 전보를 보냈다. 1932년 1월 8일 앵전문(櫻田門) 앞에서 일왕(日王)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으나 일왕 폭살(爆殺)에는 실패하였고 품안의 태극기를 꺼내 대한 독립 만세를 3번 외친 뒤 현장에서 체포된 이봉창 의사(義士)는 9월 동경 대심원(大審院)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순국(殉國)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왕(日王)을 대상으로 하였고, 거사(擧事) 장소가 일제 수도 동경이었다는 점에서 비록 일왕
장지연(張志淵)은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을미독립운동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지에 발송했다. 1897년 1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조 광무제의 경운궁 이어를 요청하는 만인소의 제소를 맡았고 2월 경운궁으로 이어한 고조 광무제에게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문의 초안을 짓고 독소(讀疏)를 맡았다. 1897년 7월 사례소 직원에 임명되었고, 9월 내부 주사를 겸직했다.1898년 4월 대한황성신문을 발행하는데 참여했고, 9월 남궁억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에서 이상재와 함께 활동했다. 독립협회에서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여해 총무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899년 1월부터 8월까지 격일간 신문인 시사총보의 주필을 지냈다. 9월 황성신문 주필로 초빙되어 취임했다. 1900년 10월 시사총보를 출판사인 광문사로 개편, 설립할 때 참여해 편집원을 맡아 정약용의 목민심서,흠흠신서등을 간행했다. 1901년 황성신문의 주필로 초빙되었고, 1902년 8월 사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3월 중추원에 연명으로 시정 개선을 촉구하는 정치 경장에 관한 주요 사항 55개 조항을 헌의했다. 1905년 4월 정6품 승훈랑의 품계를 받았고, 7
지석영(池錫永)은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 의학서의 번역본을 많이 읽었고, 제너의 우두접종법(牛痘接種法)에 관심을 가졌다.1876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박영선(朴永善)에게 종두귀감(種痘龜鑑)을 얻어 보았고, 1879년 10월 부산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일본인 의사에게 2달 간 종두법(種痘法)을 배웠다. 1879년 겨울 충청북도 충주시 덕산면에서 최초로 40여 명에게 종두를 시술하였고 한성에는 종두장을 설치하였다. 1880년 2차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에서 두묘(痘苗)의 제조법을 배우고 두묘 50병을 얻어서 돌아와 종두법(種痘法) 보급에 힘썼다.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형조 참의(刑曹 參議)를 역임하였고 1885년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하였다.1890년대 후반 독립협회에서 활동하기도 하였고 1894년 김홍집에 의해 토포사(討捕使)로 동학농민군 토벌에 참여하였다. 1896년 동래 관찰사가 되어서도 종두법(種痘法)의 보급에 공헌하였으며, 1899년 경성의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1905년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고조 광무제에게 상소하여 공포하게 하고,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게 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