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조(穆祖)는 처음에 전주에 살았는데, 산성 별감(山城 別監)과 갈등을 빚고 삼척으로 이주하여 왜구와 원의 침략을 막았다. 산성 별감이 안찰사로 임명되어 오자 다시 의주(宜州 : 원산)로 이주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의주 병마사로 삼아 원의 침략을 막게 했는데, 1254년 원의 산길(散吉)이 항복을 몇 번씩 청해 오자 항복하였고,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의 알동(斡洞)으로 이주하였으며, 1255년 알동천호소의 우두머리 천호(千戶) 겸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임명되었다. 1274년 죽으니 아들 이행리가 관직을 이어받았다. 1392년 7월 28일 조선 태조에 의해 목왕(穆王)에 추봉되었다가 1411년 4월 22일 태종에 의해 목조(穆祖) 인문성목대왕(仁文聖穆大王)에 재추봉되었다. 익조(翼祖)는 1275년 아버지인 이안사(李安社)의 천호(千戶) 관직을 계승했다. 1290년 의주(宜州)로 이주하여 쌍성총관부 등지의 다루가치가 되었다. 조선 개국 이후 증손자인 태조에 의해 익왕(翼王)으로 추봉되었다가 고손자인 태종 때 익조(翼祖) 강혜성익대왕(康惠聖度大王)으로 재추봉되었다.도조(度祖)는 원나라로부터 아버지인 이행리(李行里)의 천호(千戶) 관직을 계승했다. 처음에 박씨
삼촌의 왕위를 계승한 성종의 아버지 덕종(德宗)은 세조의 맏아들로 의경세자에 봉해졌으나 세자로 책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20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생인 예종이 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예종 역시 1년 남짓한 재위 기간을 채운 뒤 병사하였다. 의경세자는 월산대군과 잘산군 두 아들이 있었는데, 대비는 둘째 아들인 잘산군으로 하여금 예종의 뒤를 잇게 하였고, 그가 9대 왕인 성종이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 뒤 의경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1587년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으며,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 아들인 능양군이 반정 세력의 추대를 받아 조선 16대 왕 인조로 즉위하자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으로 추존(追尊)되었으며, 9년 후 원종으로 추존(追尊)되었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고 선왕인 광조가 폐위된 터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왕으로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종(眞宗)은 영조의 맏아들로 1719년 태어나 1724년 경의군에 봉해졌고 그 이듬해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0세의 어린 나이에 세
철종은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懷平君) 명(明)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교동(喬桐)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강화(江華)로 옮겨져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그는 순조비(純祖妃)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가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에는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1851년(철종 2) 김조순(金祖淳)의 7촌 조카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哲仁王后)로 맞아들인 뒤로는 국구(國舅)가 된 김문근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는데 1859년부터 관리들의 부정을 공격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1861년에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의 마보군(馬步軍)과 별기군(別技軍)의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의 숙위를 강화하려 했다.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봉건적인 통치기강이 무너지고 삼정(三政:田政·軍政·還穀)의 문란이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1862년 진주 단성지방을 시발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철종은 봉기발생
헌종(憲宗)은 1830년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던 문조가 병사한 후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초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으나, 순조가 헌종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긴 조인영(趙寅永)도 정국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두 외척간의 협력과 경쟁이 계속되었다. 1839년 P. 모방 등 프랑스 신부 및 천주교도들을 처형했고, 9월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했다. 1841년부터 친정(親政)을 했으나 김좌근(金左根) 중심의 안동김씨와 조만영 중심의 풍양조씨 사이에 세력다툼이 계속되었고, 1846년 조만영이 죽은 후에는 다시 안동김씨가 권력을 장악해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선왕들의 업적을 엮은 갱장록(羹墻錄)·삼조보감(三朝寶鑑)과 동국문헌비고·순조실록 등을 편찬하게 했고, 인재들을 근신(近臣)으로 양성하기 위해 정조 사후 처음으로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운영했다. 또한 내영(內營)·총위영(摠衛營)의 설치로 세력기반이 되는 군사력을 양성하기도 했으나 국정운영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재위년간 전국에 전염병·홍수 등 재해가 빈번했고
문조는 순조와 순원왕후의 장자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나 1812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음력 10월에 세자빈(신정왕후)과 가례를 올렸다. 1827년에는 아버지 순조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하여,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견제하고 처가인 풍양 조씨의 인물과 다른 당파의 인물들을 중용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1830년 5월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훙서하였다. 사후에 아들인 헌종이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한 뒤 그를 익종(翼宗)으로 추존하였으며 이후 족보상 6촌이 되는 흥선헌의대원왕의 둘째 아들인 이명복이 그의 입승대통을 이어받아 조선 26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건국 이후인 1899년에는 양자인 고조 광무제에 의해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되었다.
순조(純組)는 1800년 1월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6월 정조가 죽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장조의 폐위를 주장했던 김귀주(金龜柱)를 비롯한 벽파(僻派)와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수렴청정 기간 동안 시파(時派)의 숙청에 주력했다.1801년 1월 오가작통법을 시행했으며 사교금압(邪敎禁壓)이라는 명분으로 신유사옥을 일으켜 천주교도 뿐만 아니라 남인과 시파의 주요 인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이가환·이승훈·정약종 등을 처형하고, 정약용·채제공 등의 관직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했다. 1815년과 1827년 많은 천주교인들이 검거되어 처형당했다. 수렴청정기에 공노비(公奴婢)를 없애고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시행했다. 순조는 1804년 12월부터 직접 국정을 관장했으나 권력의 핵심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가 장악했다. 김이익(金履翼)·김이도(金履度)·김이교(金履喬)·김조순·김문순(金文淳)·김희순(金羲淳)·김명순(金明淳)·김달순(金達淳) 등이 주요 인물로 정부의 요직을 거의 독점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세도정치로 뇌물수수 등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했으며 과거제도가
장조(莊祖)는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일찍 죽고, 영조가 40세가 넘었으므로 태어난 지 1년 만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1743년(영조 19) 당론(黨論)을 없앨 방법을 묻자 여러 당인을 한결로 보아 함께 기용하면 된다고 대답하여 칭찬을 받았으며, 궁관과 더불어 신임사화를 논하여 의리의 근원을 분명히 가려내기도 했다. 1749년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게 되었다. 1752년 신하들이 병석의 영조에게 약을 권할 것을 종용하자 장조는 영조가 약을 물리치는 것이 자신의 허물 때문이므로 약을 권할 면목조차 없다고 했으나 영조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장조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여러 지방의 환곡에 대하여 덜어내고 더 받는 부다익과(芬多益寡)의 정사를 베풀고, 영세민을 괴롭히는 대동(大同)·군포(軍布)의 대전(代錢)·방납(防納)을 금지시켰다. 영조 즉위의 의리와 명분에 관련된 신임사화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놓아 대립이 심화되었고 노론과 이에 동조하는 정순왕후(貞純王后), 숙의 문씨(淑儀 文氏) 등이 영조에게 장조를 무고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恨中錄)에 따르면 장조는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내왕하는 등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
강재섭, 이재오는 정계를 떠나라....강재섭, 하늘이 부끄럽지도 않나?치욕의 정치드라마는 더 이상 보고 싶지않다.왜 친박지지자들이 그대를 도울 것이라고 생각하나?지난 2007년 후보경선 때를 생각하면 울분에 쌓이고 한맺힌 절규를 토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라.무릇 정치세계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말도 있지만... 또 지난 4.9 총선에서 사라진 노무현을 다시 깨워버렸다,누구의 잘못인가?바로 강재섭의 배신으로 이명박 정권이 탄생했고 이명박정권의 실정으로좌파세력이 다시 부활할 수 있는 명분을 주었기 때문이다.바로 그 중심에는 역시 강재섭과 이재오가 있었다.지금의 정치현실을 직시하라,과연 국민들이 이명박정권의 신뢰를 믿고 있나?노무현만 사라지면 대한민국이 좋아지는 줄 알았다.그러나 독단적인 이명박정권의 전횡을 보면 노무현정부보다 더 참혹한 기분이다,아무리 용서하려해도 용서할 수 없는 인물, 그들이 대한민국을 망친 원흉이다이제 가면을 벗고 국민앞에 나서라칼날같은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그 칼날같은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될 자는 바로 강재섭이다.이재오.아직도 한나라당 수뇌부와 기득권층은 박근혜 전 대표를 축출할 방법을 연구하
영남 발(發) 동남권신공항의 미풍이 이제는 영남을 넘어 과학벨트를 비롯한 대통령공약쓰나미를 몰고 거대한 태풍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을 강타하고 있다. 여기서도 “날 좀 보소!”, 저기서도 “날 좀 보소!”다. 이 와중에, 국정책임의 제1정당인 집권여당에서는 지는 석양인 이명박 파와 뜨는 태양인 박근혜 파의 철대가리들이 차기 총선과 대선 향배의 가늠자가 될 4.27재보궐선거를 맞아서 서로의 입맛에 따라 썩은 주판알을 박 터지게 튕기고 있다.백성을 대신해 대한민국을 수탁통치하고 있는 청와대와 국회의 꼬라지는 더욱 가관이다. 국가의 미래와 민의는 뒷전인 채, 옆집에서 우리네 영토를 노골적으로 훔치려들고, 방사능 오염수를 앞마당에 대놓고 퍼부어도 꿀 먹은 벙어리다. 이 걱정 저 걱정에 잠 못 드는 백성의 고통은 외면한 채, 지네들 입맛에 맞춰 민심을 가위질하며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 서글프게도 이것이 오늘 날 우리네 정치판의 썩은 모습이자,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다. 행정부와 입법부를 막나해 대한민국 정부의 행태가 이 모양 이 꼴이니 가히 오늘의 대한민국을 변형된 자본국가, 변형된 민주국가, 썩은 대한민국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이들에게 어찌 대한민국의 운명을
이능화(李能和)는 1907년 3, 4월 일본의 여러 관서를 시찰하고 귀국하여 7월 국문연구소 연구위원이 되었다. 1908년 관립 한성법어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관립 외국어학교 학감이 되었으나, 1911년 총독부가 폐교령을 내려 학감직을 그만두었다. 1912년 사립보통학교를 세워 부인 정인호(鄭仁鎬)와 자신의 이름에서 따온 능인이라는 교명을 붙이고 교장에 취임하여 3년간 재직했다. 1915년 각황사(覺皇寺)에서 불교진흥회를 발족시키고 간사로 활동하면서, 불교진흥회월보·불교계·조선불교총보 등의 편집인으로 일했다. 이능화는 처음에는 부친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교도였으나 이무렵 불교에 귀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2년 총독부가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조직하자 그 위원이 되어 15년 동안 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했다. 민족문화운동에 몰두하여 저서의 대부분을 저술했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 교수들과 총독부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간부들의 한국학 연구모임인 청구학회(靑丘學會)의 평의원이 되어 1939년 청구학회가 해산될 때까지 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