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보(鄭寅普)는 1913년 상하이로 건너가 박은식, 신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를 결성했다.귀국한 뒤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하며 저술 활동을 했다. 일제 총독통치 말기에는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저항하여 산 속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은둔생활을 하다가 1945년 8월 대한 광복 후에 국학대학의 초대 학장을 지냈다. 광복 초에 정인보는 광복절노래를 직접 짓기도 했다.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여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의에 반발, 강력한 신탁통치(信託統治) 반대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信託統治)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1946년 조선사연구를 저술했다. 2월 14일 민주의원결성대회가 열렸으나 정인보는 여운형, 함태영, 김창숙, 조소앙 등과 함께 민주의원 의원직을 거부하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에 의해 삼고초려로 초대 감찰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 임영신의 독직 사건을 두고 대통령 이승만과 갈등을 빚고 물러났다.
김육(金堉)은 1605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다. 1605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생으로 공부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1610년 3번이나 상소를 올려 성혼(成渾)의 원통함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른바 5현을 문묘에 모시는 5현 종사를 건의하였다. 1611년 정인홍 등이 이황(李滉)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에 격분하여,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는 부황에 앞장섰다가 성균관에서 퇴교당했다. 이후 경기도 가평군 잠곡리(潛谷里)로 낙향, 농사지으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조정에 나가 의금부 도사가 됐고,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모시고 피난했다가 돌아왔으며, 환도 후에 음성 현감으로 부임하였다.1624년(인조 2년) 증광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정언에 임명됐다가 1633년 안변 도호부사로 부임하여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였다.1636년 명나라에 파견될 성절사(聖節使)로서 연경에 갔으며, 1637년 명나라에서 병자호란의 발발과 인조의 항복 소식을 접하였다.명나라에 다녀와서 남긴 조천일기(朝天日記)에는 그가 직접 목격한 명나라 관원의 타락과 어지러운 사회 분위
방정환(方定煥)은 1919년 3월 1일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직접 등사판으로 찍은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중학생들의 도움으로 돌리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1919년 말, 일본 도쿄의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 문학과 아동 심리학을 공부했다. 일본 경찰은 독립운동경력이 있는 유학생 방정환을 형사를 보내 감시하였다. 1920년~1923년 사이 유학 기간에 천도교 잡지인 개벽에 계급 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성격의 우화들을 연재하였다. 1920년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였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다.1921년에는 일본 유학 기간동안 외국동화를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출판하였다.1921년 한성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다. 한편 방정환은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활약했는데, 강연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순수아동잡지인 월간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방정환은 자신의 특기인 재미있는 구연동화로 현실의 장벽을 극복하였다.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잡지를 선전하였던 것이다.어린이는 이원수, 마해송 선생 같은
편강렬(片康烈)은 을사늑약 늑결 후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1907년 영남 지역 의병장으로 당시 강원도를 거점으로 하고 있던 이강년의 부대에 입대했다. 굉장한 거구이며 힘이 장사였고 능력과 기백을 보여 이강년에 의해 발탁되었고, 한성부 진격을 위해 이강년과 허위, 신돌석의 의병 부대가 집결한 양주 전투에 참가했지만 일본군의 공격에 패퇴했다.1910년 평양의 기독교 계열 학교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숭실학교 재학 중 안명근을 중심으로 황해도 및 평안도 지역 항일 인사들이 대거 체포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감옥에서 3년간 복역했고,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무렵에는 황해도 지역에 항일유격대를 건설하려 한 구월산주비대 사건으로 다시 1년여 기간 동안 복역했다. 간도로 피신하여 장춘(長春)의 일본 적십자병원을 습격하고 펑톈에서는 시가전을 감행하고 길림(吉林)의 일본기관을 습격하었다. 화이더현(懷德縣)의 우자쯔(五家子)에서 항일 무장 단체인 의성단(義成團)을 양기탁, 남정과 함께 조직해 단장을 맡았다. 250명의 회원을 보유한 의성단(義成團)은 훈련 기관까지 갖추고 주요 기관에 폭탄을 던지는 테러 행위와 함께 일본군과 직접 시가전을 벌이는 등의
방한민(方漢旻)은 1920년 한성으로 올라와 조선일보 창간 사회부 기자로 근무하며 항일기사를 연재하면서 일인을 왜놈으로 표현하는 등 일제를 통렬히 비난하고 독립운동과 관련된 기사를 특종으로 보도하는 등 일제와 친일파들의 죄악상을 폭로ㆍ단죄하여 민족의 가슴 속에 항일의 의지를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이로 인해 조선일보에서 해직되었고, 동아일보에 입사했지만 일제의 감시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항일투쟁활동을 위해 일본행을 결행했다. 1922년 4월 도쿄의 일본대학 사회경제학부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재일한인유학생을 모아 문화신문을 창간했다. 1922년 7월 니가타현(新瀉縣)에서 발생한 한국인 노동자 학살에 대한 진상 보도와 한인유학생 항의 데모를 주도했다.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대성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다. 일제의 대성학교 폐쇄 조치 이후 김정기(金正琪)ㆍ김사국(金思國) 등과 함께 대성학교 내에 동양학원(東洋學院)을 설립하고 사회학과 경제학을 가르치며 교육구국활동을 전개했다. 1923년 8월 개산툰과 용정을 연결하는 천도경편 철도 개통 기념식에 참석하는 총독을 처단하고 일본영사관 및 은행 등을 폭파하여 민중 봉기를 도모할 준비를 진행 중 붙잡혀 징역 10년형을
[더타임스 지만호 칼럼니스트] 상산 조자룡이 백만적군에 포위되어 자기가 모신 주군의 아들을 구하고 무사히 귀환한 용맹 전을 우리들은 전설처럼 들은 기억이 난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홀홀 단신으로 망해가는 한나라국과 그의 백성(당원)을 구출해내는데 1차로 성공을 했다. 이로 인해 그를 보고 세인들은 박자룡이라고들 한다. 그가 포위망을 뚫고 진지(한나라당)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포위된 상태였으며, 대기해있던 막강 친이 부대로 부터의 선제공격을 받아 전사할거라고 걱정들을 했건만 그러한 우려가 숱한 백성들의 감시에 힘 한번 쓰지 못하게 하고 친이 부대를 물리쳤다. 이러한 전과는 숱한 경륜과 담대한 용맹 그리고 숨겨 논 비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친이 부대는 완전 항복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와중에도 살아보겠다고 진지를 탈출 하는 중간 장수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잠시라도 틈만 나면 공격할 태세는 애시당초 갖추어 놓았기에 방심은 금물이다. 친이 부대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충신도 되었다가도 간신으로도 쉽게 변할 수 있는 부류의 인자를 가진 사람들이며 아군을 분열시키는 전술의 달인들이 아닌가! 한 제국의 주군이 내린 밀지까지도 자기 권력
김상덕(金尙德)은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東京)에서 청년독립단원(靑年獨立團員)인 김철수(金喆壽),윤창석(尹昌錫) 등 11명의 대표들과 함께 기독교청년회관(基督敎靑年會館)에서 2·8 대한광복선언을 하고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있던 유지들에게 우송한 후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3월 21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금고(禁錮) 7월 15일형을 선고받았으며 2심에서 공소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3년 2월 2일 중국 상해(上海)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에서 개조파(改造派)에 속하여 선언서 수정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나 국민대표회의 분열로 인하여 활동이 중단되자 1924년 봄 중국 길림성(吉林省) 반석현(磐石懸)으로 가서 김동삼(金東三)·김원식(金元植)과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으며 기관지로 노동보(勞動報)를 발간하였다. 동년 4월 5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청년동맹회(大韓靑年同盟會) 결성에 참가하여 조직의 집행위원과 상무위원 및 정치사회연구부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고 9월 27일 길림성에서 조직된 독립운동자후원회(獨立運動者後援會)의 창립위원에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5월 길림성 반석현의
차희식(車喜植)은 1919년 4월 3일 차병한(車炳漢),차병혁(車炳爀) 등과 함께 화성군 장안면(長安面),우정면(雨汀面) 일대의 3.1 대한광복운동을 지휘하였다.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대한광복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사실을 전해 듣고, 차병혁,차병한과 함께 이영쇠(李永釗) 등에게 장안면사무소에서 대한광복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계획을 알려서, 인근 주민들에게 몽둥이를 가지고 면사무소로 모이도록 연락하는 한편 장제덕(張濟德),장소진(張韶鎭)과 함께 석포리(石浦里) 주민들에게 참여하도록 홍보하였다. 군중 200여 명이 모인 장안면사무소에서 선두에 서서 투석과 몽둥이로 면사무소 건물을 부수고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점차 군중이 1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다시 이들을 인근의 쌍봉산(雙峰山)으로 인솔하였다. 차병혁(車炳爀),차인범(車仁範)과 함께 2천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을 인솔하여 우정면사무소로 가서 그 곳의 건물을 파괴하고 집기류와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다시 석포리(石浦里) 이장 차병한의 제의로 화수리(花樹里)에 있던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고 방화하였다. 이 때 주재소 안에 있던 일본인 순사 천단풍태랑(川端豊太郞)이 권총을 발사하며 도망가자, 차인범(車仁範),정서송(鄭庶松
오광심(吳光心)은 1934년 남편 김학규(金學奎)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국민부(國民府) 등 3개단체(三個團體)의 전권대표가 되어 임무를 띠고 간도에서 남경(南京)으로 갈 때, 동행하였다. 1935년 7월 남경에서 5당 통일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창립되자 부녀부 차장에 임명되어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자 김정숙(金貞淑), 조순옥(趙順玉)과 함께 여군복을 입고 광복군 창립식에 참가하였다. 중경(重慶)에서 창립식을 가졌던 한국광복군은 같은 해 11월 29일 서안(西安)에 본부를 설치하게 됨에 따라 서안(西安)에서 총사령부에 소속되어 복무하였고 한국광복군이 편성됨에 따라 3지대장인 김학규(金學奎)와 함께 3지대의 간부로서 광복군 선전활동을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1944년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병력을 모집하기 위한 초모 활동(招募活動)이 활발히 전개됨에 따라 초모 활동(招募活動) 대상이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 청년에 대한 초모 활동(招募活動)도 병행하였다. 한국광복군의 간부였던 오광심은 한국 여성 동지들에게 일언을 드림이라는 글에서 한국광복군은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우리 여성의 광복군도 되는 것이니 우리 여성들
4.11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의 공천을 좌지우지할 공심위의 윤곽이 서서히 구체화 되고 있다. 28일 현재 당내에선 공심위원장으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멘토로 알려진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특히 외부에서 영입된 비상대책위원들이 윤 전 장관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종섭 서울대 법대학장과 손봉호 나눔국민운동 대표도 하마평에 올랐다. 대쪽같은 성격의 인물로 알려진 정 학장은 국회 헌법 연구 자문기구에서 활동하면서 정치권 인사들과 친분을 맺었다. 손 대표는 권영세 당 사무총장의 서울대 동기이자 유승민 의원의 경북고 동문이다. 시민단체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선 공동대표를 역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당 일각에서는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인명진 갈릴리교회 목사가 공심위원장으로 적합하다는 의견도 나온다.또한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의사를 밝혔던 법제처장을 지낸 이석연 변호사도 물망에 올랐다.총 11∼13명으로 구성되는 공심위원 중에는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현역의원 중 일부가 포함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비상대책위원회 정치쇄신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상돈 위원은 27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