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형(崔在亨)은 시베리아 노우키예프스크로 이주하여 러시아 군대의 어용상인(御用商人)으로 돈을 벌었고, 러시아 관리가 되어 두 차례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황제를 알현(謁見)하고 5개의 훈장을 받았다. 노우키예프스크 도헌(都憲)이 되어 연봉 3,000루블을 은행에 예치하여 그 이자로 매년 교포 학생 1명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학시켰다. 러일전쟁 후 이범윤(李範允)과 상의, 국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이범윤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1908년부터 이듬해까지 산발적으로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일대의 일본 수비대와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大東共報)가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재발행, 격렬한 논조로 일제를 규탄하고 독립을 절규하였다. 노우키예프스크 한족민회(韓族民會) 회장에 취임, 교포 자녀들을 위한 한인학교를 설립하였다.1919년 4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었고 11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으며 1920년 4월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때 재러한인의병을 총규합하여 시가전(市街戰)을 벌였다.
민주당이 내년 총선과 대선의 승리를 위해 제기 된 ‘민주당 헌신론, 호남 물갈이론’에 대한 본격적인 움직임이 가시화 되고 있다.손학규 대표가 야권통합을 이루는 마지막 조건은 “민주당의 헌신과 희생”이라고 강조한 가운데 민주당 호남 중진의원들의 잇단 탈(脫)호남 선언이 신선한 바람을 불러 오고 있다.[더타임스 장지연 칼럼니스트] 민주당 호남 중진의원들 중 가장 먼저 불을 지핀 사람은 전주 완산에서 4선 의원을 지낸 장영달 전 의원이다. 장 전 의원은 지난 6일 “진보세력이 영남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내년 총선과 대선의 승리는 없다”며 경남 함안.합천.의령.지역의 출마를 전격적으로 선언했다.이날 그의 기자회견장에는 정세균 전 민주당 대표와 김근태 상임고문, 한명숙 전 국무총리, 이부영 전 의원등이 함께 참여해 장 전 의원의 결단을 높이 평가 했다.이어 정세균 전 민주당 대표가 서울 출마를 공식화 했다.정 전 대표는 전북 진안.무주.장수.임실.에서 4선을 지냈으며 2009년 대표시절 정동영 최고위원의 무소속 출마를 만류하기 위해 다음 총선에 지역구 출마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다.정 전 대표는 손학규 대표의 ‘분당을’ 출마로 공석이 된 서울 종로구의 출마를 검토하
김가진(金嘉鎭)은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1877년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에 발탁되었고 1883년 유길준과 함께 외교통상 업무를 관장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主事)로 임명되었다. 188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撰)이 되었다. 김가진은 개화정책을 주도하였는데 중국 양무운동을 시찰하였으며 주차일본공사관참찬관(駐箚日本公使館參贊官)에 임명되어 수년간 동경에 주재하였으며 이후 주일본판사대신(駐日本辦事大臣)으로 임명되었다.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1895년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이 되었으며 개혁정책의 실무를 담당했다. 1895년 4차 김홍집 내각에서 상무회의소 발족, 건양협회(建陽協會) 창립에 가담하였다.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가 창설되면서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독립문을 조성하는데 기여하였으며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가담하여 헌의 6조의 실행을 촉구하였다.1904년 외무대신, 법무대신, 중추원 부의장을 역임하였고 대한자강회, 대한협회에 가담하여 적극 활동하였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대한광복운동에 투신하였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대
남궁억(南宮檍)은 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의 수행원으로 상하이에 갔고 궁내부 별군직을 역임하고, 1894년 내부 토목국장을 맡았으며 흥화학교에서 영문법과 국사를 가르치고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는 창립총회를 가졌으며 남궁억은 독립협회의 수석 총무와 사법 위원을 겸하였다. 1898년 황성신문사 사장이 되었고 1902년 러·일의 한국분할설과 러일협정을 공박하였으며, 성주목사와 양양군수를 역임하고 양양에 현산학교를 설립하고 1907년 대한협회 회장이 되었으며 1908년 교육월보를 간행하였고 관동학회 회장이 된다.1910년부터 8년간 배화학당 교사로 9년간 재직하였다. 일제가 민족 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일장기, 벚꽃 보급에 항거해 모곡리의 감리교 전도사로 일하던 남궁억은 민족정신 고양을 위해 무궁화 묘목을 전국에 보급하였다. 1918년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내려와 모곡 감리교회를 세우고 전도사로 목회하면서 더불어 교회 내에 4년제 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의 대북정책은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햇볕정책으로 정의 할 수가 있다.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이러한 햇볕정책을 얼음정책으로 철저하게 전환 시킴으로 인해서 남북관계는 최악을 맞고 있다고 단정 할 수 밖에 없다. 북한은 지금 김정길 위원장의 건강 문제와 김정은 으로의 세습문제 등으로 북한 내부를 결속시킴으로써 통제기능 강화 등 여러가지 정치적 목적으로 남북관계를 대결 국면으로 전환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과거 정권의 대북정책인 햇볕정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남북대결 구도를 부채질 하는 정책으로 한반도를 전쟁위기로 몰고가서는 안된다. 이제라도 이명박 정권은 대북정책을 어둠과 얼음의 정책에서 新햇볕정책으로 전환하는 길만이 남북이 공생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최근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는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박근혜 대세론,은 지난 2007년 대선당시 이명박 대세론,과 유사한 형태로 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내년 총선과 대선을 관리해야 할 대표가 대세론을 내세워 특정인을 한나라당의 대권 후보로 규정하는 발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러한 발언에 대하여 한나라
한규설(韓圭卨)은 1898년 중추원 의장이 되었으며, 독립협회가 고조 광무제에게 의원 설치를 건의하자 이에 호응해 새로운 중추원관제를 공포하게 했다. 11월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이 체포되고 독립협회의 혁파가 논의되자 이들을 석방하고 민의를 존중하자고 주장했다. 법부대신에 임명되었으나, 1899년 정부의 반격으로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될 때 해임되었다. 1901년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었고, 1902년 다시 법부대신이 되었다. 1904년 12월 미국에게 대한제국의 독립 유지를 위한 노력을 당부하는 고조 광무제의 밀서를 이승만(李承晩)·윤병구(尹炳求)에게 전달했다. 1905년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었으며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늑결하려 하자 일제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반대하다가 경운궁 수옥헌(漱玉軒)에 감금되고 면직당했다. 을사늑약 이후 중추원 고문 궁내부 특진관을 지냈으며, 1907년 4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소장이 되었다.
박정양(朴定陽)은 1881년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이용사(理用司)의 당상경리사(堂上經理司)가 되었다. 관제 개혁 등에 앞장섰으며, 1882년 대사성·이조 참판·좌승지를 거쳐 1883년에 기기국 총판(機器局 總辦)·내무 협판·협판군국사무·대사헌·협판교섭통상사무 (協辦交涉通商事務)·도승지·협판내무부사를 역임했다. 1887년 미국 특파 전권공사(全權公使)로 부임하여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등 외교활동을 하였다.1894년 호조 판서·교정청 당상(校正廳 堂上)·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갑오개혁으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신설되자 회의원(會議員)이 되었다. 김홍집의 1차 내각에 학부대신이 되고 1895년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과도 내각을 조직했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총리대신 서리와 궁내부대신 서리를 겸임했다. 9월 내각을 의정부로 개혁하자 참정대신(參政大臣)이 되고 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석하였다.11월 독립협회에 대한 황국협회(皇國協會)의 폭력탄압사건이 발생하여 개각이 되자 내부대신이 되었다. 온건중립파로 이상재(李商在) 등 개화파(開化派) 인사들을 돌보았다.
조병세(趙秉世)는 1877년 대사헌,대사헌을 거쳐 1887년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88년 예조·이조의 판서가 되고, 1889년 한성부 판윤·우의정을 거쳐 1893년 좌의정이 되었다. 1894년 중추원 좌의장(中樞院 左議長)이 되었다. 1896년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위하여 시무(時務) 19조를 상소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 늑결되자 국권 회복과 을사5적의 처형을 주청하기 위하여 고조 광무제를 만나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고 민영환(閔泳煥)과 함께 백관을 인솔하고 입궐하여 을사늑약의 무효와 을사5적의 처형을 연소(聯疏)하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당하였다. 표훈원(表勳院)에 연금되었고 곧 풀려났으나 경운궁 대안문(大安門) 앞에서 석고대좌하며 을사늑약의 파기를 주장하다가 다시 일본 헌병에 강제 연행되었으며 그후 가평으로 추방되었으나 다시 상경하여 표훈원에서 유소(遺疏)와 각국 공사 및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이용익(李容翊)은 1887년 광무국(鑛務局)이 설치된 이후 함경남도광무감리로 임명되어 그 지역 광산을 관리했다. 1890년 서북광무감리, 1896년 서북제부금광사무감독(西北諸府金鑛事務監督)을 거쳐 1897년 각부각군금은동철매탄각광사무(各府各郡金銀銅鐵媒炭各鑛事務)에 임명되어 전국 광산을 감독하였고 1898년 궁내부 소속 광산감독사무가 되어 황실 소속의 광산을 관장했다. 1897년 전환국장이 되어 백동화(白銅貨)를 대량 발주하여 국가 재정에 충당했으며 1903년 중앙은행조례·태환금권조례(兌換金卷條例) 등을 반포했다. 1904년 내장원경(內藏院卿)을 겸임하며 대한제국 황실 재정 강화에 노력했다. 각 도에 광산감리를 임명하여 광산을 관리하게 하고 역토(驛土)·둔토(屯土) 등 국유지를 내장원에 귀속시키고 봉세관(捧稅官)이 도조(賭租)를 징수했다. 홍삼을 제조하는 삼정과(蔘政課)를 증설하여 홍삼의 제조 및 판매를 관장하며 전매했으며 1898년 철도사(鐵道司)를 설립하여 감독을 맡았고 궁내부에 서북철도국이 설치되자 서북철도 감독을 맡아 경의선·경원선 부설을 추진했다. 1901년 지계아문총재관(地契衙門總裁官)이 되어 토지소유자에게 지계를 발행하여 토지의 소유권을 법인(法認
윤치호(尹致昊)는 1881년 신사유람단 조사(朝士) 어윤중을 수행하여 일본에 건너가 1883년 4월까지 체류했다.1883년 5월 초대 주한미국공사 L. H. 푸트의 통역으로 귀국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임명되었다. 그뒤 통역으로서 푸트와 고종, 개화파 간의 교량 역할을 하면서 청나라의 간섭 배제와 미국과의 유대 강화, 각종 정치기구 개편에 힘썼다. 1895년 김홍집 내각의 외부 협판과 박영효 내각의 학부 협판을 지냈으며 1896년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1897년 독립협회 운동을 이끌면서 토론회 개최 등 국민계몽 활동에 힘을 쏟았다. 1898년 3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주관하여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 등 반러시아 운동을 전개하였다. 1898년 8월 2대 회장이 되었으며 10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주최,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국정에 반영시켰다.1906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어 교육의 확대와 산업 개발로 자강독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표방하고 국민사상 계몽에 노력했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평양의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