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내탕금(內帑金)을 들여 경복궁(景福宮) 북편에 정치적 독립 의지를 드러낸 건청궁(乾淸宮)을 짓기 시작하며 흥선헌의대원왕의 섭정(攝政)을 종식하고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는데, 근대 문물,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외교통상정책으로 전환하였으며 고조 광무제는 1884년부터 건청궁에서 임어(臨御)하면서 정무를 처리했다. 1887년 건청궁에 최초로 전등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중국,일본보다 2년 앞선 것이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서양 문물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도모한 건청궁(乾淸宮)은 크게 장안당(長安堂)·곤녕합(坤寧閤)·복수당(福綏堂)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장안당 서쪽에는 각감청(閣監廳)이 있고, 남쪽에는 연못, 섬과 향원정(香遠亭)이 있다. 고조의 서재로 쓰인 집옥재(集玉齎)는 중국식 벽돌로 지어졌으며, 장안당 뒤쪽의 서양식 건축 관문각(觀文閣)은 외국 외교관들을 접대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삼국간섭(1895) 이후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명성황후(明成皇后)는 친러·친미 정책을 추진하여 10월 민영환(閔泳煥)을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하고 미군 장교 다이가 훈련시킨 시위대(侍衛隊)를 중용하며 친러계 이범진(李範晉)
어보(御寶)는 왕위 계승,권력 이양, 책봉(冊封)·존숭(尊崇)·추숭(追崇), 외교 문서, 행정, 서적 반사(頒賜)의 의례에 사용하였으며 왕권을 상징하고 제왕(帝王)의 권위와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제작한 인장(印章)이다. 제왕(帝王)을 상징하는 인장(印章)은 원래 새(璽)와 보(寶)가 있는데 중국의 제후국 조선의 어보(御寶)는 새(璽)를 쓰지 않고 보(寶)와 인(印)을 사용하였으며 1897년 대한제국(Daehan Empire)이 건국되고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를 제작하면서 어보(御寶)에 새(璽)가 사용되었다. 조선의 어보는 크게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국새인 대보(大寶), 어명의 발동을 위한 행정 절차에 사용된 어보, 각종 의례에 사용된 어보로 나누어지는데 대보(大寶)는 국가를 상징하고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며 왕위계승이나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사용하였다. 조선은 국왕의 즉위나 왕세자 책봉의 경우 중국의 승인을 받았는데 중국은 임명장에 해당하는 고명(誥命)과 함께 도금(鍍金) 인장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보내고 조선은 이 인장을 국가와 제왕을 상징하는 대보(大寶), 즉 국새(國璽)로 사용하였다. 세종 대부터 중국이 보내온 국
1897년 경운궁으로 이어(移御)한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황제위에 등극하기 전 대신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국호를 의논하고 제후국에서 황제국(皇帝國)으로 국격이 격상되어 정사를 모두 새롭게 시작하며 모든 예가 다 새로워졌으니 환구단에 첫 제사를 지내는 지금부터 새 국호(國號)를 정하여 써야 하며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고구려,백제,신라)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고 천명(天命)을 새로 받았으므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삼대(三代) 이래로 황제(皇帝)의 나라에서 이전의 나라 이름을 그대로 쓴 적이 없고 조선은 당당한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다. 대한(大韓:COREA)이란 이름은 황제의 정통을 이은 나라에서 쓴 적이 없고 한(韓)이란 이름은 고유한 우리나라의 이름이며, 고구려, 백제,신라의 삼한(三韓)을 아우른 것이니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니 대한(大韓)을 국호로 한다. 국호를 ‘대한(大韓)’이라 정해져 환구단에서 행할 고유제(告由祭)의 제문과 반조문(頒詔文)에 ‘대한(大韓)’으로 썼다. 단군(檀君) 이래 강토가 나뉘어 서로 웅(雄)함을 다투다가 고려(高麗)에 이르러 고구려·백제·신라의 삼한(三韓)을
태묘(太廟) 신주(神主)에 훙서(薨逝)한 조선 국왕,붕어(崩御)한 대한제국 황제는 묘호(廟號), 시호(諡號), 존호(尊號)를, 왕후는 휘호(徽號)를 제주(題主)하였는데 조선왕조는 명(明)국의 제후국(諸侯國)으로, 조선 국왕이 훙서(薨逝)하면 명국에 청시(請諡)하여 사시를 받고 나서 제주하였다. 태조부터 인조의 아버지 원종까지 신주는 먼저 명나라의 사시(賜諡)를 쓰고 다음에 조선의 묘호, 시호, 존호를 썼고 인조부터는 조선의 묘호, 시호, 존호만 썼다. 묘호(廟號)는 글자 그대로 태묘(太廟) 신주(神主)의 이름 즉, 조(祖)와 종(宗)을 말하며 조(祖)와 종(宗)은 유공왈조(有功曰祖) 유덕왈종(有德曰宗)으로 이는 조선 1대 태조- 25대 철종과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2대 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까지 적용되었다. 조(祖)는 태조,세조,선조,인조,영조,정조,순조,고조 광무제 등 건국 또는 큰 정치적 업적을 남긴 왕,황제에게, 종(宗)은 치적(治積)을 계승하고 덕이 많은 왕,황제에게 붙여졌다. 시호(諡號)는 생전에 행한 업적이므로 대행(大行)이 있는 분은 대명(大名)을 받고, 세행(細行)이 있는 분은 소명(小名)을 받는다. 대왕이 8자, 왕후가
1882년 최초의 서양식 화폐인 대동은전(大東銀錢)이 등장하였고 1883년 근대 화폐를 발행할 전환국(典圜局)을 설치했으며 1884년 묄렌도르프는 독일에서 압인기(壓印機) 3대를 수입하여 을유년(乙酉年)이 표시된 1냥 은화와 5문 동화(五文銅貨)를 시주(始鑄)했고, 1885년 선혜청(宣惠廳) 별창(別倉) 자리에 신축한 경성전환국은 1886년 개국 495년(開國四百九十五年)이 표시된 금화·은화·동화 등 15종의 압인주화(壓印鑄貨)를 시주했다. 1891년 은본위제를 표방하는 신식화폐조례(新式貨幣條例 )가 반포되었고 1892년 인천전환국이 설립되어 5냥 은화, 1냥 은화, 백동화, 적동화, 황동화 등을 소량 시주(始鑄)했다. 신구화폐의 교환 업무를 관장할 태환서(兌換署)를 한성에 설치했는데 문란한 화폐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구권화폐를 태환권(兌換券)과 교환하여 구권화폐의 유통을 정지시키고 난 후 태환권으로 신권화폐를 교환해 주기 위한 수단으로 발행하기 위해 태환서(兌換署)를 설치했다. 태환서(兌換署)는 태환(兌換) 업무를 위해 1893년 50냥, 20냥, 10냥, 5냥 4종류의 지폐(紙幣) 태환권(兌換券)을 준비했으나 미 발행에 그친 상징적인 우리나라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을 계기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복제를 개혁하여 양복을 입게 되었다. 1895년 4월 9일 칙령(勅令) 78호로 육군복장규칙(陸軍服裝規則)을 제정하여 전립, 이엄, 동달이, 전복, 목화로 구성되어 있는 구군복(具軍服)을 폐지하고 서양식 육군복장을 제정하고, 1900년(광무 4년) 4월 17일 칙령 14호로 문관복장규칙(文官服裝規則)을 정하였고, 칙령 15호로 문관대례복제식(文官大禮服制式)을 정하여 서양식 관복으로 바꾸었다. 1900년에 반포된 문관 복식(復飾)은 대례복(大禮服),소례복(小禮服),상복(常服) 등 3종으로 무궁화(無窮花) 수는 대례복에 나타나 등급을 나누는 것으로 쓰였다. 문관 대례복(大禮服) 장식은 광무(光武) 4년에 정해지고 광무(光武) 10년에는 상의가 개정되었다. 문관 대례복(大禮服) 상의는 가슴부분에 금수(金繡)한 무궁화(無窮花)의 수로 칙임관(勅任官)의 등급을 나누었는데 각각 1등은 9개,2등은 7개,3등은 5개,4등은 3개의 무궁화를 수식(繡飾)하였다. 1895년 4월 서양식 군복이 처음 도입되었으며 광무 3년(1899) 6월 22일의 조칙(詔勅)에 따라 대한제국 육·해군의 통수권자 고조 광무제(高祖 光
의친왕(義親王)은 종로구 사동(寺洞)에 있던 의친왕의 친왕부(親王府)인 사동궁(寺洞宮)에서 고조(高祖) 광무제와 귀인(貴人) 장씨(張氏)의 황자(皇子)로 태어났으며 1895년 특파대사에 임명되어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을 순방하고 1900년 8월 의친왕에 책봉되었으며 1905년 6월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됐다. 1919년 대동단(大同團)과 모의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망명을 결정하여 김가진(金嘉鎭)·전협 등과 함께 33인 명의로 최후의 1인까지 항전을 벌일 것을 강조한 선언서를 준비하고 11월 탈출을 감행하여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安東)에 도착했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강제로 송환되었으며, 일제가 도일(渡日)을 강요했으나 의친왕(義親王)은 이를 거부했고 일제의 삼엄한 감시하에 살면서도 배일정신(排日精神)을 고수했다. 1955년 의친왕이 훙거(薨去)한 안동궁(安洞宮)은 종로구 안국동에 있었는데 고조(高祖)가 원자(元子)를 얻어 그를 왕세자로 책봉하고 왕세자의 가례소를 미리 마련하고자 영건을 명하고 경연당(慶衍堂) · 정화당(正和堂) · 현광루(顯光樓) · 정상루(定祥樓) 등의 건물이 건립했다. 고조(高祖) 18년 세자빈으로 민태호(閔台鎬
의궤(儀軌)는 조선왕조, 대한제국시대에 조선 왕실,대한 황실의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으로 훗날에 참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으며 대개 1-4책의 필사본으로 제작되었지만, 8-9책에 달하는 분량이 활자로 인쇄되어 폭넓게 반포된 것도 있다. 행사가 끝나면 의궤(儀軌)를 편찬할 기구와 담당자가 결정되고 주관 관청인 도감(都監)과 관련 관청의 기록들을 자료로 삼아 편찬하였으며 제목은 해당 행사를 주관한 도감(都監)의 명칭에 의궤를 붙여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의궤(儀軌)는 대한제국 황후·황태자 및 조선 왕비·왕세자 책봉(冊封)하는 책례(冊禮),대한제국 황태자 및 조선 왕세자의 혼례인 가례(嘉禮), 조선 왕족,대한 황족의 지위를 높이는 추숭(追崇)이나 존호가상(尊號加上), 빈전(殯殿),혼전(魂殿),국장(國葬),산릉(山陵),천릉(遷陵),봉릉(封陵)에 이르는 상례(喪禮), 신주를 태묘(太廟)에 모시는 부묘(祔廟)를 비롯한 제례(祭禮),국왕이 몸소 농사를 짓는 친경(親耕), 궁궐의 영건(營建), 공신 녹훈(錄勳), 왕실 인장(印章), 어진(御眞)의 제작 등 주요 행사에 편찬됐다. 임금과 신하 사이의 명령 및 보고 또는 관청들 사이에 오고간 전교
삼국간섭(1895) 이후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명성황후(明成皇后)는 친러·친미 정책을 추진하여 10월 민영환(閔泳煥)을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하고 미군 장교 다이가 훈련시킨 시위대(侍衛隊)를 중용하며 친러계 이범진(李範晉)을 등용하는 등 배일정책을 강화했다. 이토 히로부미 일본 총리는 한반도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미우라를 주한 일본 공사로 임명하였고 명성황후의 영향력을 제거할 방책을 모색한 미우라 주한 일본 공사는 일본 군대,경찰관과 훈련대 간부 우범선(禹範善)을 포섭하여 1895년 8월 20일 새벽 경복궁을 공격하여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을 살해(殺害)했다.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명성황후가 부국강병 근대화를 추진한 건청궁(乾淸宮)에 난입하여 궁내부대신 이경직(李景稙)을 살해한 뒤, 곤녕합(坤寧閤)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무참하게 살해(殺害)했을 뿐만 아니라 증거를 없애기 위해 녹산(鹿山)에 시신을 화장하는 야만적 행동을 저질렀고 고조 광무제, 러시아인 사바찐, 미국인 다이 등 목격자가 많아 사건의 은폐에 실패했다. 만행을 목격한 외국인들은 외교관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고 미국공사대리 알렌과 러시아 공사 베
임금의 초상화를 어진(御眞)이라 하며 어용(御 容)·왕상(王像)·어영(御影)·진용(眞容)·진영(眞影)·수용(晬容)·성용(聖容)·영자(影子)·영정(影幀)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1713년(숙종 39) 이후 어진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어진(御眞) 제작은 임금이 생존해 있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리는 도사(圖寫), 임금이 돌아가신 후에 그리는 추사(追寫), 어진이 훼손되었거나 새로운 진전(眞殿)에 봉안하게 될 경우에 기존에 그려진 어진을 본 떠 그리는 모사(模寫)의 3종류가 있었다. 어진(御眞)은 임금로 생각되었으며 국가를 상징하였으므로 어진의 제작을 위해서는 도화서 화원 중에서 발탁하는 어용화사(御容畵師), 화원(畵員)과 공장(工匠)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원과 세심한 배려가 따랐다.어진 제작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주로 도감(都監)이 설치되었지만, 왕실의 종친(宗親)들이 주도하는 종부시(宗簿寺)가 관장하거나 몇몇 대신들의 감독 하에서 행해지기도 하였으며 기술적인 부분을 화원에게 조언해 줄 수 있는 유화(儒畵)가 참여하여 미진한 부분을 충고하였다. 어진(御眞)의 초본(草本)을 완성하면 비단 위에 먹으로 초본을 옮겨 그리고 채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