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궤(儀軌)는 조선왕조, 대한제국시대에 조선 왕실,대한 황실의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으로 훗날에 참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으며 대개 1-4책의 필사본으로 제작되었지만, 8-9책에 달하는 분량이 활자로 인쇄되어 폭넓게 반포된 것도 있다. 행사가 끝나면 의궤(儀軌)를 편찬할 기구와 담당자가 결정되고 주관 관청인 도감(都監)과 관련 관청의 기록들을 자료로 삼아 편찬하였으며 제목은 해당 행사를 주관한 도감(都監)의 명칭에 의궤를 붙여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의궤(儀軌)는 대한제국 황후·황태자 및 조선 왕비·왕세자 책봉(冊封)하는 책례(冊禮),대한제국 황태자 및 조선 왕세자의 혼례인 가례(嘉禮), 조선 왕족,대한 황족의 지위를 높이는 추숭(追崇)이나 존호가상(尊號加上), 빈전(殯殿),혼전(魂殿),국장(國葬),산릉(山陵),천릉(遷陵),봉릉(封陵)에 이르는 상례(喪禮), 신주를 태묘(太廟)에 모시는 부묘(祔廟)를 비롯한 제례(祭禮),국왕이 몸소 농사를 짓는 친경(親耕), 궁궐의 영건(營建), 공신 녹훈(錄勳), 왕실 인장(印章), 어진(御眞)의 제작 등 주요 행사에 편찬됐다. 임금과 신하 사이의 명령 및 보고 또는 관청들 사이에 오고간 전교
삼국간섭(1895) 이후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명성황후(明成皇后)는 친러·친미 정책을 추진하여 10월 민영환(閔泳煥)을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하고 미군 장교 다이가 훈련시킨 시위대(侍衛隊)를 중용하며 친러계 이범진(李範晉)을 등용하는 등 배일정책을 강화했다. 이토 히로부미 일본 총리는 한반도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미우라를 주한 일본 공사로 임명하였고 명성황후의 영향력을 제거할 방책을 모색한 미우라 주한 일본 공사는 일본 군대,경찰관과 훈련대 간부 우범선(禹範善)을 포섭하여 1895년 8월 20일 새벽 경복궁을 공격하여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을 살해(殺害)했다.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명성황후가 부국강병 근대화를 추진한 건청궁(乾淸宮)에 난입하여 궁내부대신 이경직(李景稙)을 살해한 뒤, 곤녕합(坤寧閤)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무참하게 살해(殺害)했을 뿐만 아니라 증거를 없애기 위해 녹산(鹿山)에 시신을 화장하는 야만적 행동을 저질렀고 고조 광무제, 러시아인 사바찐, 미국인 다이 등 목격자가 많아 사건의 은폐에 실패했다. 만행을 목격한 외국인들은 외교관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고 미국공사대리 알렌과 러시아 공사 베
임금의 초상화를 어진(御眞)이라 하며 어용(御 容)·왕상(王像)·어영(御影)·진용(眞容)·진영(眞影)·수용(晬容)·성용(聖容)·영자(影子)·영정(影幀)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1713년(숙종 39) 이후 어진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어진(御眞) 제작은 임금이 생존해 있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리는 도사(圖寫), 임금이 돌아가신 후에 그리는 추사(追寫), 어진이 훼손되었거나 새로운 진전(眞殿)에 봉안하게 될 경우에 기존에 그려진 어진을 본 떠 그리는 모사(模寫)의 3종류가 있었다. 어진(御眞)은 임금로 생각되었으며 국가를 상징하였으므로 어진의 제작을 위해서는 도화서 화원 중에서 발탁하는 어용화사(御容畵師), 화원(畵員)과 공장(工匠)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원과 세심한 배려가 따랐다.어진 제작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주로 도감(都監)이 설치되었지만, 왕실의 종친(宗親)들이 주도하는 종부시(宗簿寺)가 관장하거나 몇몇 대신들의 감독 하에서 행해지기도 하였으며 기술적인 부분을 화원에게 조언해 줄 수 있는 유화(儒畵)가 참여하여 미진한 부분을 충고하였다. 어진(御眞)의 초본(草本)을 완성하면 비단 위에 먹으로 초본을 옮겨 그리고 채색
1884년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落成宴) 때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閔泳翊)이 개화파 인사들에 의해 치명적인 자상(刺傷)을 입었고 미국 선교사이자 마이애미 의과대학에서 공부한 의사였던 알렌이 나타나 민영익을 살려냈다. 고조 광무제는 알렌(Horace N. Allen)을 궁정의 시의관으로 임명하고,1885년 2월 29일 한성(漢成)의 재동(齋洞)에 활인원(活人院)과 혜민원(惠民院)을 개편해 서양식 근대 의료 기관인 광혜원(廣惠院) 설립을 윤허하였다. 광혜원(廣惠院)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 소속되어 있었고 광혜원의 원장은 광혜원당랑(廣惠院堂郞)으로 불렸으며 1885년 3월 12일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하였다.1886년 3월 29일에는 양반 자제 중에서 학생 16명을 선발하여 이 중 12명이 본과에 진급하였다.1893년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였던 올리버 에비슨이 제중원을 인계받았으며 1899년(광무 3)에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뽑아 의학교육을 실시했다. 1899년 4월에 설립된 내부병원(內部病院)은 1900년 6월에 광제원(廣濟院)으로 개칭되었고, 1907년 3월 광제원이 폐지됨에 따라 대한의원(大韓醫院)으
대한제국 황제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궁중 길상(吉祥)장식화인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는 5대 명산 5악(五嶽:백두산·묘향산·금강산·계룡산·지리산)과 붉은 해, 흰 달, 붉은 소나무,계곡 폭포수,강의 파도를 그린 그림이며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일월곤륜도(日月崑崙圖)라고 부른다. 경운궁 중화전 등 정전(正殿)의 어좌(御座) 뒤에 놓았고 황제의 어진을 모신 진전(眞殿)이나 황제의 신위를 모신 혼전(魂殿)에도 두었다. 절대 황권을 상징하므로 황제가 임어하는 곳에 항상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가 있으며, 주로 병풍 위에 그려놓아 일월오악병((日月五嶽屛)이라 이른다.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병풍은 8폭의 병풍 형태로 된 것과, 별도의 받침대에 끼워서 세우는 대형 가리개 형태로 된 것이 있다. 진전(眞殿)에 어진(御眞)을 봉안할 때에는 여러 폭으로 이루어진 일월오악도 병풍을 정면에 세우고 양쪽 옆에 한 폭으로 된 작은 병풍을 2중으로 세우기도 했다.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왼쪽에는 흰 달이, 오른쪽에는 붉은 해가 떠 있고, 가운데에 녹색과 청색으로 채색된 5대 명산, 5악이 솟아 있다. 양쪽 계곡에는 폭포수가 쏟아지고, 5악(五嶽) 아래는 반원꼴의 물결과 파도가 큰 강
길례(吉禮),가례(嘉禮)에 입는 대례복(大禮服)인 면복(冕服)에 쓰는 면류관(冕旒冠)은 곤복(袞服)과 함께 착용하였으며 황제는 12장복(十二章服) ,황태자와 조선 국왕은 9장복,왕세자는 7장복을 입었다.폭이 7치, 길이 1자 2치의 전원후방(前圓後方)의 평천판(平天板)에 앞 4치, 뒤 3치의 수류(垂旒)를 달고 면관(冕冠)의 좌우 양옆 귀쪽에 주광(黈纊)과 옥진(玉瑱)을 늘어뜨리고 굉(紘)과 담(紞)으로 장식되어 있다. 면류관은 방형의 천판에 옥구슬을 매단 관이며 조선 국왕은 9류면(九旒冕)이고, 왕세자는 7류면(七旒冕)이었으나 광무 원년(1897년) 대한제국 1대 고조(高祖) 광무제는 12류면(十二旒冕)이 되었고 황태자관은 9류면(九旒冕)이 되었다. 곤복(袞服)은 중단(中單),의(衣),상(裳)을 입고 대대(大帶),폐슬(蔽膝),옥대(玉帶),패옥(佩玉),방심곡령(方心曲領),후수(後綬),홍말(紅襪),적석(赤舃),옥규(玉圭)를 착용했다. 중단(中單)은 겉옷 안에 입는 옷이로 소매가 넓으며 깃에는 불문이 금박되어 있다.의(衣)는 저고리, 상(裳)은 치마, 대대(大帶)는 후수를 매어다는 허리띠와 비슷한 것
적의(翟衣)는 친애, 해로(偕老)를 의미하는 꿩무늬 적문(翟紋)을 짜넣은 포(袍)이며 대한제국(大韓帝國) 황후,황태자비,의친왕비(義親王妃)가 대례복(大禮服)으로 착용하던 적의(翟衣)는 길례(吉禮),가례(嘉禮) 등의 중요한 행사 때에 착용하였으므로 화려한 것이 특징이고, 여기에 딸리는 부속 의장품이나 머리 장식물이 복잡하다. 적의를 착용할 때는 머리에 각종 비녀와 마리삭금댕기로 장식한 대수(大首)머리로 장식하는데 위보다 아래가 넓은 삼각형 형태의 가체를 어깨 높이까지 곱게 빗어내리고 양끝에 봉(鳳)이 조각된 비녀를 꽂으며, 뒷머리 가운데에는 숱이 많은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자주색 댕기를 늘이고 머리 위 앞부분에 반자와 봉잠으로 장식한다. 적의(翟衣)는 속에 중단(中單),의(衣), 상(裳)을, 겉에 대대(大帶), 후수(後綬), 폐슬(蔽膝), 패옥(佩玉), 하피(霞奸), 옥대(玉帶) 등으로 장식하고, 청석(靑舃)을 신는다.적의(翟衣)는 영조 대에는 대홍단(大紅緞)으로 지었으며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 대의 적의(翟衣)는 심청색이며 이화문(李花紋) 168개가 있다. 적의 앞뒤에 금실로 수놓은 오조원룡보(五爪圓龍補)를 붙이고 앞면의 보 아래에서 옷단에 이르
영친왕(英親王)은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비 엄씨(貴妃 嚴氏)이고 2대 순종 융희제와는 이복형제간이다. 1900년(광무 4) 8월 영친왕(英親王)에 책봉되었으며 1907년 12월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대한제국 강제 병합의 볼모로 영친왕을 일본에 데려갔다. 1910년 8월 일제가 대한제국을 불법 병합하면서 고조 광무제를 이태왕으로, 순종 융희제를 이왕으로, 영친왕을 영왕으로 격하시켰다. 일제 총독부는 대한제국 합병의 정당화를 선전하기 위해 1920년 영친왕을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의 딸 마사코와 정략혼인을 시켰다. 1926년 6월 순종 융희제가 붕어하자 일제 총독부가 영친왕을 이왕으로 계승시켰다. 영친왕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을 거쳐 육군중장을 지냈으며 1963년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에 걸려 있는 상태로 국적을 회복하고 귀국했다. 영친왕릉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 옆에 있다.
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는 1874년 고조 광무제와 명성황후의 2남으로 태어났으며 1875년 조선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1895년 홍범 14조 반포와 동시에 왕태자로 올랐고, 1897년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1898년 김홍륙(金鴻陸)이 고조 광무제와 황태자에게 해를 가할 목적으로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넣었는데, 고조 광무제는 맛이 이상함을 알고 곧바로 뱉었으나, 순종 융희제는 다량을 복용하여 치아가 망실되고 혈변을 누는 등 심한 몸살을 앓았다.1907년 고조 광무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상설,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였고 일제 통감부와 정미칠적의 강박으로 강제로 황제위에서 퇴위되었으며 순종 융희제는 일제 통감부에 의해 황제위에 등극하였다. 1905년 이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대한제국에서 서양 강대국을 몰아내고 대한제국의 후견국을 자처하면서 대한제국 강제 합병의 발판을 공고히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일제 통감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에게 하얼빈에서 저격당하였다.1910년 8월 일제는 조약 체결권자인 순종 융희제에게 경술늑약에 공식적으로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순종 융희제는 경술늑약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으며, 8
의친왕(義親王)은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의 다섯째 아들로 1877년에 태어났으며 어머니 귀인 장씨는 명성황후의 미움을 받아 궐밖으로 축출되었다. 귀인 장씨는 의친왕을 낳고 명성황후의 박해를 피해 궁 밖에서 살다가, 1900년 숙원(淑媛)에 추증받고 1906년 귀인(貴人)에 추증되었다. 의친왕은 유년기에 윤치소, 이종훈, 권동진 등과 필운학당에서 수학하였다.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졌고, 1893년 12월 6일 김사준의 딸 김수덕(金修德)과 혼인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듬해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였다.1900년 8월 의친왕에 책봉되었으며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되었다. 그 해 6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대한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받았다. 이후 고조 광무제의 후궁 귀인 엄씨의 견제를 받았다. 2대 순종 융희제의 다음 서열로 황위 승계 1순위이었으나 귀인 엄씨의 견제와 이토 히로부미 일제 통감의 방해로 대한제국 황태자에 오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