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李德懋)는 박제가(朴齊家)·류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와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내어 문명을 중국에까지 떨쳤다. 박지원(朴趾源)·박제가·홍대용(洪大容)·서이수(徐理修) 등 북학파 실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고염무(顧炎武)·주이존(朱彛尊)·서건학(徐乾學) 등 중국 고증학파의 학문에 심취하여, 당대의 고증학자였던 이만운(李萬運)에게 지도를 받았다.1778년(정조 2)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심염조(沈念祖)의 서장관으로 청의 연경(燕京)에 갔다. 기균(紀均)·당악우(唐樂宇)·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엄성(嚴誠)·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이헌교(李憲喬)·채증원(蔡曾源)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했다. 돌아올 때 산천·도리(道理)·궁실·누대(樓臺)·초목·충어(蟲魚)·조수(鳥獸)에 이르는 기록과 많은 고증학 관계 서적을 가지고 왔는데, 북학론 발전에 큰 보탬이 되었다. 1779년 박제가·류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초대 규장각 외각검서관(外閣檢書官)이 되었다. 근면하고 시문에 능했던 이덕무는 규장각 경시대회에서 여러 차례 장원하여 1781년 내각검서관(內閣檢書官)이 되었으며, 사도시주부·사근도찰방·광흥창주부·적성현감 등
박지원(朴趾源)은 1757년 민옹전(閔翁傳)을 지었고, 1767년까지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소설을 지었다. 이덕무·류득공·이서구·박제가가 4대시가(四大詩家)로 일컬어졌는데 모두 박지원의 제자들이었다. 1780년 진하별사(進賀別使)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청(淸)의 베이징에 갔다. 5월 25일에 출발해 8월 1일부터 9월 17일까지 베이징에 머물렀고, 10월 27일 한성에 돌아왔다. 이 연행에서 청의 문물과의 접촉은 이용후생(利用厚生) 위주의 사고로 전환하게 되었다. 박지원은 양반사회를 비판하고 사회모순을 지적한 호질(虎叱)·허생전(許生傳) 등의 소설도 들어 있고, 중국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와 조선의 제도·문물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는 문명비평서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였다. 열하일기는 필사본이 많이 유포되었는데 자유분방하고도 세속스러운 문체와 국내에 만연되어 있던 반청(反淸) 문화의식에의 저촉 때문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루하고 보수적인 소화의식(小華意識)에 젖어 있는 지식인들의 비난 때문에 정조도 1792년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치라는 처분을 내렸다. 1
유홍기(劉鴻基)는 오경석이 중국에서 구해온 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박물신편(博物新編) 등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소개한 서적을 읽고, 무력을 동원하여 동양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서양세력의 실체와 아편전쟁 이후 밀려오는 서양세력에 의해 반식민지가 되어가던 중국의 실상을 알게 되어 점차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1877년 박규수가 죽자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이동인(李東仁) 등의 청년들을 소개받아 함께 지도하였다. 1882년 기구 축소와 감원을 통해 국가 재정을 절감하기 위해 감생청(減省廳)을 설치하고, 책임자인 구관당상(句管堂上)에 어윤중(魚允中)을 임명했다. 감생청(減省廳)은 약 6개월 동안 존속하다가 수구파의 반대로 폐지되었다.유홍기는 종 9품 부사용(副司勇)에 임명되었다가 정 9품 사용(司勇)으로 승진되었다. 1884년 12월 4일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서재필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동인(李東仁)은 1879년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의 지원을 받아 일본의 정세를 시찰하기 위해 방법을 모색했다. 그해 6월초 일본 혼간사의 부산 별원(別院)에 와 있던 승려 오쿠무라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교토의 혼간사에 체류하며 일본어를 익히면서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 변모된 일본사회를 살펴보고, 한성에 있는 김옥균·박영효에게 서구 문명을 소개한 서적 등을 보내면서 계속 연락을 취했다. 교토에서 10개월간 머무른 뒤 1880년 4월 도쿄로 가 혼간사 승려들의 알선으로 일본의 정치가들과 접촉했다. 그해 8월 수신사로 온 김홍집(金弘集)과 친교를 맺어 김홍집과 함께 9월말 귀국했다. 귀국 후 김홍집의 소개로 민영익(閔泳翊)의 집 사랑방에 거처하면서, 민영익의 주선으로 일본의 국정과 세계 각국의 형세를 고조 광무제에게 상주(上奏)해 고조 광무제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고조 광무제는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져온 황쥰센의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에 따라 미국과 조약을 맺기를 원했다. 1880년 10월 원산을 거쳐 일본에 도착한 뒤 청나라 공사 하여장(何如璋)을 만나 미국과의 조약 체결의 알선을 부탁했다. 일본 지도자들과 접촉한 뒤 12월 18일 부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