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기(劉鴻基)는 오경석이 중국에서 구해온 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박물신편(博物新編) 등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소개한 서적을 읽고, 무력을 동원하여 동양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서양세력의 실체와 아편전쟁 이후 밀려오는 서양세력에 의해 반식민지가 되어가던 중국의 실상을 알게 되어 점차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1877년 박규수가 죽자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이동인(李東仁) 등의 청년들을 소개받아 함께 지도하였다. 1882년 기구 축소와 감원을 통해 국가 재정을 절감하기 위해 감생청(減省廳)을 설치하고, 책임자인 구관당상(句管堂上)에 어윤중(魚允中)을 임명했다. 감생청(減省廳)은 약 6개월 동안 존속하다가 수구파의 반대로 폐지되었다.유홍기는 종 9품 부사용(副司勇)에 임명되었다가 정 9품 사용(司勇)으로 승진되었다. 1884년 12월 4일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서재필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