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극렴(裵克廉)은 1376년 진주도원수로서 진주에 침략한 왜적을 반성현(班城縣)에서 물리쳤고, 이듬해 경상도도순문사로서 왜구를 물리치면서 합포에 성을 쌓았으며, 1378년에는 경상도원수가 되어 왜구를 대파했다. 이듬해 왜적의 기병 700명과 보병 2,000여 명이 진주에 침략했는데, 양백연(梁伯淵)·우인렬(禹仁烈)·한방언(韓邦彦)과 더불어 크게 이겼다. 울주·사주·청도 등에서 왜적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고 1380년 밀직부사가 되었다. 1388년 최영이 요동정벌을 강행할 때 우군도통수 이성계 예하에 배속되어 위화도회군에 참여하였다. 구 세력 제거에 참여한 뒤, 이듬해 판개성부사를 거쳐 문하찬성사에 올랐다. 1390년에는 평리(評理)가 되어 회군공신으로 추록되었고, 양광도찰리사가 되었다. 이듬해 정월 이성계가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하자 중군총제사로 임명되었다. 1392년 7월 문하우시중으로서 조준·정도전과 함께 공민왕 비인 정비(定妃)에게 왕은 정사에 어둡고 덕이 없어 임금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고, 그의 교(敎)를 받드는 형식으로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했다. 조선 건국 후 개국공신 일등으로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 문하좌시중이 되었다.
한민족은 상고시대부터 10월 상순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어 둥근 제천단(祭天壇)을 쌓고 천제를 봉행하며 국태민안을 기원해 왔으며 환구제(圜丘祭)는 10세기 고려 성종(成宗) 대에 제도화되고 조선 세조(世祖) 대에 폐지되었으며 1897년 고조(高祖)는 대한제국(Daehan Empire)을 건국하고 심순택(沈舜澤)의 상소에 의해 경운궁(慶運宮) 대안문(大安門) 앞에 황단을 축조하고, 10월 12일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황단에 나아가 환구제를 봉행하고 광무제(光武帝)로 등극했다. 대한제국(Daehan Empire)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광무 원년 백악과 목멱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大安門) 앞에 제천단 황단(皇壇)을 축조하였으며 1층은 장광이 144 척이며 둥글게 돌로 쌓아 석 자 높이로 쌓았고, 2층은 장광이 72 척이며 석 자 높이로 쌓았고, 3층은 장광이 36척이며 석 자 높이로 둥글게 쌓아 올렸고,바닥은 벽돌을 깔고 황단(皇壇) 주위를 둥글게 석축을 모으고 돌과 벽돌로 담을 쌓았으며,동서남북으로 황살문을 세웠고 남문은 문이 셋이다. 1910년 불법 무효한 경술늑약에 의한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 병합 후 환구단의 건물과 터를
의친왕(義親王)은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의 다섯째 아들로 1877년에 태어났으며 어머니 귀인 장씨는 명성황후의 미움을 받아 궐밖으로 축출되었다. 귀인 장씨는 의친왕을 낳고 명성황후의 박해를 피해 궁 밖에서 살다가, 1900년 숙원(淑媛)에 추증받고 1906년 귀인(貴人)에 추증되었다. 의친왕은 유년기에 윤치소, 이종훈, 권동진 등과 필운학당에서 수학하였다.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졌고, 1893년 12월 6일 김사준의 딸 김수덕(金修德)과 혼인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듬해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였다.1900년 8월 의친왕에 책봉되었으며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되었다. 그 해 6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대한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받았다. 이후 고조 광무제의 후궁 귀인 엄씨의 견제를 받았다. 2대 순종 융희제의 다음 서열로 황위 승계 1순위이었으나 귀인 엄씨의 견제와 이토 히로부미 일제 통감의 방해로 대한제국 황태자에 오르지
덕혜옹주(德惠翁主)는 1912년 경운궁에서 출생하였다.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의 고명딸로서 5살 때 준명당에 유치원이 만들어질 정도로 고조 광무제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이름 없이 복녕당아기라고 불리다가 1921년 5월 4일 덕혜옹주라는 이름을 받았다. 한성의 히노데 소학교를 거쳐 일본에 강제 유학을 간 덕혜옹주는 1925년 도쿄 학습원대학(学習院大学)에 입학하였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였다. 1930년 모친 귀인 양씨의 죽음을 계기로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였으나 이내 호전되었다. 일본 왕실의 명령으로 1931년 5월 8일 도쿄에서 대마도 도주인 소 다케유키와 강제 혼인하여 이듬해 8월 14일, 딸 마사에를 낳았으나 출산 후 지병이 악화되어 1953년 남편 소 다케유키에게 버림받았으며 1955년 딸 마사에마저 행방불명되는 불행을 겪었고 정신장애로 도쿄 인근의 마쓰자와병원에 입원하였다. 1962년 1월26일 대한민국에 돌아왔으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으며 창덕궁에서 생활하였고 1989년 4월 21일 수강재(壽康齋)에서 사망하였으며 덕혜옹주묘는 홍유릉 뒤에 있다.
완친왕(完親王)은 귀인 이씨(貴人 李氏)와 고조 광무제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로, 완화군(完和君)으로 봉해졌다. 고조 광무제는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와 가례를 올리기 이전 귀인 이씨를 총애하였고 1868년 귀인 이씨가 완화군을 낳자 흥선헌의대원왕은 첫 손자인 완화군을 총애하였으며 명성황후와 귀인 이씨 간에 치열한 다툼이 전개되었다. 흥선헌의대원왕이 완화군(完和君)을 매우 총애하여 세자에 책봉하려 했으나 1874년 음력 2월에 태어난 명성황후의 아들 척(坧)이 이듬해 음력 2월 세자 책봉되었으며 완화군은 1880년에 병을 얻어 죽었는데 귀인 이씨는 아들 완화군을 잃은 슬픔에 실어증이 걸려 병을 앓다 죽었고 고조 광무제가 대한제국을 건국하면서 완친왕(完親王)으로 추존되었다.
명성황후(明成皇后)는 인현왕후의 사가로서 아버지 민치록의 소유의 한성 감고당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홀어머니를 섬긴 외동딸이므로 외척으로 인한 폐해가 없으리라 기대한 흥선헌의대원왕의 뜻에 따라 초간택과 재간택, 삼간택을 거쳐 1866년 음력 3월 6일 왕비로 최종 간택되어 운현궁에서 지내다가, 음력 3월 20일 왕비가 되었다.아버지 민치록은 의정부 영의정에게 추증되었고, 아버지의 본부인 해주 오씨는 해령부부인에 추증되었으며, 생모 감고당 한산 이씨는 한창부부인의 작위를 받았다. 1874년 음력 2월에 태어난 아들 척(坧)이 이듬해 음력 2월 세자가 되었다.1873년 11월 고조 광무제가 친정을 시작하자 명성황후는 민씨 집안 사람을 조정의 요직에 앉혔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발탁하여 우의정에 등용하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게 하고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공업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황쭌센의 조선책략의 연미론(聯美論)을 접한 명성황후는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비밀리에
김정희(金正喜)는 1810년(순조 10)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갔다. 6개월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까지 하였으며, 김정희가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조선에 돌아온 뒤 벼슬에 나가지 않고 실사구시설을 발표하여 북학(北學)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한편 성리학적 관념론을 비판했다. 김정희는 청나라에서 고증학을 배울 때 금석학도 함께 배웠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친구인 김경연, 조인영 등과 함께 비문을 보러 팔도를 답사했고 북한산비 비문에 적힌 “眞興太王巡狩”라는 구절을 통해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혀냈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금석과안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실사구시설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김정희는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전각(篆刻)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차(茶)를 좋아하여 초의 스님, 백파 스님과 친분을 맺었다. 1819년
홍대용(洪大容)은 1765년(영조 41년) 홍억(洪檍)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軍官)으로 수행, 3개월여를 북경에 묵으면서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을 만나 담론하며 경의(經義), 성리(性理), 역사, 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천문학·지리학·역사 등에 관한 지식을 쌓고 서양 문물을 배우고 돌아왔다. 천주당(天主堂)에서 서양 문물을 견학, 학습하고 독일 사람으로 청나라의 흠천감정(欽天監正)을 하는 할레르슈타인과 흠천감 부감(副監) 고가이슬을 만나 면담했으며, 청나라 관상대(觀象臺)를 여러 번 방문, 견학하여 천문지식을 습득해 오기도 했다. 홍대용의 북경 방문은 당시의 여러 북학파 학자 중에서 제일 처음으로 실학의 도입에서 그 선구적 업적이 크다.귀국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론을 기록한 유포문답과 과학 사상을 담은 의산문답을 지었다. 지구(地球)의 자전설(自轉說)을 설파하였으며 토지 등을 균등하게 분할하는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를 토대로 하는 경제정책의 개혁을 주장했으며, 특히 실사구시 정신에 따라 신분 제도 개혁을 위해 과거제를 없애고 공거제(貢擧制)에 의한 인재를 고루 등용하며, 신분 등에 관계없이 8세 이상의
류득공(柳得恭)은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가 되었으며 포천·제천·양근 등의 군수를 지냈다. 외직에 있으면서도 검서의 직함을 가져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4검서라고 불렸다. 첨지중추부사에 승진한 뒤 만년에 풍천부사를 지냈다.시문에 뛰어났으며, 규장각검서로 있었기 때문에 궁중에 비치된 국내외의 자료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 다양한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저서를 남겼다. 발해고(渤海考)에서 요동(遼東)과 간도를 한민족사의 무대로 파악했으며 고구려의 역사 전통을 강조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본격적으로 연구했고, 신라와 발해가 병존했던 시대를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로 파악했다. 발해고는 군고(君考)·신고(臣考) 등 9고(考)로 되어 있으나 권(卷)도 나누지 않은 단권(單卷)의 간략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발해사를 최초로 체계화시키고 이를 한국사의 체계 안에서 파악하였다.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단군조선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 한민족이 세운 21개 도읍지의 전도(奠都) 및 번영을 읊은 43편의 회고시로서 한민족의 주체의식을 되새겨 보려는 역사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박제가(朴齊家)는 1778년 이덕무와 함께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기균(紀畇)·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이정원(李鼎元)·포자경(鮑紫卿) 등 청을 대표하던 석학들과 교류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선진문물에 감명을 받아 여러 가지 선진기술과 도구를 배우고 연구함으로써 앞으로의 학문적 기초를 세웠다. 중국에서 돌아온 뒤 거기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해 북학의(北學議) 내편·외편을 썼다. 내편에서는 생활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사회 제도의 모순점과 개혁방안을 다루었다. 정조가 임진·병자의 양란 이후 중세적 신분질서 내 서얼층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자 1777년 3월 서얼허통절목(庶孼許通節目)을 공포하고, 1779년 3월 규장각에 검서관직(檢書官職)을 설치해 서얼 출신들이 하급관리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박제가는 이덕무·류득공·서이수(徐理修) 등 서얼 출신 학자들과 더불어 초대 검서관으로 임명되었다. 13년간 규장각의 여러 벼슬을 지내면서 왕명을 받아 많은 책을 교정·간행하는 한편 국내외의 서적과 저명한 학자들을 접하면서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1786년 정조가 왕명으로 관리들에게 시폐(時弊)를 시정할 구폐책(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