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金正喜)는 1810년(순조 10)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갔다. 6개월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까지 하였으며, 김정희가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조선에 돌아온 뒤 벼슬에 나가지 않고 실사구시설을 발표하여 북학(北學)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한편 성리학적 관념론을 비판했다. 김정희는 청나라에서 고증학을 배울 때 금석학도 함께 배웠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친구인 김경연, 조인영 등과 함께 비문을 보러 팔도를 답사했고 북한산비 비문에 적힌 “眞興太王巡狩”라는 구절을 통해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혀냈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금석과안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실사구시설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김정희는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전각(篆刻)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차(茶)를 좋아하여 초의 스님, 백파 스님과 친분을 맺었다.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였다. 효명세자가 죽고 권력을 잡은 안동 김씨 김우명이 그를 탄핵하여 파면되었으며, 아버지 김노경은 귀양을 가게 된다. 김우명은 비인현감으로 있다가 암행어사로 내려온 강직한 김정희에게 파직된 바 있었다. 김노경은 순조가 죽던 1834년 유배에서 풀려난다.1835년(헌종 1년) 친분이 있던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자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판 이조판서 등에 이르렀다. 1840년(헌종 6년) 무렵 안동 김씨기 집권하자 윤상도(尹尙度)의 옥(獄)에 관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