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와 나 이천시 지속가능발전협의회 상임의장 박연하자전거와 나의 인연은 꽤 오래 되었다. 1995년 6월, 뒤늦게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러 유학길에 올라 캐나다에서 생활하던 나는 그네들의 자전거타기 운동을 보게 되었다. 환경운동차원에서 자전거 타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지구상의 천국이라 불리우는 이 환경좋고 잘 사는 나라에서 무슨 자전거 타기 운동이냐”하고 조금 의아스러웠다. 또 그들은 모두 헬멧을 착용하고 마치 오토바이를 타는 것처럼 장비를 갖추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헬멧을 쓰지 않으면 자동차가 신호위반을 한 것처럼 ‘교통딱지’를 뗄 수밖에 없었다. 어린아이들 까지도 헬멧을 쓰고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모습은 오래도록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자전거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나는 이렇게 유학시절 자전거를 만나게 되었고 귀국 후 지속발전가능협의회 상임의장을 맡아 환경에 눈뜨면서 비로소 그들에 자전거 사랑이 왜 그렇게 뜨거울 수밖에 없었는지 서서히 깨달아 갔다. 그리고 자전거를 양정여고동창인 옥선이에 소개로 ‘자전거 학교’에서 정식으로 수료하고, 자전거 매니아로 탈바꿈했다. 그 후로 자전거는 나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지난번 총선에 도전했다
“사람이 못 할 일이 뭐가 있니, 하늘에 별도 딸 수 있단다!- 아버지를 회상하며 -“아버지 눈이 너무 많이 와요. 이래서 갈 수 있겠어요?”중학생이던 나는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걸어가느라 헉헉 거리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이천의 양정여자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이천에는 피아노를 가르칠 교사가 없기 때문에 수원까지 레슨을 배우러 다니던 즈음이었다. “눈이 온다고, 해야 할 공부를 안 할 수 있나.”아버지는 힘들어 하는 내 손을 잡고 더욱 힘을 내어 이끌었다. 결국 좀 늦긴 했지만 아버지와 나는 피아노 선생님께 도착하여 레슨을 받고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돌아오는 길 역시 눈길로 인해 힘들었지만 수원에서 이천까지 아버지를 따라 오는 길은 힘들었던 기억보다 어린 마음에도 배우는 기쁨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아가는 기쁨이 더 컸다. 당시 이천에는 피아노가 있는 가정집도 드물고 피아노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도 전무했다. 그런 시골에서 나는 우연히 성당에서 신부님이 피아노를 치는 것을 보고 매료되어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했으니 여느 집 같았으면 어린 딸의 철없는 소리라고 치부해 버렸을 텐데 교육열이 높았던 아버지는 그러지 않으셨다. 그리고 이리저리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