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응(趙重應)은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 살해 사건 직후 법부 형사국장으로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서둘러 폐비 조치하는 등 사후 처리에 가담하였다.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일 내각이 붕괴하자 일본으로 피신하여 십여 년간 망명 생활을 하였다.1906년 7월 귀국한 조중응은 이듬해 이완용 내각의 법부대신으로 단숨에 입각하였다. 정미늑약(丁未勒約)과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에 큰 공을 세웠다. 고조 광무제의 강제 퇴위에 관여했으며,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에 내각 대표로 참석하였다. 1910년 10월 16일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고, 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성균관을 폐지하고 경학원(經學院) 설립에 적극 참가하는 등 철저한 친일파로 활동했다.
이병무(李秉武)는 1894년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 등 무관 벼슬을 지냈다. 1895년부터 약 1년간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한 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1900년에는 일본으로 피신한 망명자와 연락한 혐의로 2년 동안 구금되고 유배형을 받기도 했다.다시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1904년 복관하여 이후로는 승진을 거듭했고, 1905년에는 고조 광무제의 사촌 동생인 이재완을 수행하여 일본에 가서 훈장을 받고 귀국했다. 이병무는 1907년 이완용, 송병준과 함께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조 광무제를 알현하고 퇴위를 강요하였다. 1907년 이완용의 친일 내각에 군부대신으로 입각하여, 정미늑약 늑결로 군대 강제 해산을 주도했으며, 해산된 군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독립운동 탄압을 지휘했다. 1909년 군부가 폐지되고 친위부가 설치되자 초대 친위부 대신이 되었다. 1910년 시종무관장으로 경술늑약 늑결에 적극 협조하여 자작에 봉해졌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은 13일 ‘남부권 신공항’ 건설 재추진 논란과 관련, “명칭에 있어 특정 지역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박 위원장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비대위 전체회의에서 “‘신공항의 건설은 반드시 필요한 인프라이고 그래서 이것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지만, 지금까지 결정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밝혔다고 황영철 대변인이 브링핑을 통해 전했다.황 대변인은 그러면서 “신공항을 의미하는 것이지, 무엇을 붙이거나 입지를 말한 것이 아닌데 그 부분을 유념해 달라”고 덧붙였다.그는 “지역별로 편차가 있을 수 있는 부분이 있기에 전혀 결정된 것이 없었다”면서 “나라 발전에 필요하기 때문에 추진한다는 입장과, 앞으로는 신공항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설명했다.이주영 정책위의장도 “‘상세한 경제성 검토’ 차원이 아니라 동남권 신공항이라고 해서 정부가 검토했던 것이고 특히 동남권, 남부권 지역에서 제2관문 공항으로서 신공항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저희들이 검토하는 걸로 이해해 달라”며 “그러나 명칭에 대해 ‘동남권’이나 ‘남부권’이니 아직 검토하거나 결정하거나 한 바가 없다. 입지도 결정한 바 없다”고 강조했다. 김봉철 기자
하버드대학에서 개발하고, 미국 FDA가 승인한 ‘자가 골수를 이용한 줄기세포 치료술’(이하 스마트 줄기세포 치료술)이 지난달 2일 보건복지부로부터 치료 허가 승인을 받아 처음으로 국내 도입된다. 미용이나 성형 등 분야에서 줄기세포 관련 물질을 시술하는 사례는 있었지만 질병치료용으로 인정받은 시술 치료법은 이번이 처음이다.이번 도입되는 ‘스마트 줄기세포 치료술’은 환자의 엉덩이뼈나 대퇴골두에서 60~120㏄의 골수를 채취해 원심분리기에 넣어 줄기세포만 분리•농축하고 이 과정에서 연골 재생을 돕는 줄기세포•성장인자•단핵세포를 수집해, 이것을 환자의 손상된 연골 부위에 관절내시경이나 주사로 이식해주면 간단하게 끝나는 치료법이다. 특히 배양과정 없이 무균상태로 바로 시술하기 때문에 바이러스나 미생물에 의한 감염을 차단하고, 혈액 내 줄기세포를 사용하기 때문에 치료효과가 높다. 또 골수에 섞여 있는 적혈구, 백혈구, 혈장 등을 분리하기 때문에 줄기세포를 최대 96%까지 농축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뿐만 아니라 기존 무릎통증 치료술인 PRP(혈소판 풍부 혈장)주사 치료법과는 달리, 혈소판의 손상이 적고 높은 농축도를 보여주며,
밸런타인데이가 코 앞으로 다가왔는데 아직 남친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브리프케이스로 눈을 돌려보자. 남친의 평소 스타일과 업무 성격에 맞는 가방이라면 의미있는 선물이 될 것이다. 프랑스 패션 브랜드 루이까또즈는 남자친구의 활동 성향과 비니지스 방식을 고려한 센스있는 브리프케이스 선택법을 제안한다.■ 트렌드에 민감한 남친에겐 투톤백남성들의 패션감각은 날로 화려해지고 개성 있는 스타일이 늘어나고 있지만, 주말을 제외하곤 언제나 정장차림이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의 남친을 위해 고급스런 소가죽에 컬러로 포인트를 준 브리프케이스를 추천한다. 깔끔한 정장에 가방으로 포인트를 주려면 세련된 컬러와 고급스런 소재 선택이 가장 중요하다. 루이까또즈 브라운 코오스 서류가방은 소가죽을 사용하고, 트리플 컬러를 매칭해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수납공간이 넉넉하고 오랜기간 사용해도 한결 같은 멋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특징. 남성 선물용 가방으로 꾸준한 반응을 얻고 있는 스테디셀러다. ■ 잦은 미팅으로 바쁜 남친에겐 모노그램 패턴백 업무 특성상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이 많거나, 의상에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직종의 경우에는 밝은 색상과 디테일이 살아있는 스타일이 좋
‘소셜커머스 업계 No.1 쿠팡이 소셜커머스 전문인력 양성을 위해 나선다’쿠팡(대표 김범석 www.coupang.com)은 오는 24일까지 소셜커머스의 컨텐츠 제작을 책임질 전문 에디터 및 포토그래퍼 인턴 1기를 모집한다고 13일 밝혔다. 인턴 1기에게는 채용 후 3개월 수습 기간을 거쳐 능력에 따라 정직원 채용의 기회를 부여할 예정이다.이번 인턴 1기는 입사와 함께 총 21시간의 이론 및 실무 교육을 이수하게 된다. 9시간은 온라인 쇼핑의 성장과 소셜커머스의 탄생 과정, 특징 등 이론 교육을 거치며, 나머지 12시간은 취재 현장 동행 및 콘텐츠 제작 등 실제 소셜커머스 업무를 경험하게 된다. 실습 전 과정은 현장에서 직접 업무를 하고 있는 쿠팡 직원과 1:1로 진행되며, 제작한 컨텐츠는 쿠팡에 게재된다.소셜커머스 전문 에디터, 포토그래퍼는 최근 이커머스 시장의 핵으로 급부상한 소셜커머스 업계의 새로운 전문 직종으로 각광 받고 있다. 에디터는 판매하는 상품을 매력적인 컨텐츠로 포장해 상품 판매량을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하며, 포토그래퍼는 소비자에게 매력적이면서도 객관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정보를 이미지에 담아야 한다. 따라서 에디터는 신문기자의 취재, 잡지에디
조민희(趙民熙)는 경술국적 중 한 사람이며 이완용의 처남이다. 1885년 경과증광별시(慶科增廣別試)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뒤 평안남도관찰사, 평안북도관찰사(1899년)와 주불공사(1901년), 주미공사, 주일공사(1904년)를 지냈다. 1907년 평리원 재판장(平理院 裁判長)에 임명되어 헤이그 특사 사건을 처리하기도 했다.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勒結) 당시에는 고조 광무제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승녕부 총관(承寧府 總管)을 맡고 있었다. 1910년 경술늑약에 세운 공을 인정받아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의 작위와 은사금(恩賜金)을 받았고, 1916년 중추원 고문(中樞院 顧問)에, 1921년 중추원 개편 때는 참의(參議)로 임명되었다.
한훈(韓焄)은 청양에서 일어난 홍주의진 의병대에 가담하여 독립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을사오적 암살 계획 등을 세우다가, 여의치 않자 직산군수를 사살하고 간도로 망명했다.1910년 경술늑약 늑결 이후 다른 사람들은 한국에서 간도로 망명했지만, 그는 간도에서 만난 채기중과 의기투합하여 귀국한 뒤 풍기군에서 광복단을 조직해 한국에서 독립 운동을 벌였다. 한훈은 간도를 오가며 무기를 마련한 뒤 한국의 부호들에게서 반강제적으로 독립 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일을 맡았다. 광복단 조직은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과 통합하여 대한광복회로 확대되었고, 한훈은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1920년 미국 의회의 의원들과 그 가족들이 시찰단으로 한국에 들어왔을 때 대한 독립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사이토 마코토 총독 등 일본인 고관들을 암살하고자 광복단결사대를 조직했다가 김상옥의 집에서 김동순과 함께 체포되었다. 대한광복회 소속으로 부호 및 지방의 면장 등을 납치하거나 살해한 사실까지 드러나 징역 13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장건상(張建相)은 1916년 상해(上海)의 신규식(申圭植)으로부터 함께 일할 것을 희망한다는 연락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의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이후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는데 참여하여 교육을 지원하였고, 동제사를 확대 개편시킨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결성하는데 참여하였다. 동제사의 회원으로서 1917년 간도 안동현(安東縣)에 파견되어 영국상선 안동지사장 죠지 쇼우와 친교를 맺으면서 국내로부터 오는 김두봉(金枓奉), 김원봉(金元鳳)의 길 안내역을 수행했다. 김원봉과는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쌓으면서 의열단과 민족혁명당 창설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1919년 3월 3·1 대한광복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수립을 위한 지원단체인 한인거류민단의 국민대회 준비위원에 선출, 김규식(金奎植), 여운형,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임정 외무부(外務部) 외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임정의 외교활동을 수행했으며 여운형의 후임으로 임정 외무부 차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7월 1일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를 부활시키고, 대한적십자사 상의원(
여준(呂準)은 북간도로 망명하여 1906년 이상설(李相卨)·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박정서(朴禎瑞)·김우용(金禹鏞)·황달영(黃達永) 등과 함께 용정(龍井)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해 교포 자녀들의 항일민족교육에 힘썼다.1907년 4월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는 특사 이준(李儁)을 안내해 이상설과 만나게 했다. 1912년 가을 퉁화현 합니하(哈泥河)에서 허혁(許赫)과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해 이주동포의 자활과 교육을 맡아보았다. 1913년 신흥학교(新興學校)의 교장으로서 교감 윤기섭(尹琦燮), 학감 이광조(李光祖) 등과 학교의 발전에 전력을 다했다. 정안립(鄭安立)·박찬익(朴贊翊)·정신(鄭信)·류동열(柳東悅)·신팔균(申八均)·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 등 39인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1919년 남간도 교포들의 명의로 된 한국독립청원서를 중국정부를 거쳐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했다. 1919년 3월에는 박찬익 등과 지린 군사독판부를 조직해 단장으로 활동했으며, 상해임시정부의 인가를 얻어 설립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부독판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 12월 임시정부 간서총판부를 설치하고 총판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1921년 5월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