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날씨가 영하권으로 내려가면서 직장인과 학생들이 목도리, 장갑을 착용하는 사례가 늘었다. 특히 기온이 떨어지면 허리 건강에 별 문제가 없었던 사람도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여성의 경우 하의실종 패션을 좇다 찬 기온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요통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이유는 혈액순환 장애와 허리 주위의 근육이나 인대가 낮은 기온 때문에 수축되거나 긴장되기 때문이다. 평소 디스크 증상이 있었던 여성의 경우 압박이 가중돼 통증이 심해지거나 만성요통으로 악화되기 쉽다.최근 하의실종 패션 인기로 여성들이 즐겨 신는 굽이 높은 겨울부츠는 허리건강을 위협한다. 겨울철 굽 높은 부츠를 신게 되면 굽의 높이만큼 엉덩이가 뒤로 빠지게 되고 몸의 균형이 앞쪽으로 기울어지며, 몸은 균형을 잡기 위해 척추를 과도하게 앞으로 구부리면서 척추전만증이 생기게 된다. 심각한 경우 허리 관절에 염증이 생기고 허리디스크로 발병 가능성도 높아진다.특히 6㎝이상의 굽 높이에서는 허리 4번과 5번 사이, 허리 5번과 골반 사이의 디스크에 이상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골반이 앞쪽으로 쏠리면서 틀어지기도 쉬운데, 골반이 틀어지면 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척추도 전체적으로 틀어지
김익상(金益相)은 북경으로 가서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했다. 일제 총독 재등실(齋藤實)을 처단하기로 계획하고 폭탄 2개와 권총 두 자루를 받아 1921년 9월 10일 북경을 떠나 동월 11일에 한성에 도착 다음날인 12일에 전기 수리공으로 가장해 총독부에 잠입, 폭탄 2개를 투척하였으나 1개는 불발되고 하나만 폭발했다.거사 직후 피신하여 평양에 수일간 체류하다가 북경으로 돌아간 그는 총독부 투탄 거사가 성과를 보지 못하자 재거사를 결심하고, 의열단장 김원봉과 상의한 후 1922년 2월 상해로 가서 동지 오성륜(吳成崙)과 함께 같은 달 28일 오후 3시 30분경 상해 세관 부두에서 필리핀으로부터 상해에 도착하는 일본 전 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田中 義一) 육군대장을 향해 오성륜이 먼저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명중되지 않았고, 폭탄을 던지고 이어 육혈포를 연사했지만 안타깝게도 폭탄은 불발되고 탄환도 다나카에게 맞지 않았다. 중국 항무국(港務局)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고 일본영사관에 인도되었다가 일본 장기지방재판소(長岐地方裁判所)로 압송됐다. 동지 오성륜은 파옥,탈주했고, 김익상은 1922년 5월 5일 장기(長岐) 형무소로 압
여기서도 “아이고!” 저기서도 “아이고!” 이리 보고 저리 봐도...뵈는 것이라곤...온통 숨 뒤집어져가는 비명(悲鳴) 뿐이다. 시쳇말로, 지랄하고 자빠지는 것이 아니라...너도 나도 전부가 발광(發光)을 하고 있다. 이쯤이면...비가 때리 든...눈이 때리 든...한바탕 속 시원히 때려줬음 좋으련만...노트북을 연다. 언제였던가? 아마도 지난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경선이 끝난 무렵이었을 게다. 새마을당을 넘어 수많은 교집합 속에, 꼴통수구의 온실로 변해버린 한나라당을 뛰쳐나와 광야에 깃발을 세우고, 권력구조개편을 전제로 한 ‘헤쳐모여!’로...代를 이어 새로운 혁명역사를 쓸 것을 간곡히 청한 적이 있었다.누구에게 청했겠나?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반백년 골 깊은 이 서러운 동서단절의 강을 만들어 놓은 박정희와 김대중. 한편의 당사자인 박정희 대통령의 여식이자 영남민의 정서를 아우를 수 있는 박정희의 승계자 박근혜였다. 박근혜는 끝내 나의 청을 외면했다. 그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명박 정부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이는 박근혜 밖에 없다. 반드시 여당 속의 야당을 견지하라”고 권했다. 그리고는 “다가오는 지방선거전에는 반드시 MB사단이
혁신과통합의 이해찬, 문성근 상임대표와 민주당의 이인영 최고위원 등이 야권 통합정당 창당 시 39세 이하 청년층 남녀 두 명에게 당 최고위원직과 비례대표 의원직을 주는 방안을 선언했다. 이 방안은 문성근씨가 지난 지자체 선거 이후부터 주장해왔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이미 20대와 30대 유권자 층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야권이 이 방안을 추진한다면, 여권 또한 그대로 따라할 가능성이 높다. 30대 이하 세대의 공식적인 정치 참여 채널은 철저히 막혀있는 게 현실이다. 386세대가 30대였던 2000년 총선 당시 임종석, 송영길, 원희룡 등등이 대거 진출했던 것과 달리, 그대로 놔두면 2012년 총선에서조차 현재의 30대인 70년대생들의 국회 진출은 쉽지 않을 것이다. 즉 30대 이하 세대는 취약계층으로서 각 정당에서 배려를 해줘야만 국회에 진출할 수 있는 세대로 몰락했다는 것이다.정치권이 노리는 건, 2030세대의 참여가 아닌 오직 표그러나 20대와 30대의 투표율이 점차 늘어나면서, 이들의 표의 숫자만 보고, 당직과 공직을 나눠주는 방식은 의도와 다르게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 세대의 특성과 비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난 22일 국회에서 한미FTA 비준안이 통과된 후 야5당과 좌파 진영은 여의도, 광화문 등 서울 도심에서 막무가내 시위를 벌이고 있다. 경찰은 집회신고 없이 벌이는 한미FTA 반대 시위를 해산하려 하지만 야당 등은 ‘정당연설회는 집회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사실일까. 시민과 함께 하는 변호사들(이하 시변)에 자문을 구한 결과 “집회는 그 형식보다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시변 공동대표인 이 헌 변호사는 “일주일 동안 한미FTA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보여준 행동을 보면 누가 봐도 ‘정당 연설회’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실질적으로 집시법 적용대상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일단 야간집회가 불법이라는 조항은 헌법불합치 판정이 났으니까 논외로 하더라도 ‘정당 연설회기 때문에 집회신고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건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설명했다. 다른 법률 전문가는 백 번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도로를 점거해 교통을 방해하는 것까지 정당연설회라고 주장하는 것은 누가봐도 억지라고 지적했다.한편 지난 26일 박창덕 종로경찰서장을 폭행한 시위대와 참가자 등이 ‘경찰이 왜 거기에 정복을 입고 들어오느냐, 자작극 아니냐’는 음모론 제기도 ‘집회 및 시위에
이광민(李光民)은 1915년 백부인 이상룡(李相龍)을 따라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한 뒤 봉천성(奉天省) 류하현(柳河縣)에 있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수료했다.이듬해 봉천성 통화현(通化縣) 삼도구(三道溝)에 있는 동화학교(東華學校)에서 교원으로 재직하면서 청소년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24년 7월 10일 1923년에 개최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가 개조파와 창조파로 양분되어 결렬되자 창조파에서는 연해주 해삼위(海蔘威)를 기반으로 이곳에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정부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연해주 내의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하여 추방당하고 중국 동삼성에 진출한 신숙(申肅)·윤해(尹海) 등과 양기탁(梁起鐸)·편강렬(片康烈)은 이장녕(李章寧)·박관해(朴觀海)·이청천(李靑天)을 설득하여 전만주통일의회 주비회 발기회(全滿洲統一議會 籌備會 發起會)를 조직하였는데 이광민은 군정서(軍政署) 대표 중의 한사람으로 참가하여 협의하였다. 1926년 1월 정의부(正義府) 중앙총부에서 내정과 외부 조직을 확장하려고 동삼성 각지와 국내에 위원을 파견하여 군인과 군자금을 모집할 때 파견되었으며 1926년 10월 24일 정의부 중앙위원 11인 중 한사람으로 선출되었으며
최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에 등재 신청한 한산모시짜기, 줄타기, 택견이 지난 28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제6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등재가 최종적으로 결정되면서, 국내뿐만이 아닌 외국에서도 한국 고유의 전통을 담은 제품들이 고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그 중 특히 전통섬유재료인 한산모시가 패션 명품으로 변신을 시도해 고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기존 한복이나 이불 등으로만 사용되던 모시가 일상생활 속에서 스타일 있게 입을 수 있는 패션 의류브랜드로 자리매김하면서 소비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모시의 장점을 부각하고 단점을 보완함으로써 고객들의 접근을 높이고, 대중성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또 국내는 물론 미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쿠웨이트, 두바이, 호주, 유럽 등 해외에도 수출을 시작 하면서 세계인에게도 인정받고 있다. 실제로 한산모시 RIS 사업단(한산모시 RIS사업단장 홍영기)은 직물 원단을 섬유원단 전문수출업체를 통해 수출하고 있으며, 규모는 연간 176만달러(약 18억)에 이른다.모시는 천오백 년 전부터 왕과 귀족, 평민에 이르기까지 두루 애용됐던 대표적인 옷감으
권준(權晙)은 1917년 광복회(光復會)조직에 참여하여 격렬한 대한광복운동을 전개하다가 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했다. 1921년 북경(北京)에서 김원봉(金元鳳)과 같이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군자금 조달과 폭탄 제조 등의 임무를 맡아 종로경찰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의 폭탄 투척과 동경 이중교(二重橋) 투척 등을 적극 지원했다. 1926년에 쑨원이 세운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수료하고 북벌전(北伐戰)에 참전하여 활약하기도 했다. 1926년 한구(漢口)에서 개최된 한국, 중국, 인도, 몽고, 안남(安南), 대만인 등으로 조직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집행위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1932년 남경(南京)에서 중국 정부의 후원을 받아 한국인군사학교를 설립하고 그 교관으로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입당하여 활약했다.1934년 중국군 연장(連長)으로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면서 항일전에 참전했다. 1944년 중경(重慶)에서 임시정부에 들어와 내무부 차장에 임명돼 활약하였다.
대한민국의 격동기라고 할까!1955년에서 1963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가 약720만 명에 이른다고 하니 적은 숫자가 아니다.이 세대가 70-80년 한국 경제를 부흥시키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였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끌은 주역들이다.고난의 시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과 못 다한 인생의 보람을 자식에게나마 다 쏟아 넣느라 진작 본인의 미래를 잊고 살아온 세대이다.어찌 보면 가시나무 새와 같은 인생을 살아온 역정이다. 한 마디로 나를 잊고 국가의 미래를 위한 희생 세대라고 하면 정답일 게다.이런 세대가 지금 정년을 맞이하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다는 기사를 보면 보통문제가 아닐 성 싶다.한 마디로 국가를 위해 뭐? 주고 자식을 위해 뭐? 을 몽땅 주고 나니 지장보살이 되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이다.호강에 젖어 양 강에 초 친다는 호남 지방의 우수 개 소리처럼 20-30대는 대학을 나오고도 실업에 지쳐있다.이들의 분노는 보궐선거 마다 야당에 표를 몰아주었다. 정작사회의 공로자격인 베이비 붐 세대는 어찌해야 좋을 것인지 고민 중이다.그 동안 애국하는 자세로 묵묵부답으로 지냈다고 하나 미래가 불안정한 작금에 와서는 누가 가장 복지정책을 잘 이행할
신숙(申肅)은 1907년 대한제국 탁지부 인쇄국에서 근무하면서 김남수(金南壽)·김남규(金南奎) 등과 함께 청파동에 문창학교(文昌學校)를 설립하고 육영사업에 진력하였다. 1909년 친일행각을 펼친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 처단을 계획하였으나 일제의 감시가 삼엄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으며, 이후 천도교 대구 대교구장을 지내는 등 천도교에서 활동하였다. 3·1 대한광복운동 직전에는 독립선언서의 교정과 인쇄작업을 맡았으며, 3·1 대한광복운동 이후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20년 4월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상해로 망명하였고 천도교 상해전교실을 설치하였으며 천도교 이념에 바탕을 둔 통일당(統一黨)을 조직하였다. 1920년 9월 북경으로 가서 군사통일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군사단체의 통일과 무장독립운동 노선을 주장하였다.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에 창조파 대표로 참여하여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국민대표회의가 해산된 뒤 창조파는 국호를 한(韓)으로 하는 국민위원회 정부를 세웠으며 내무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톡·길림·하얼빈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1927년 이도하자(二道河子) 부근의 송봉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