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金弘集)은 1880년 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고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지고 돌아와 예조 참판으로 승진했으며 통리기무아문의 통상관계를 전담하는 당상경리사(堂上經理事)에 발탁되었다. 1882년 3월과 5월 미국·영국·독일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 때 전권대신들의 부사(副使)로 협상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마건충(馬建忠)을 상대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의정·조인했다. 1894년 7월 군국기무처가 신설되자 영의정 겸 군국기무처 총재관에 임명되어 내정개혁을 추진했다. 총리대신으로 제1차 갑오개혁을 주도하면서 과거제 폐지, 은본위제의 신식화폐제도 채택, 의정부와 궁내부의 관제 시행, 도량형제도의 채택 등의 개혁을 단행했다. 내무대신 박영효와 연립내각을 수립하여 홍범14조를 발표하고 제2차 개혁을 주도했다. 의정부를 내각으로, 각 아문은 부(部)로 개편하여 군제개혁·재정개혁을 시행했다.
김규식(金奎植)은 1919년 1월 파리에서 1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의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자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대표로서 회의에 참석했다. 1919년 3월 파리에 한국대표부를 설치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고한민족의 주장·대한국의 광복과 평화 등의 인쇄물을 출간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일제의 불법 침략과 한민족의 대한 광복에 대한 당위성을 널리 홍보했다. 김규식은 1919년 8월 미국에 구미위원부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지냈으며 1920년 10월 중국 상해로 돌아와 임시정부의 학무총장을 맡았다. 1932년 11월 남경의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으며, 1935년 6월 민족혁명당 주석으로 선임됐다. 1942년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연합전선이 형성되어 임시정부가 강화되었고 1942년 10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선전부장에 선임되었으며 1944년 2월 임시정부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8·15 대한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의 선발대로 1945년 11월 23일 귀국했으며 12월말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둘러싸고 민족 내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가 없자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고 12
[더타임스 장지연 칼럼니스트] 8.24 후 폭풍이 여의도 정가에 무섭게 요동치고 있다. 오세훈 시장의 조기 사퇴로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가시화 되면서 여야가 초비상 사태로 접어들고 있는 가운데 한나라당은 주민투표 패배에 대한 책임론 에 휩싸이고 있다.그 폭풍의 핵 가운데 박근혜 전 대표가 서있다. 벌써부터 보수 논객들은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비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보수논객의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인 조갑제 대표는 [조갑제 칼럼]을 통해 ‘한나라와 박근혜의 기득권을 부숴라’는 주제로 한나라당과 박 전 대표를 싸잡아 비난했다.그는 “8.24 서울시 주민투표는 형식상으론 오세훈 서울시장의 패배로 끝났으나 진정한 패자(敗者)는 한나라당과 박근혜 전 대표이다.”고 못 박았다. 조 대표는 “투표 참여자들은 학력, 교육, 재력 등 여러 면에서 서울의 중심세력이며 여론 주도층이다. 보수의 핵심이다. 이들이 한나라당과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하여 느끼는 배신감이 폭발하면 한나라당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것이고, 박(朴) 대표 獨走(독주)의 大選(대선)구도는 근본적으로 흔들릴 것이다.”고 박근혜 전 대표의 앞길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대표적 보수 인사인 이동복
2010년 8월 15일 국민대표 33인은 사단법인 만남이 주최하는 나라사랑 국민행사에서 세계 각국의 대사와 사절단이 함께한 자리에서 조국통일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날 행사는 민간단체가 주관한 8.15 광복절 행사로 1박 2일에 걸쳐 진행 됐고 이곳 행사장을 다녀간 사람만 10만 여명이 넘는 다는 언론 보도도 있었다. 사단법인 만남이 임진각과 통일전망대에 조국통일 선언문 비석을 설치했다. 이를 두고 보수 기독교 단체 목사들과 모 기독교 보수언론은 ‘광복의미를 훼손하고 있다’며 대서특필했다. 조국통일 선언문의 내용이 사단법인 만남의 이만희 명예회장과 신천지 예수교의 교리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광복이라는 말은 ‘빛을 회복 한다’. 또는 ‘빛으로 회복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빛은 모든 색을 담고 있어 사물을 명암을 밝히고 색의 특성을 알려준다. 언론은 사회의 빛과 같다. 그러나 특정단체나 자기만의 사상이나 편집 방향, 이익에 치우칠 때는 색깔이나 어둠이 되는 것이다. 70-80년대에 보수 기독교단체를 대표하는 한기총은 정치인 김 모씨와 정치목사들이 하나 되어 삼선개헌 통과와 새로운 국론 형성을 위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만들어졌다. 태생부터 국론통일이
[더타임스 여동활 칼럼니스트]오세훈 서울시장의 주민투표 무산여파로차기 총선 수도권 전멸 가능성이 제기되자 한나라당에 초비상이 걸렸다.누가 오 시장의 주민투표 무산에 책임을 박근혜 전 대표에게 돌리는가?얼치기 보수들은 박 전 대표가 오 시장을 도와주지 않아 주민투표가 무산됐다고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다.한쪽에서는 주민투표가 무산됐다고 박 전 대표를 비판하고 홍준표 대표는 오 시장이 승리했다고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지금 제 정신인가? 지난 4년동안 한나라당은 국민을 위해 과연 무었을 했는가?그동안 한 일이라고는 4대강과 박근혜 전 대표 죽이기 밖에 더 있나? 보수언론들도 정권에 편승하여 권력에 대한 견제역할보다는 권력에 아부하며 장단맞춘 결과 오늘의 비극을 초래하였다권력에 편승한 얼치기보수들아, 대답해보라. 박근혜 전 대표를 제외하고 이 난국을 타개할 대안이 있나?대안이 없으면 더이상 사회불신 조장하지 말고 무덤같은 침묵을 지켜라,이미 대기업에서는 한나라당의 미래를 낙관하지 못하는 상황이다.주요부서에 벌써 운동권의 인사들을 포진시키고 있다는 소문도 자자하다.한나라당 친이계들에게 묻겠다,그동안 민심을 제대로 돌아본 적 있는가?작금의 상황을 초래한 모
24일 치러진 서울시의 무상급식 투표에서 오세훈 시장은 처참하게 패배했다.애써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25% 넘었으니 승리라 주장하는 궤변은 자리를 의식한 가식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홍대표의 말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물론 청와대의 레임덕을 걱정하는 면도 있지만 이번 사안은 사퇴 결정을 빨리 하면 할수록 좋다.한나라당 주장처럼 오시장이 10월에 서울시장직을 사퇴하면 내년 4월까지 공석이 되어 행정상의 공백은 물론 내년 총선과 대선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아주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특히 총선까지는 현재의 민심흐름에 따라갈 공산이 크지만 대선이라도 건지려면 빨리 사퇴를 결정해야한다.어차피 민심의 흐름은 뉴라이트와 대형교회와 강남 기득권층으로 대표되는 현 정권과 오시장지지 기반에 대하여 정반대의 의사표시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부자 증세를 주장하는 워런 버핏이나 프랑스 부자들과 달리 자신들만의 이익에 몰두하는 이기주의적 집단은 도적떼에 비견될 정도로 민심이 험악해진 것이 사실이다.합리적인 보수, 인간적인 보수, 기초 복지에 너그러운 보수를 국민은 원하고 있음이다. 짝퉁, 사이비, 친일매국단체가 겉만 우파로 위장, 분장하고 몇 년 대한민국을
궤변과 일부 기득권층의 이익집단에 불과한 짝퉁우파 시대는 끝났다.오세훈 서울시장이 직을 걸고 실시한 무상급식 투표는 25.7%라는 최종 결과로 개함도 못하고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만큼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쇼셜네트워크에서 소통되는 민심의 흐름변화도 모르면서 과대 망상적으로 자신과 지지층을 과신한 탓이다.오시장의 실패는 어쩌면 엄청나게 변화하고 있는 민심흐름의 하나를 입증시켜준 것이기에 필자는 이미 이를 예견하고 칼럼으로도 경고했던 일이었다.현 정권의 실체는 야당에서 보수우파라 하나 이는 잘못 보고 있음이요, 알면서도 정통보수우파마저 뭉뚱그려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우파마저 도매금으로 폄훼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일 뿐이다. 그 결과 사이비, 짝퉁우파가 합리적이고 건전한 정통우파마저 죽이고 있는 상황이다.그러나 지난 대선에서 국민 대다수는 윤리, 도덕성에 엄청난 하자와 결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경제만 살려주면 된다는 흐름이 지배적이었기에 일본 극우와 비슷한 역사인식을 가진 뉴라이트라는 단체와 일부 대형교회가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움직인 짝퉁우파를 몰라보고 선거를 치름으로써 부패한 시대는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것을 알아차리기에 국
이동녕(李東寧)은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1898년 이종일이 경영하는 제국신문에 사설을 집필했다.1902년 이상재와 손잡고 YMCA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양기탁, 신채호, 조성환과 같이 청년회를 조직한 뒤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며 김구, 이회영을 알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늑결되자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1906년 북간도로 망명, 이상설과 함께 한국 최초의 해외 사립학교인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 한국동포의 2세의 민족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대한광복운동의 기수들을 길러냈다. 이 때 이상설이 2명의 특사와 함께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가자 한때 귀국하여 안창호 · 전덕기 · 양기탁 · 이동휘 · 이갑 · 유동열 등 동지들을 모아 신민회를 조직했다. 이동녕은 안창호 · 이회영과 협력하고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 공립협회와 대한매일신보의 조직과 발행을 지원하였다. 한편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설립함에 있어서도 크게 조력하였다. 삼원보에 망명하여 이석영 · 이철영 · 이회영 · 이시영 형제 및 이상룡과 함께 한국인 자치기관인 서로군정서를 설립하고 교포들의 신분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이동녕은 이상
미국 유학생 신분이던 안창호(安昌浩)는 1905년 한인친목회를 발족시켜 한인공립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제에 강탈당하자, 1907년 귀국하여 대한국인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는 애국 계몽 운동 외에도, 1909년 김좌진·이갑(李甲) 등과의 서북학회 창립을 했다.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신민회, 대성학교 설립 등을 위해 서울과 평양 등에서 여러 차례 연설을 했으며 탁월한 웅변력으로 수천 인파의 마음을 사로잡곤 했다. 1907년 2월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의 초청연사로 초빙되어 강연했다.1908년 안창호는 대성학교를 평양에 설립하였고 1909년 청년학우회의 창설에 가담했다. 191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의 중앙 총회 조직에 참석하고 국민회 초대 총회장에 선임했다. 신한민보(新韓民報)를 발간하고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창립하고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고 이어 국무총리 대리에 선출했다. 대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우선 인재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며 인재 육성과 실력
한나라당이 잘못된 판단으로 깊은 수렁으로 계속 빨려 들어가고 있다.부자 아빠를 둔 50%의 아이들에게는 당분간 급식비를 걷어야한다며 금시초문의 투표까지 걸고, 게다가 간신히 얻은 시장직마저 헌신짝 버리듯 당과 상의도 없이 도박하듯 오세훈 서울시장은 올인하고 있다. 그야말로 물귀신 작전이 따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3.3% 이상의 투표참여율을 달성하기에는 누가 보더라도 힘들다고 본다. 작년 6.2 지방 선거 때 오시장이 얻은 표는 208만 6127표로 25.4%에 머물고 말았다. 때문에 이번 선거에서는 279만 표를 넘어야 33.3%를 채울 수 있다. 유권자 수는 정확히 279만5760명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측은 휴일도 아닌 평일에 이루어지는데다 관심도 적기에 이 수치를 채우기 힘들다 보고 있다. 아니, 이승만 시절 사사오입으로 억지 부리다 정권마저 무너져 내린 수치에도 근접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러한데 여당의 홍준표 대표와 나경원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친이계에서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는 명분 약한 선거에 깊숙이 관여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출구전략마저 없이 홍 대표는 33.3%를 넘지 못하면 민주당 책임이라는 궤변으로 미리 결과를 예측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