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효(朴泳孝)는 1870년대 중반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개화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으며 유대치를 중심으로 김옥균·홍영식·서광범 등 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정치적 혁신을 부르짖고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고자 했다.1882년 제물포 조약에 따른 사과 사절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태극(太極) 문양과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四卦) 도안의 조선, 대한제국의 국기 태극기(太極旗)를 처음 그려서 사용했다. 1882년 음력 12월 19일 한성부판윤으로 임명되었다. 1883년 음력 3월 17일 광주부(廣州府) 유수로 발령을 받았다.개화당 요인들과 협의하여 1884년 음력 10월 17일 우정국 청사의 낙성연(落成宴)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내각이 조직될 때 친군전후영사(親軍前後營使) 겸 좌포장(左捕將)이 되어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정변이 실패하자 역적으로 몰려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더타임스 장지연 칼럼니스트] 요사이 언론에 회자되고 있는 문재인의 운명론이 정치권의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야권의 유력 대선후보와는 달리 정치현장과 동떨어진 거리에서 비교적 조용히 활동하고 있는 문재인 노무현재단이사장이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에서 높게 나타나자 이미 정치권에서는 그의 대선출마를 기정사실로 받아드리고 있는 분위기다.문재인 이사장이 급부상하면서 그의 운명에 대한 분석들이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잇는 가운데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운명론도 함께 등장하고 있다.그 이유는 박근혜 전 대표나 문재인 이사장이 정치권에서 비교적 조용한 행보를 보여 온데 비해 두 사람 모두 지지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는데 있다. 필자는 서로 말 수가 적은 이 두 사람의 운명이 각기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주변 환경과 맞물려 그 명암이 바뀔 가능성이 클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우선 박근혜 전 대표의 경우 여야 통틀어서 차기 대선주자 중 압도적인 지지율로 1위를 달리고 있지만 8월 24일 실시되는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의 결과에 의해 순항을 하느냐 거친 파도를 만나냐에 대한 운명이 결정되어진다.만일 오세훈시장이 무상급식에 실패를 거둘 경우 박 대표는 대세론과 함께 비교적 손
[더타임스 이종납 편집장] 지난 40여년간, 태평전쟁희생자를 위한 대일보상청구권을 요구하는데 청춘을 다바쳐 일해온 양순임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장은 지난 4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빠졌다. 지난 4월 당시 ‘양순임 회장이 유족회원 3만여명으로부터 받은 수십억원의 회비를 편취했다’며 조만간 경찰에 구속될 것이라는 기사가 주요언론에서 일제히 보도됐다.양 회장은 사건 이후 지난 3개월 동안 사실과 다르다며 제대로 반론한번 펴 보지 못한채 전전긍긍해 왔지만 결국 진실은 밝혀졌다.당시 사건은 일부 언론이 전후사정을 외면한채 지나친 한건주의에서 빚어진 오보였고 유족회와 잠시 관련했던 일부 인사들의 욕심이 빚어낸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일단락되었다.양 회장은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의 경찰 수사를 충실이 받아 의혹과 혐의를 완전히 벗어난 상태다. 양순임 회장은 3개월동안 괜한 오해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태평양전쟁유족회 활동이 위축되거나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 말하며 “이번 사건을 통해 태평양전쟁 유족회를 말살하려는 일본우익단체와 정부내 역사왜곡세력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토로했다. 양 회장은 특히 이번 사건을 계기로
김옥균(金玉均)은 1877년 의관 유홍기를 통해서 역관 오경석이 가져왔던 서적을 입수하여 탐독하였고, 박규수·유홍기·오경석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을 습득하였으며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과 함께 개화당(開化黨)을 이루어 그 지도자가 되었다.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박정양, 홍영식 등과 함께 일본 제국을 시찰했고,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굳혔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고문 겸 부사로서 일본에 다녀온 뒤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하였으며, 개화독립당을 조직하였다. 저서 치도약론을 집필하였는데, 도로 정비에 관련된 내용으로서 치도국 설치, 기술자 양성, 기계 구비, 오물 처리법 등을 포함한 17개 세목의 내용을 논하였다. 인민평등, 문호개방 등 개혁을 단행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 사대당의 중심 인물을 숙청하는 등 정변을 주도하여 당시 신정부의 호조 참판 겸 혜상공국 당상(惠商公局 當上)에 취임했다. 그러나 정변이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오는 8월 7일 전역을 앞둔 다이나믹듀오의 제대 이벤트에 대한 팬들의 반응이 뜨겁다. 2009년 입대전 마지막 무대를 예비군들과의 퍼포먼스로 꾸몄던 것에 맞춰 이번에도 역시 예비군들과 함께하는 전역 이벤트를 준비중이다.소속사 아메바컬쳐 관계자에 따르면 “다이나믹듀오 제대와 관련해 팬들의 문의가 굉장히 많았다. 이에 다이나믹듀오의 이미지에 맞고, 팬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이벤트를 기획하다 이번 전역 이벤트를 준비하게 되었다. 이벤트 공지이후 전역일이 일요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약 300여명의 팬들이 참여 신청을 할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라고 전했다.다이나믹듀오는 2009년 입대후 국방홍보원 홍보지원대로 활동했다.제대후에는 다이나믹듀오 10주년 기념 앨범 작업을 준비한다고 한다.
한 여름 서점가를 뜨겁게 달구는 ‘이태석 열풍 그의 이름은 사랑이었다마치 아프리카와 같이 뜨거운 여름날에 고 이태석 신부를 향한 사랑의 열기가 뜨겁다.서점가에 열풍으로 번지고 있는 고 이태석신부 관련 책들의 이야기이다. 작년 이태석 신부의 선종 이후 상영되어 수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던 ‘울지마 톤즈’ 신드롬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인터넷 교보문고 종교부문 베스트셀러의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책들을 보면 이런 현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작년 10월 출간된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이태석 지음 / 생활성서사) 는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 오다 최근에 증보판을 내면서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책은 한 이태석 신부의아프리카 사랑 이야기이다. 장래가 보장된 의사의 길을 버리고 사제가 되어 아프리카로 떠난 청년 의사 이태석. 그가 암으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8년여 동안의 가슴 뭉클한 삶의 기록을 이태석 신부의 담담한 필치로 담아냈다. 가난을 부유함으로, 고통을 기쁨으로, 척박한 땅을 비옥한 땅으로 바꾸어 줄 수는 없지만, 그 가난과 고통을 함께하며 살고자 떠난 곳에서 만난 지구 반대편 이웃들의 삶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점이
이상재(李商在)는 1881년 박정양(朴定陽)이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으로 일본에 갈 때 수행원이 되어 도일(渡日), 동행하였던 홍영식(洪英植)·김옥균(金玉均)과 깊이 사귀었다. 1884년 우정국 총판(郵政局 總辦)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主事)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다가,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駐美公使)에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 박정양이 내무 독판(內務 督辦)이 되자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경연 참찬(經筵 參贊)이 되었고, 학무아문 참의(學務衙門 參議)로 학무국장(學務局長)을 겸임하면서 신교육령(新敎育令)을 반포하여 실시하였다. 1895년 학부참사관(學部參事官)·법부참사관(法部參事官)을 지내고, 1896년 국어학교 교장·내각총서(內閣總書) 및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을 거쳐 의정부(議政府) 총무국장이 되었다.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였다. 1905년 의정부참찬(參贊)에 임명되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을 준비하였다.
서재필(徐載弼)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에 가담하였고 전영(前營) 정령관(正領官)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1885년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1893년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1894년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1895년 12월에 귀국하였으며, 1896년 1월 중추원(中樞院) 고문에 임명되었다. 서재필은 1896년 4월 정부 예산을 얻어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고 모화관(慕華館)을 인수·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프랑스의 에투알개선문을 본뜬 독립문(獨立門)을 세웠다. 펜실베이니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다가 3·1 대한광복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대한제국 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국친우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을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규탄하였다.
1870년경 개화사상가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 들어가 과거 준비를 하던 유길준(兪吉濬)은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읽은 후 과거를 포기하고 실학과 중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에 관한 책을 탐독하게 되었으며 1877년 2월 박규수가 병사한 후 김윤식(金允植)과 함께 시인(詩人) 강위(姜瑋)의 지도를 받으면서 온건개화파가 되었다. 1882년 10월 13일 박영효를 수신사(修信使)로 하는 사절단(使節團)은 3개월간 일본의 각 기관을 시찰하고 지도자들과 만났을 뿐만 아니라 각국 사절과도 폭넓게 접촉하여 의견을 교환했다.유길준은 사절의 통역을 맡아 활약했다. 외아문 주사(外衙門 主事)를 지내고 한성부에 신문국(新聞局)을 설치하고 신문 발간을 도왔다. 보빙사(報聘使)의 수행원이 되어 미국의 각 기관을 시찰한 뒤 정사(正使) 민영익(閔泳翊)의 허락으로 유학생으로 남았고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으로 가 E. S.모스에게 8개월간 개인지도를 받고 바이필드의 더머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며 유럽 여행 후 1885년 12월 16일 인천에 도착했고 1895년 서유견문(西遊見聞)을 발간하였다. 일본에 있던 유길준은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고조 광무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정미늑약이 늑결되었다는 소식
이시영(李始榮)은 1887년 형조좌랑 등을 거쳐 1888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와 경연청 서연관(書筵官)을 지냈다.1892년 이후 홍문관교리·홍문관수찬, 승정원 부승지 등을 지냈다. 이후 승정원 우승지, 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의 부제조(副提調), 이후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 궁내부 수석참의 등을 지냈으며 1905년 외부 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이 되었고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반대하였다. 1907년 중추원 칙임의관(勅任議官), 1908년 법부(法部) 민사국장(民事局長), 한성부재판소 소장, 한성고등법원 판사 등을 지냈다. 1909년 대한제국 법부 법률기초위원이 되었다. 1910년 8월 남간도의 유하현 추가보(柳河縣鄒家堡)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다. 1911년 4월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露天群衆大會)를 열어 경학사(耕學社)라는 자치단체를 창설하고 이상룡을 사장에 추대하여 일면 민생(民生), 일면 교육(敎育)이라는 두가지 목표를 내걸고 이주 동포들의 정착과 농업생산을 지도하였다. 1912년 일제 밀정의 감시를 피해 신흥강습소를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