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찬(林炳瓚)은 1912년 9월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의 밀명을 받아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으로서 일본 정부와 총독에게 일제의 대한제국 불법 침략을 지적하고 국권 반환을 촉구하는 요구서를 보내고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비밀리에 대한광복운동단체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하였다. 임병찬은 임응철(林應喆) ·이인순(李寅淳)·곽한일(郭漢一)·전용규(田瑢圭)와 협의하고 1912년 12월 독립의군부 조직을 전라남북도로 확대하였으며 1913년 2월 임병찬은 전라남북도 순무총장(巡撫總將) 겸 사령장관에 임명되었다. 1914년 본부를 서울로 옮기고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하였으며 대한독립의군부로 개칭하였다. 총사령(總司令)에 추대된 임병찬은 조직을 개편하여 중앙원수부(中央元帥府) 아래에 병마도총장(兵馬都總長)과 참모총약장(參謀總約長)을 두고, 한성·강화·수원·개성·광주에 5영(五營)을 설치하였으며 각 도·군 단위의 조직을 완성하고 대표를 선정하여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고 1914년 5월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신규식(申圭植)은 1902년 보병 부위(副尉)까지 진급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지방 진위대(鎭衛隊)와 연결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했고 1907년 군대해산 후 윤치소(尹致昭)·신창휴(申昌休) 등과 함께 광업회사를 발기하고 실업계를 계몽하기 위해 월간지 공업계(工業界)를 창간했으며 1901년부터 문동학교(文東學校),중동학교(中東學校),청동학교(淸東學校)에 관여하여 교육활동을 하는 한편,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등에 참가했다.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쑨원이 이끄는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가맹, 10월 우창 의거에 참가했다. 1912년 5월 망명자들과 상하이 교민이 늘어가자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다. 동제사(同濟社)에는 박은식·김규식·홍명희·신채호·조소앙·문일평·여운형·장건상 등이 참여했는데 회원이 300여 명에 이르렀고 중국 상하이 본부 외에 베이징·톈진과 간도·연해주·구미·일본 각지에도 지사를 설치했다.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함께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발기하고, 환구중국학생회에 가입했다. 한인학생의 중국 및 구미의 각급학교 진학을 위한 예비교육기관으로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고, 군사교육을 위해서 약 1
지난 7일,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사진전 전시장에 강남구 초중고 학교장과 장학사 60여 명이 전시 관람을 하고, ‘환경 교육의 중요성’이라는 주제의 강연에 참석했다.이날 전시 관람은 경기고 최동환 교장, 동덕여고 전상룡 교장, 반포고 장춘길 교장, 방배중 이명호 교장, 양재초 김문숙 교장 등 60여 명의 학교장 및 장학사가 참석했다.행사는 최연하 큐레이터의 작품 해설, 강남교육지원청 박순만 교육장의 인사말, 환경재단 최열 대표의 ‘환경 교육의 중요성’이란 주제의 강연, 영상을 활용한 환경 교육 시연회로 치러졌다.특히, 이번 전시 관람에 참석한 박순만 교육장은, “환경적인 요소가 많은 이 사진전을 감상하고, 아름다운 지구를 어떻게 지킬까 생각하고, 작게라도 생활방식을 변화시키는 기회가 될 것 같다”고 밝혔으며, “닉 브랜트(아프리카 동물을 찍는 사진작가)의 작품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고 이러한 사진을 통해서라면 아이들에게 좀 더 환경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울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했다.한편, 닉 브랜트는 아프리카 동부의 사라져 가는 동물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사진작가로, 멸종 위기에 처한 코끼리 사진으로 유명하다. 한국 관객에게 아시아
김동삼(金東三)은 1907년 안동에서 류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과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세웠으며 1909년 박중화(朴重華)와 함께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조직하여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한성의 양기탁(梁起鐸) 등 신민회(新民會) 간부들과 회합하여 독립운동기지 설치와 독립군 양성을 협의했다. 1911년 남간도 류허 현에서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윤기섭(尹琦燮)과 함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조직하여 한인들의 민생과 교육, 군관 양성에 노력했다. 1913년 여준(呂準)·이상룡과 함께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했으며, 류허 현의 밀림에 백서농장(白西農場)을 개설하였다. 1918년 길림성 왕칭현에서 서일(徐一)·여준·김좌진(金佐鎭) 등 39명이 민족대표로 서명한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후 한족회(韓族會)를 결성하고 서무부장에 취임했으며, 남간도 독립운동의 총본영으로 군정부를 조직했으며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참모장으로 독판(督辦) 이상룡을 보좌했다. 1922년 요령성 싱징현에서 통군부(統軍府) 조직을 주도하고 교육부장을 지내다가, 통의부(統義府)로 조직이 개편되자 위원장에 뽑혔다
1894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한 이승만(李承晩)은 1895년 미우라 일본 공사가 명성황후를 살해하자 이를 보복하기 위한 사건에 관계되어 지명수배를 당했으나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 후 서재필(徐載弼)이 주도한 독립협회(獨立協會) 간부로 활동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했으며, 협성회보(協成會報)의 주필로 활동하고 1904년 고조 광무제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가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저지를 호소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승만은 1910년 일제의 불법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에 의해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이 되자 귀국하여 대한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후진 양성에 힘썼다.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같은 해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4년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건너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하여 대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미국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독립외교론을 주장했다. 이승만(李承晩)은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선임되었
이회영(李會榮)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늑결되자 1906년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안태국(安泰國)·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을 책임자로 삼아 동지 획득과 한인 교육에 주력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늑약 늑결의 강압성을 폭로하려는 계획을 세워 고조 광무제에게 건의하고,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을 간도로 파견했다. 동지들을 평양 대성학교, 안동 협동학교, 정주 오산학교에 파견하고,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했다. 1909년 양기탁(梁起鐸) ·김구(金九)·이동녕·주진수(朱鎭洙)·안태국·이승훈(李昇薰)·김도희(金道熙)와 신민회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간도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하고, 류허현 삼원보 추가가(鄒家街)로 건너가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과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했다.1911년 최초의 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1912년 퉁
김구(金九)는 1896년 미우라 일본 공사에게 살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여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조 광무제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1910년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였고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한인애국단을 조직,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남경에서 장제스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일본 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1940년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조직인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그 사령관에 이청천(李靑天)을 임명하였다.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고,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했으며 1944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다시 선임되었다. 1945년 8·15 대한 광복으로 귀국하였는
[더타임스 여동활 칼럼니스트] 이번 7.4 한나라당 전당대회를 통해 나타난 결과를 놓고 보면 호남은 계파를 초월하여 한나라당의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다,이번 경선에서 친이재오계는 마지막까지 향후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희룡 후보를 교두보로 만들기 위해 엄청난 물량공세를 펼쳤다. 선거인단과 대의원들에게 엄청난 스팸을 날리고 직접 전주와 광주에는 캠프를 설치했고 원희룡 캠프 관계자들은 마치 한나라당에서 원 후보를 지지하는 것처럼 전화홍보를 강행했다.직접 확인한 사항이기도 하지만 다른 후보측에서는 무척 부러워했다는 후문도 들리지만 그 홍보요원 꽤 많은 욕도 먹었으리라고 본다.이같은 엄청난 물량공세에도 불구하고 원 후보가 참패한 이유는 바로 친이재오계들의 준동에 대한 한나라당원들의 싸늘한 시선이었다,바로 넘치는 것은 부족함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호남지역의 선거인단 참여율이 저조한 것은 지난 경선 때 친박성향 지지자들을 대량 제거시킨 결과이기도 하다.이들은 친박지지자들에 대한 성향을 분석하여 선거인단에서 제외시킨 이후 호남에서는 한나라당에 대한 불신이 최악에 달했다.대의원 구성 역시 지난 경선에서처럼 친박대의원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다.
[더타임스 김형기 기자] 2012년은 총선과 더불어 대선을 앞두고 여야를 막론하고 예비 대선 주자들의 움직임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여당인 한나라당에서는 박근혜, 김문수, 그리고 오세훈 현 서울시장도 언제 대권 레이스에 합류할지 모르는 사항이다. 한나라당 내에서의 판세를 보면 박근혜 전 대표가 현재로선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대권 후보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설사 한나라당의 대선후보가 된다고 하더라도 더욱더 대통령에 당선 된다는 확신도 보장도 없다. 그만치 내년 대선은 총선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정치 지형의 변화에 따라 여러가지 변수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권은 그렇다 치더라도 야권을 보면 더욱더 복잡하다. 우선 손학규 대표가 현재로선 가장 유력한 대권 후보지만 김정길, 문재인, 정동영, 정세균 등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본격적으로 대권 레이스에 합류하게 되면 당내 경선도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또한 당내 경선을 통하여 후보가 된다고 하더라도 야권 통합 및 단일화 문제 등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로 대권 레이스는 지리하게 줄달리기를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욱더 큰 변수는 이미 지난 6월12일 광주에서
[더타임스 김민주 기자] 양배추의 위대한 효능 세계 3대 장수식품(미국 타임지 선정)-위건강 .속쓰림 책임져양배추는 미국 타임지 에서 선정한 3대 장수식품.10대건강식품으로 선정할 정도로 위대한 효능을 지는 슈퍼푸드 이다. 한때 웰빙열풍을 타고 양배추를 생으로 먹는것이 유행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다지 식감과 맛이 좋치 않아 지속적인 복용이 힘들어 삶아서 먹는 경우가많은데 열을 가하게 되면 대부분의 영양분이 파괴 된다. 최근 이러한 단점을 해결하고 100%국산양배추를 실온에서 건조 후 복용하기 쉽게 환으로 개발된 프라임 양배추 100 제품이 프라임 생활건강(www.iprimeshop.co.kr) 에서 출시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대표적인 양배추의 위대한 효능을 알아보자1.위염.발암억제 기능과 위장질환에 좋은 효능 양배추의 비타민U, 비타민K 성분은 위에 염증이나 출혈이 생길경우 지혈작용을 하고 위의 점막을 강화하고 손상된경우 재생력을 높여 주고 특히 풍부한 식이섬유가 유해산소의 산화를 억제하고 발암성분의 활성을 강하게 억제하여 준다. 2.피부미용에 좋은 효능양배추의 카로티노이드 성분의 항상화 작용은 노화를 방지하고 피부재생과 피부를 매끄럽게하고 유황성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