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尹善道)는 1616년(광조 8) 이이첨의 난정(亂政)과 박승종·류희분의 망군(忘君)의 죄를 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해, 경원(慶源)·기장(機張)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1628년(인조 6) 봉림(鳳林)·인평(麟坪) 두 대군의 사부가 되면서 인조의 신임을 얻어 호조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이르기까지 주요요직을 맡았다. 그러나 조정 내 노론파의 질시가 심해져 1635년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강화로 떠났으나,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가다가 이번에는 환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1638년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영덕(盈德)으로 유배를 당해 다음해 풀려났다. 보길도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시(詩)·가(歌)·무(舞)를 즐기며 살았다. 무민거(無憫居)·정성당(靜成堂) 등 집을 짓고, 정자를 증축하며, 큰 못을 파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659년 효
이황(李滉)은 152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급제했다. 1533년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했으며,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했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이후 박사·전적·지평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충청도어사 등을 역임하고 1543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1546년 낙향하여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다. 풍기군수 재임 중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실현했는데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1552년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었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7년간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1568년(선조 1)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중용과 대학에 기초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
이이(李珥)는 1548년 13세 때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였다. 1555년 금강산에서 내려와 다시 성리학에 탐독하며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 문제를 타개하겠다는 다짐을 설파하며 자경문(自警文)을 집필하였다.1564년(명종 19) 이이는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곧 호조좌랑이 되었다가 예조좌랑으로 전임하였다. 1568년(선조 1) 천추사가 명나라로 갈 때 서장관으로 동행한 뒤, 1569년 홍문관교리를 지냈으며, 그해 음력 9월 송강 정철과 함께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고 하는 책을 써서 선조에게 올렸다. 1573년(선조 6) 승정원의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옮겨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길고 긴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이이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 풍습 중에서 잘못된 것 7가지를 국가적 근심거리라고 지적하였고 세세하게 설명하여 개선책을 강구하라는 요구 사항을 열거하였다.1574년(선조 7) 황해도 감사로 약 반년간 재직하였다. 그 후 대사간·대사헌·호조판서·대제학·이조판서·우찬성·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77년 황해도 해주의 석담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글을 배우는 사람을 위해서 기초 서적인 격몽요결을 저술했다. 1581년 음력 9월 홍문관 부제
김일손(金馹孫)은 1486년 진사가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올랐다. 149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주서(注書)·부수찬·장령·정언·이조좌랑·헌납·이조정랑 등을 두루 지냈다. 질정관(質正官)으로 있을 때 명(明)에 가서 정유(鄭愈) 등의 학자와 교유하고, 정유가 지은 소학집설(小學集說)을 가지고 귀국하여 우리나라에 전파했다.그는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류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勳舊派) 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했고,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으로 있을 때는 세조찬위(世祖纂位)의 부당성을 풍자하여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다. 1498년(연조 4) 류자광·이극돈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 때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등 사림파 여러 인물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의 언행 가운데 훈구파에서 문제로 삼았던 것은 소훈 윤씨(昭訓 尹氏)에게 지나치게 많은 전민(田民)과 가사(家舍)를 내렸다고 세조의 실정을 비판했고, 조의제문을 사초에 싣고,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고,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절의를
김종직(金宗直)은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서 저작·박사·교검·감찰 등을 두루 지내면서, 왕명에 따라 세자빈한씨애책문(世子嬪韓氏哀冊文)·인수왕후봉숭왕책문(仁壽王后封崇王冊文) 등을 지었다. 1464년 세조가 천문·지리·음양·율려(律呂)·의약·복서(卜筮) 등 잡학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로 기용되면서 관인(官人)으로서 본격적인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1467년 수찬(修撰), 이듬해 이조좌랑, 1469년(예종 1) 전교서교리로 벼슬이 올라갔다.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지제교(藝文館修撰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함양군수가 되었다. 1471년 봉열대부(奉列大夫)·봉정대부(奉正大夫), 1473년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랐으며, 1475년에는 중직대부(中直大夫)를 거쳐 함양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했다. 이듬해 잠시 지승문원사를 맡았으나 다시 선산부사로 자청해 나갔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관혼상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봄·가을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성희안(成希顔)은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정자·부수찬을 지냈으며 1494년 연조가 즉위한 뒤 군기시부정·동지중추부사·형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504년(연조 10) 이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의 직에 있었으나 양화도(楊花渡) 놀이에서 왕의 비행을 풍자한 시를 지은 일로 무관의 말단직으로 좌천되었다. 이에 1506년 그는 지중추부사 박원종(朴元宗)과 함께 연조를 폐출시킬 것을 밀약하고, 호조판서 류순정(柳順汀)의 호응을 얻어 군대를 동원하여 거사했다. 연조를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하는 한편 진성대군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이 되어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졌으며,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이듬해 창산부원군으로서 판의금부사를 겸했다. 주청사(奏請使)로 명에 가서 반정의 당위성을 납득시키고 중종 즉위의 인준을 받아왔다. 1509년 우의정이 되었다.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와 병조판서를 겸임하여 군무를 총괄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1513년 영의정이 되었다.
임사홍(任士洪)은 1465년(세조 11) 알성문과에 급제,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홍문관교리·도승지·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재직중 훈구파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당하여 사림파 공격의 표적이 되는데, 1478년(성종 9)에는 류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어 횡포를 자행하고 조정의 기강을 흐리게 한 죄로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의주로 유배당했다. 공주가 보고 싶어한다는 이유로 곧 풀려나왔으나 정권에서 소외되어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1490년 관압사(管押使), 1491년 선위사(宣慰使)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1498년 류자광 등이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일손(金馹孫)을 비롯한 사림파를 축출하자, 이들과 결탁하여 전횡을 일삼았다. 당시 그의 아들인 희재(熙載)도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까닭으로 화를 입었으나 구제하지는 못했다. 1504년 연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과 함께 모의, 연조의 생모인 윤비(尹妃)가 폐위·사사된 내막을 연조에게 밀고하여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성종 대의 중신과 사림들이 대거 제거되었는데, 사림파는 크게 위축되어 중종반정 이후 다시 중앙정치활동을
류자광(柳子光)은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자진하여 출전했다. 세조에게 발탁되어 병조 정랑이 되고 146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탄핵하여 제거한 뒤,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다. 1477년(성종 8) 도총관(都摠管)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임사홍(任士洪)·박효원(朴孝元)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고 횡포를 부린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가산이 몰수되었고, 공신적(功臣籍)을 삭탈당한 뒤 동래에 유배되었다. 1481년 공신의 봉작을 회복하고, 정조사(正朝使)·등극사(登極使)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91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1493년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로 있으면서 성현(成俔) 등과 함께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완성했다.성종 대 이래 신진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집권 훈구세력의 비리를 비판하게 되자 훈구세력은 연조의 즉위를 계기로 사림파의 제거를 꾀하게 되었다. 1498년(연조 4) 실록청의 당상관으로 있던 이극돈(李克墩)으로부터 스승의 문인 김일손(金馹孫)이 스승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음을 듣고,
장영실(蔣英實)은 1423년(세종 5) 노비 신분을 벗고 상의원별좌(尙衣院別座)로 임명되었다. 1424년 중국의 체재를 참고하여 물시계를 만들어 그 공으로 행사직(行司直)이 되었다. 1432년 김돈(金墩)·이천(李) 등을 도와 간의대(簡儀臺)의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기기의 제작을 감독했다. 1433년 호군(護軍)에 올랐으며, 같은 해 6월 혼천의(渾天儀)를 완성했다. 이듬해 김빈과 함께 자동시보(自動時報)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다. 11세기 송(宋)의 소송(蘇頌)이 제작한 천문시계장치와 아라비아 시계의 자동시보장치에 영향을 받은 이 시계는 시(時)·경(更)·점(點)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북·징을 쳐서 시보를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1434년 7월 1일부터 사용된 표준시간은 자격루에 맞추어 운용되었다. 또한 같은 해 금속활자인 경자자(庚子字)의 결함을 보완한 갑인자(甲寅字) 제작을 감독했다. 1437년 천체관측용 기구인 대·소간의(大小簡儀), 공중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 태양시(太陽時)와 항성시(恒星時)를 측정하여 주야 겸용 시계로 쓴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신숙주(申叔舟)는 1438년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을 지냈다. 1441년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입직할 때마다 장서각에 파묻혀서 귀중한 서책들을 읽었으며, 자청하여 숙직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학문에 대한 열성이 왕에게까지 알려져 세종으로부터 어의를 받기도 했다. 1443년 통신사 변효문(卞孝文)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서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과시하는 한편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要害地)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했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러 세견선(歲遣船)을 50척, 세사미두(歲賜米豆)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계해조약(癸亥條約)을 체결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집현전수찬을 지내면서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창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세종의 명으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명나라 한림학사로서 요동에 귀양와 있던 음운학자 황찬(黃瓚)을 찾아 10여 차례 요동을 왕래하면서 음운에 관해 논의했으며, 명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도 태평관(太平館)에 왕래하면서 운서(韻書)에 대해 질문하여 그 음을 정확하게 하는 등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음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