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원(柳誠源)은 1444년(세종 26) 문과에 급제하여 1477년(세종 29)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호당(湖當)에 들고, 집현전 학사로 있으면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 조정의 대신들을 죽이고 스스로 영의정부사·이조판서·호조판서·내외병마도통사를 겸한 뒤, 교서(敎書)를 만들어 그 훈공을 기록하려 할 때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도망했으나, 류성원만이 혼자 잡혀서 협박 끝에 정난공신의 공로를 기록하는 교서를 쓰고 집에 돌아와 통곡했다. 그 후 1456년(세조 2) 성삼문·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탄로되자 집에 돌아와 아내와 술잔을 나누고 조상의 사당 앞에서 칼로 자살했다. 이개(李塏)는 1436년 문과에 급제한 후, 1441년 세종에 의해 집현전 학자가 되었다. 1450년에 문종이 왕위에 오른 뒤, 단종이 된 왕자의 개인 교사 역할을 하였다. 1455년에 단종이 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자, 이개는 고위 관리들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붙잡혀 처형당하였다.유응부(兪應孚)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448년에 첨지중추원사, 1449년에는
하위지(河緯地)는 143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에 임명되었다. 1444년 집현전부교리로서 오례의주(五禮儀註)의 상정(詳定)에 참여했다.1448년 집현전교리로 복직했고, 이듬해 춘추관사관으로 고려사 개찬에 참여했다. 1450년 사헌부장령이 되어 대신들의 비리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대간의 직분을 다했다. 다음해 직집현전이 되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보좌, 진설(陣說)의 교정과 역대병요(歷代兵要)의 편찬에 참여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병서 편찬에 참여했던 학사들의 품계를 올리려 하자, 종신(宗臣)이 함부로 사은(私恩)을 베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여 반대했다. 이에 집현전 직제학으로 전보되자 사직하고 향리로 내려갔다. 다음해 집현전 부제학으로 복직하여 춘추관 편수관으로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으로 단종에게 경사를 강론했다. 1455년(세조 1) 예조 참의로 재직중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예조 참판으로 승진했다. 세조가 왕권강화를 위해 서사제(署事制)를 폐지하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하자 주제(周制)를 들어 서사제의 부활을 주장했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은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학사가 되었다. 1438년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했다.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죽으면서, 그에게 어린 단종의 보필을 당부했다. 1453년(단종 1) 우승지·부제학을 거쳐 1454년 좌승지·형조참판을 지냈다. 1455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있을 때, 신권의 지나친 강대화와 왕권 약화를 우려한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정분(鄭苯) 등을 축출,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1456년(세조 2) 다시 형조참판에 기용되었다.세조의 집권과 즉위 과정에서 집현전 출신의 관료가 요직에 많이 등용되었으나, 의정부서사제도(議政府署事制度) 대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는등 왕의 전제권을 확립하려는 조치에 대해 집현전 출신의 유신들은 즉각 반발했다. 세조의 전제권 강화와 독주에 불만을 품고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켜 관료지배체제를 구현하려 했다. 당시 형조참판으로있던 박팽년은 성삼문·이개·하위지·류성원 등 대부분 전직·현직 집현전 유신들과 함께 세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1456년 6
우리는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에서 살고 있다.아마도 죽을른지도 모를 지구에서 우리의 운명만 맡긴 체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많은 국가에서 지구를 살려보겠다는 정책을 내 놓고 있지만 각자의생각과 행동이 저 탄소 녹색운동으로 바뀌어야만 죽어가는 지구를 그 나마 숨 쉬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많은 과학자들의 의견이다.참으로 다가올 미래를 위한 준비가 절실히 요구되는 봐! 세계7위의 과학기술을 꿈꾸는 대한민국은 미래국격 재고를 위한 지원 강화 등 4개 분야에 총력을 다 한다는 계획도 준비해 놨다. 예산 또한 미국, 독일, 일본에 이어 4위로 투자한다는 것이다.여기에 걸맞게 이젠! 정부조직도 개편 할 때가 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격상승을 위해 확실히 달라져야하기 때문이다. 지진으로 망해가고 있는 일본식 행정 시스템부터 먼저 해방되어야하고, 제 기능을 못하는 불필요한 정부기구부터 재정리할 단계가 왔다고 생각한다.이러한 개편 작업은 현 정부에서 하지 못한다면 차기 대권주자의 공약으로 준비했으면 어떨까 생각한다. 지난4월19일 국회헌정기념관 대 회의실에서 국회보건복지위원으로 일하는 이춘식의원실이 개최한 (가칭) 사회복지 청 신설 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
성삼문(成三問)은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 식년시에 응시하여 뒷날 생사를 같이 한 하위지와 함께 급제했다. 집현전학사로 뽑힌 뒤 수찬·직집현전을 지냈다. 1442년 박팽년·신숙주·하위지·이석형 등과 더불어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했다. 세종이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신숙주·최항·박팽년·이개(李塏) 등과 더불어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차례나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音韻)을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오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헌을 했다. 1447년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1453년 좌사간, 1454년 집현전부제학·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 예방승지가 되었다.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 어린 단종의 보필세력을 제거하고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정권·병권을 장악했다. 이때 정인지·박팽년 등 36명과 함께 집현전 관원으로서 직숙(直宿)의 공이
홍경래(洪景來)는 1800년 박천의 청룡사(靑龍寺)에서 우군칙(禹君則)을 만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우군칙과 함께 변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면서 향촌에서 부를 축적하여 지방유력자로 등장한 계층과 황해도·평안도 일대의 사상인(私商人) 및 조선정부의 지방차별정책으로 관로가 막혀 불만을 품고 있던 양반지식층들에게 접근, 이들을 포섭했다.가산역(嘉山驛)의 관리 이희저(李禧著), 곽산의 진사 김창시(金昌始), 장사 홍총각(洪總角)·이제초(李濟初), 태천의 김사용(金士用) 등이 합류하게 되었다. 각지의 기인(奇人)·도사(道士)·술사(術士)·무인(武人) 등을 계속 규합하는 한편, 가산의 다복동(多福洞)을 근거지로 삼아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또한 자금 마련을 위해 한성의 유력자 김재찬(金載鑽)을 통해 평안감영에서 공납금 2,000냥을 차용하기도 하고, 의주의 인삼상인 임상옥(任尙沃), 정주의 부호 이침(李琛)·김약하(金若河), 안주 상인 나대곤(羅大坤), 송상(松商) 박광유(朴光有)·홍용서(洪龍瑞) 등과도 손을 잡았다. 한편 운산 촉대봉에 광산을 개설하고 광산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구실로 유랑민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각종 물자와 무기를 구입·제작하
조만영(趙萬永)은 1813년(순조 13) 능원랑(陵園郞)으로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된 뒤, 지평·정언·겸문학 등을 지냈다. 1816년 암행어사로 전라도지방에 파견되었으며, 조사를 마치고 돌아와 민폐를 지적하는 상소를 올려 전라도관찰사를 파면시켰다. 1819년 부사직(副司直)으로 있을 때 딸이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빈(嬪)이 되어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1821년 금위대장을 거쳐 1826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827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세자의 장인으로서 세력을 키우고, 1828년 이후 훈련대장을 겸임하면서 풍양조씨 세도의 기초를 마련했다. 1830년 호조·예조의 판서, 한성부판윤·판의금부사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헌종이 즉위한 후 어영대장·훈련대장을 지내며 동생 인영, 조카 병현(秉鉉) 등과 함께 풍양조씨 가문의 세력 확장에 노력하다가,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가 수렴청정을 그만두고 1841년부터 헌종이 직접 정사를 주재하게 되자 국왕의 원조를 기반으로 일족이 중앙 권력의 요직을 차지하여 안동김씨 일문에 대해 우위를 확보했다. 1845년 궤장(杖)을 하사받고 영돈녕부사가 되었다으며 왕실 외척 지위를
환조(桓祖)는 아버지 이춘(李椿)의 사후 형 이자흥(李自興)마저 사망하자 어린 조카인 이교주(李咬住)를 대신하여 원나라의 천호(千戶)를 세습받아 재직하였고 원나라의 후원에 힘입어 부원세력(附元勢力)인 이복동생의 외척, 조씨(趙氏)가문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쌍성총관부 만호 관리로 승진하였다.원,명교체기에 반원(反元)정책을 추진하던 공민왕은 동북면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와 연결되어 있는 친원사대파(親元事大派)인 기씨(奇氏)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 지역에 유이민을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이자춘를 끌어들일 필요성이 있었다. 이자춘은 1355년, 고려에 투항하여 소부윤(少府尹)의 관직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류인우(柳仁雨)와 더불어 동북면을 협공하게 하여 쉽게 원의 간섭기 이래 빼앗겼던 동북영토를 99년 만에 회수하였다.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가세하여 뿌리깊게 대립하였던 조씨세력을 제거하게 되었다. 대중대부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어 저택이 하사되었고 오랫동안 그의 기반이었던 동북면을 떠나 개경에 머물게 되었다. 이후 개경에 머무른 지 1년 만에 그가 동북면으로 돌아가려하자 그곳의 토착기반을 이용하여 고려의 조정을 배반할 것임을 들어 그의 동북면 귀환을 대신
목조(穆祖)는 처음에 전주에 살았는데, 산성 별감(山城 別監)과 갈등을 빚고 삼척으로 이주하여 왜구와 원의 침략을 막았다. 산성 별감이 안찰사로 임명되어 오자 다시 의주(宜州 : 원산)로 이주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의주 병마사로 삼아 원의 침략을 막게 했는데, 1254년 원의 산길(散吉)이 항복을 몇 번씩 청해 오자 항복하였고,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의 알동(斡洞)으로 이주하였으며, 1255년 알동천호소의 우두머리 천호(千戶) 겸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임명되었다. 1274년 죽으니 아들 이행리가 관직을 이어받았다. 1392년 7월 28일 조선 태조에 의해 목왕(穆王)에 추봉되었다가 1411년 4월 22일 태종에 의해 목조(穆祖) 인문성목대왕(仁文聖穆大王)에 재추봉되었다. 익조(翼祖)는 1275년 아버지인 이안사(李安社)의 천호(千戶) 관직을 계승했다. 1290년 의주(宜州)로 이주하여 쌍성총관부 등지의 다루가치가 되었다. 조선 개국 이후 증손자인 태조에 의해 익왕(翼王)으로 추봉되었다가 고손자인 태종 때 익조(翼祖) 강혜성익대왕(康惠聖度大王)으로 재추봉되었다.도조(度祖)는 원나라로부터 아버지인 이행리(李行里)의 천호(千戶) 관직을 계승했다. 처음에 박씨
삼촌의 왕위를 계승한 성종의 아버지 덕종(德宗)은 세조의 맏아들로 의경세자에 봉해졌으나 세자로 책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20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생인 예종이 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예종 역시 1년 남짓한 재위 기간을 채운 뒤 병사하였다. 의경세자는 월산대군과 잘산군 두 아들이 있었는데, 대비는 둘째 아들인 잘산군으로 하여금 예종의 뒤를 잇게 하였고, 그가 9대 왕인 성종이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 뒤 의경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1587년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으며,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 아들인 능양군이 반정 세력의 추대를 받아 조선 16대 왕 인조로 즉위하자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으로 추존(追尊)되었으며, 9년 후 원종으로 추존(追尊)되었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고 선왕인 광조가 폐위된 터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왕으로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종(眞宗)은 영조의 맏아들로 1719년 태어나 1724년 경의군에 봉해졌고 그 이듬해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0세의 어린 나이에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