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雲峴宮)은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의 생부인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의 저택으로 고조 광무제가 탄생하여 조선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 12살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이다. 고조 광무제가 즉위하자 운현궁은 흥선헌의대원왕이 10여년간 섭정(攝政)하며 정치를 하는 곳으로 변모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 섭정(攝政)을 행하던 1863년 ~ 1873년 사이에 지어진 것이 대부분이며 노락당(老樂堂)과 노안당(老安堂)은 1864년 9월, 이로당(二老堂)은 1870년 준공되었다. 운현궁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이 되는 노락당(老樂堂)은 초익공(初翼工) 7량(七樑) 건물로 사대부가의 건축미를 느낄 수 있는 기법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아름다운 창살 문양이 남아있다. 정면 3칸은 앞퇴를 개방했고, 좌협간 2칸 중에서 한 칸 부분이 개방되어 좌측 날개 부분의 통로 역할을 한다. 좌우 각 2칸은 온돌, 중앙 3칸은 대청이다. 좌우측의 날개 부분 즉 안채의 몸채에서 직각으로 꺾여 있는 부분은 돌출부가 각 2칸이며 부엌과 창고로 쓰였다. 고조 3년 고조 광무제와 명성황후 민씨의 가례가 있었던 곳이다. 흥선헌의대원왕이 국정을 의논하던 노안당은 전체적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成均館)은 공자의 위패(位牌)를 봉안·향사(享祀)하는 대성전(大聖殿),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도서관 존경각(尊敬閣),유생 교육 경비 조달하는 양현고(養賢庫),동무(東廡)·서무(西廡),기숙사 동재(東齋)·서재(西齋)로 구성되어 있고 성균관의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직인 대사성(大司成)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제주(祭酒)·악정(樂正)·직강(直講)·박사(博士)·학정(學正)·학록(學錄)·학유(學諭) 등의 관직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과거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서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유생(儒生)에게 우선적으로 성균관에의 입학 기회를 주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종 11)부터 200명으로 정착되었다.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유생(儒生)을 상재생(上齋生)이라 하였으며, 소정의 선발 시험인 승보(升補)나 음서(蔭敍)에 의해 입학한 유생들을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였다. 성균관 유생은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하였으며, 출석 점수 원점(圓點)을 300점 이상 취득해야만이 대과 초시(大科 初試)에 응시할 수 있
개시(開市)는 조선 후기 청나라, 일본을 상대로 열었던 대외 교역 시장으로 압록강 하류에서 열리는 중강 개시와 함경도의 회령 개시 및 경원 개시, 동래의 왜관 개시 등이 열렸으며 개시에서 이루어진 무역 거래를 개시무역(開市貿易)이라 하고 회령 개시, 경원 개시를 북관개시라고 하였다.1407년(태종 7) 경상도 병마절도사 강사덕(姜思德)의 건의에 따라 부산포(釜山浦)와 내이포(乃而浦)를 왜인의 출입과 교역품을 통제하였으며, 상경왜인에게는 한양에 동평관(東平館)을 설치하여 숙소로 이용하도록 하였다. 도항왜인이 급증함에 따라 1418년 염포(鹽浦)와 가배량(加背梁) 2곳을 더 늘려 4곳으로 하였다가 1419년 대마도 정벌로 일시 폐쇄하였다. 대마도주의 간청으로 1423년 부산포와 내이포 2곳을 허락하였고, 1426년 염포를 추가함에 따라 삼포제도(三浦制度)를 확립, 제포 30호, 부산포 20호, 염포 10호의 왜관을 설치하여 항거(恒居)왜인을 거주하게 하면서 도항왜인의 접대와 교역을 허가하였다. 왜관은 왜인들의 행동의 제한, 국방상의 이유로 교역처를 한정시키기 위하여 특별히 설치하였다.1544년 다른 곳의 왜관(倭館)은 모두 폐쇄하고 부산포(釜山浦)에만 단일 왜관
한성 운종가(雲從街)에는 규격이 통일된 시전(市廛)이 설립되어 90여 종의 물품을 전문적으로 판매하였다. 비단·무명·명주·모시·종이·어물을 파는 육의전(六矣廛) 상인들은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판매권을 받는 대신 국가에 대하여 관수품(官需品)을 바쳐 납세에 대신할 의무가 있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산업이 크게 일어나고 화폐가 보급되면서 난전(亂廛)이라 불리는 사상(私商)들의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8세기 말 이래로 한성에는 이현(梨峴)·칠패(七牌)·종루에 새로운 상가가 번창하여 시전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인(貢人)들의 상업활동이 눈에 띄었는데 관청에서 공가(貢價)를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관청에 납부하였다.17세기 후반 세곡 운송을 통해서 교역로를 확보한 경강상인(京江商人)이 한강을 중심으로 미곡과 어물의 수송과 판매를 통해서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지방에는 부보상(負褓商)이라는 행상단이 있어서 생활필수품을 향촌에 공급하였는데, 16세기 이래로 장시(場市)가 생겨나면서 장시를 순회하며 거래하였다. 장시는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18세기 중엽에는 1,000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일부 장시가
역로행정을 총괄하는 관아는 병조(兵曹)였고, 역전(驛傳: 郵驛) 사무를 관장하는 실무부서는 승여사(乘輿司)였다. 역로행정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전국에 퍼져 있는 530여 개의 역을 40-44개의 역도(驛道)로 조직하여 관할하게 하고, 역로의 중요도에 따라 대·중·소로 역의 등급을 나누었다.역도(驛道)의 책임관원으로 찰방(종6품) 1인을 두고 있었고, 역무(驛務)를 수행하는 종사자로서 역장(驛長)·역리(驛吏)·역졸(驛卒)·역정(驛丁)·일수(日守)·역노비(驛奴婢)·보인(保人)·솔인(率人) 등이 소속되어 있다. 역장이나 역리들은 사신의 영송(迎送), 역마의 보급, 공문서 발송 등의 업무를 맡았고, 역노비는 급주(急走)노비와 전운(轉運)노비로 구분 편성되었는데, 공문서 전달, 사신 접대에 따른 운반, 역토지(驛土地) 경작에 종사했다. 출장 관원이 각 역(驛)에서 말을 지급받을 수 있는 증표로 마패(馬牌)가 발급됐다. 즉 연호(年號)·월(月)·일(日)과 상서원인(尙瑞院印)을 새긴 앞면과 그 뒷면에 마필 수가 말그림으로 새겨져 있는데, 말그림은 1-5필까지의 5종이 있다.마패(馬牌)의 발급 절차는 중앙에서는 출장 관원의 품계에 따라 병조가 문첩(文帖)을 발급하면 상서원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899년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원수와 대원수의 계급을 두었으며 원수는 황태자(皇太子), 대원수는 황제(皇帝)였다.원수부는 대한제국의 최고 군령기관으로 의정부,궁내부와 병렬적인 관계이며 대원수인 고조 광무제가 군사적 실권을 갖고 자주적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으며 대한제국의 황제권을 중심으로 한 군사력 강화를 위해 1899년 6월 22일 반포된 원수부 관제는 대황제 폐하는 대원수 군기를 총괄하고 육군과 해군을 일률적으로 통솔한다. 이를 위하여 원수부를 설치한다고 규정했다. 대한제국 황제는 대원수로 군기(軍機)를 총람하고 육·해군을 통령(統領)하며 대한제국 육·해군의 통수권자로서 황제의 권한을 상징하는 옷이 바로 대원수 군복이다. 고조 32년(1895) 4월 우리나라에 서양식 군복이 처음 도입되었으며 광무 3년(1899) 6월 22일의 조칙에 따라 고조 광무제는 서양식으로 만든 대원수 군복을 평상복으로 입었고 군복의 검은 색과 단추의 오얏꽃(자두꽃) 문양의 단추는 대한제국(大韓帝國) 군복의 복제이며 대한제국 시대의 황제 조칙(詔勅)을 통해 옷깃의 별 5개는 대원수(大元帥) 군복에 부착한다. 원수부의 편성은 군무국,검사국,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의 하나인 보신각(普信閣)에서 파루(罷漏:오전 4시에 33번)와 인정(人定:오후 10시에 28번)에 종을 울려 도성(都城)의 출입시간을 알려주었다. 보신각 동종(普信閣 銅鍾)은 1985년까지 보신각(普信閣)에서 제야(除夜)의 종을 칠 때 사용되었으며 조선 세조 14년(1468) 주조(鑄造)한 보신각 동종은 명문(銘文)이 남아있어 주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중요문화재이므로 고궁박물관으로 이관하여 전시홍보하여야 한다. 보신각 동종은 돈의문(敦義門) 안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에 있는 신덕왕후의 원찰(願刹) 흥천사(興天寺)에 있었으나,흥천사가 폐사(廢寺)되자 원각사(圓覺寺)로 옮겨졌다.국가의 안녕과 국왕의 평강(平康)을 비는 원찰(願刹)·국찰(國刹) 원각사는 1467(세조 13)년 4월 초파일 10층석탑의 완공과 함께 낙성되었고 1488년(성종 19)에 화재로 소실되어 원각사지10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국보 2호)과 원각사 창건의 내력을 적은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보물 3호)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종루에 보관했으며 고조 32년(1895) 종루에 보신각(普信閣) 편액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 동종이라
대한제국(大韓帝國) 고조 광무제는 황제권을 강화하고 통치권을 집중하는 데 목적을 두어 군제(軍制)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대적인 개편을 하였는데, 한성의 방비와 황제의 호위를 담당하는 친위대(親衛隊)·시위대(侍衛隊)·호위대(扈衛隊)의 개편과 창설하였다. 황제가 육·해군을 친히 통솔하고, 국방·용병(用兵)·군사에 관한 각종 명령권과 군부 및 중앙과 지방의 군대에 대한 지휘 감독권을 가진 원수부(元帥府)가 창설되었다. 또한 헌병대·포병·공병·치중병(輜重兵)·군악대에 대한 새로운 관제가 마련되었으며, 육군법률(陸軍法律)·육군법원(陸軍法院)·육군감옥(陸軍監獄) 등이 창설되었다. 지방군제 역시 전국의 지방군을 진위대(鎭衛隊)로 통합 개편하는 한편, 무관학교 관제(武官學校官制)를 새로이 반포하여 1898년 무관학교가 개교되었다. 최초의 헌법인 대한국제(大韓國制)가 반포되었고, 훈장제도(勳章制度)가 창설되었으며, 국가(國歌) 및 각종 기(旗) 등이 제정·발표되었다. 외국과의 통상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국제적 지위가 향상되었으며, 북간도관리(北間島管理)를 설치하여 북간도의 대한국민을 보호하였다. 농상공부에서 주관하던 홍삼(紅蔘)의 제조 및 광산사업과 탁지부 주관의 둔토(屯土)가
시위대(侍衛隊)는 1895년(고조 32) 칙령(勅令) 120호의 반포에 따라 편성된 군대로 군부대신의 감독 아래 궁내의 시위를 담당하였으며 그 편제는 1개 연대(2개 대대) ·1개 대대(2개 중대) ·1개 중대(3개 소대)로 하였으며 연대에는 연대장(副領)을 비롯, 대대장(參領) 2명, 부관(副官:副尉) 2명, 향관(餉官:正尉) 2명, 중대장(正尉) 4명, 소대장(副尉:參尉) 14명이 있었다. 양번(兩番)으로 나누어 매 3일마다 교대하여 궁내 시위를 담당하였으며, 군악대도 부설하였으나 창설 3개월 후인 8월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살해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산되었다. 고조 광무제가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한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중앙군(中央軍)을 러시아식으로 개편하면서 1897년(광무 1) 3월 시위대(侍衛隊)를 다시 설치하였다. 시위대는 총원 1,070명으로 200명을 1개 중대, 5개 중대를 1개 대대로 편제하였는데, 대대본부에는 대대장 1명, 부관(부위) 1명, 향관(軍司) 1명, 정교(正校) 1명, 부교(副校) 1명을 두었으며, 중대에는 중대장 1명, 소대장 4명, 부교 ·참교 14명, 병졸 180명을 두었는데, 10월 1개
광주지방경찰청(청장 양성철) 광역수사대는 광주권 다가구주택(원룸) 사용승인과정에서 구청 단속 공무원과 설계감리․업무대행 건축사 및 건축주 등이 불법 유착된 사실을 포착 공무원 건축사 및 건축주 174명을 검거했다. 지난10월 건축관련 불법유착사실관련 첩수를 입수한 광주경찰은 다가구주택 단속과정에서 허위공문서작성 및 직무를 유기한 구청 건축과 단속 공무원 22명, 허위 감리 건축사 71명 및 다가구 주택을 불법 증축한 건축주 81명 등 총 174명을 검거하여, 공무원 김모씨(43세 남)화 H건축사무소 대표 김 모씨(49세, 남)등 2명을 구속, 167명을 불구속 하고, 공무원 5명에 대해서는 기관통보 하였다고 밝혔습니다.경찰에 따르면 구속영장이 발부된 광주 모 구청 건축과 건축지도계 소속 공무원 김 모씨는 1990년부터 현재까지 약 20년간 불법 건축물 단속업무를 담당해 왔다.김씨는 건축행정 건실화 점검계획에 의거 ‘09년 사용승인 된 다가구 주택 중 불법증축 주택 21세대를 적발 후, H건축사무소 대표 김씨로 부터 건네받은, 불법증축 다세대주택을 촬영한 원본 사진에 포토샵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원상복구 된 것처럼 조작한 사진을 첨부하여 광주 모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