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라가 어수선하다. 정부와 위정자는 국민 신뢰를 먹고살아야 하거늘 여당 내 일부 인사는 물론 국가 정책의 중요 결정권자까지도 금세 들통 날 거짓말로 불신을 자초하여 원성을 사고 있다. 특히 국무위원 중 상당수가 군 면제자로 구성된 전무후무한 요상한 정권에서 연평도 난리 통에 젊을 때 입으랄 때는 행방불명까지 돼 가면서 군복을 안 입더니, 남들은 다 양복입고 다니는 느긋한 나이에 군 야상 차림에 보온병 들고 ‘이것이 포탄 탄피’라며 우겨대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여당 대표인 안상수(네티즌 사이에서 ‘행불’로 유명)씨였다. 과연 그 모습을 보니, 콜라병 들고 요리저리 하늘에서 내린 선물이라며 즐거워하던 부시맨을 보는 것 같았다. 그나마 북한군의 포격으로 불안에 떠는 국민에게 안 대표는 군 면제자답게 쓴 웃음을 선사했다며, 칭찬이라면 칭찬(?)이라 할 비판을 듣고 있다. 마치 상가집에서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안다며 떠벌이는 한 미치광이 때문에 엄숙해야할 곳에서 포복절도하는 격이다. 이에 초등학생을 포함한 많은 국민으로부터 보온병 출신 병역 면제자라며 조롱받는 여당 대표가 불쌍해 보일 뿐이다. 물론 자업자득이지만. 절대 국민 위에 설 수 없는 자들이 어떻게 운
조선 왕비는 간택(揀擇) 절차를 거쳐 책봉(冊封)되었는데 금혼령(禁婚令)을 공포하여 반가의 13-17세 규수들의 혼인을 일시적으로 금지하면 반가에서 사주와 함께 부, 조, 증조, 외조의 이력을 기록한 간택단자(揀擇單子)를 예조에 올리면 예조는 간택단자를 모아 국왕에게 올렸다. 왕비의 간택(揀擇)은 왕실의 어른인 대비(大妃)가 주관하였으며 대비(大妃)는 간택단자(揀擇單子)를 보고 그 중에서 가문과 사주가 좋은 규수를 골랐다. 가례도감(嘉禮都監)이라는 임시 관청을 설치하여 간택(揀擇)과 가례(嘉禮)를 주관하게 하였다.조선 왕세자(王世子)는 동궁(東宮)에 거처하였고 왕비는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揀擇)되어 입궁하였으며 세자빈은 왕세자(王世子)가 왕위에 즉위한 후 정식 왕비에 책봉(冊封)되었고 국왕이 된 후에 국혼(國婚)을 하는 경우도 있다. 왕비의 간택(揀擇),책봉(冊封)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납비의(納妃儀)에 의거하여 시행되었다. 납비의는 택일(擇日), 납채(納采), 납징(納徵), 고기(告期), 책비(策妃), 명사봉영(命使奉迎), 동뢰(同牢), 왕비수백관하(王妃受百官賀), 전하회백관(殿下會百官), 왕비수내외명부조회(王妃受內外命婦朝會)의 절차로 이루어졌다.
1904년 2월 23일 갑진늑약을 불법 늑결(勒結)하고 한반도,간도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여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1897-1919)의 국방 및 재정의 실권 장악, 그리고 외교의 감독과 조약 체결권의 제약을 통한 대한제국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을 노골화했고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8월 영일동맹(英日同盟)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9월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대한제국의 독점지배에 대한 승인을 얻어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에게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요했다. 일제(日帝)는 을사늑약의 늑결을 위해 고조(高祖) 광무제에게 협박을 거듭했으나 불응하였고 1905년 11월 17일 고조 광무제가 불참한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하자 이토 통감은 을사5적(乙巳五賊)만으로 회의를 다시 열고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불법 늑결(勒結)하였고 1906년 설치된 일제(日帝) 통감부(統監府)는 대한 황실 궁내부(宮內府)가 관리한 전적,고문서를 총독부,경성제대로 불법 이관하고 일본으로 불법 반출하여 현재 교육기관,문화기관과 외국에서 소장중이다. 대한제국(Daehan Empire) 황실 미술공예품은 1909년 11월 1일 순종 융희제가 창경궁(
프랑스란 나라가 국격이 매우 낮은 것 같다.프랑스와 우리나라는 1866년 그들 함대에 의한 조선 침략이라는 악연으로부터 출발했다. 흥선대원군에 의한 프랑스 신부 9명에 대한 살해에 대하여 조선인 9천 명을 보복 처단하겠다고 침략한 그들은 몇 차례 중국으로 퇴각하면서 다시 침략을 반복, 결국 강화성을 한 달여 간 점령했다. 같은 해 음력 11월 18일 물러날 때 프랑스군은 강화성 관아에 불을 지르고, 은괴와 서적, 무기, 보물 등을 약탈 한 후 청나라로 철군했다. 역사에서 말하는 병인양요이다.이 때 프랑스가 절도해 간 외규장각 도서가 다시 고국에 반환 기미가 보이게 된 계기는 노태우 정권 시절 그들의 고속철인 떼제베(TGV)와 독일의 이체(ICE), 그리고 일본의 신칸센(新幹線)이 치열하게 경합할 때였다. 신칸센보다 의자 폭도 좁고 소음도 많은 프랑스 철도기술이 한국에 도입된 이유는 여럿이지만 로비 문제로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하지만 프랑스가 강화도로 침입, 조선군인 죽이고 가져간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도 한 몫 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그동안 떼제베는 한국 고속철도의 상징으로 발전 KTX라는 이름하에 대한민국 산하를 달리고 있다.그런데 어찌
대한민국은 아직도 일제시대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광복이 된지 어언 반세기도 넘었지만 아직도 일제 통치 때 정착된 부락(部落)이란 말을 우리 스스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우리가 스스로 ‘마을’이나 ‘동네’라는 좋은 행정용어 대신 ‘부락’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일본을 아는 필자로서는 너무나 답답하다 우리는 아직도 여러 부문에서 일본어의 잔재를 털어 내지 못하고 외래어로서 사용하고 있으니, 언어의 독립은 요원한 것 같다. 특히 일제가 한국을 멸시하면서 부르던 ‘부락’이라는 단어만큼은 하루빨리 사용을 해서는 안 되는 용어다. 그런데도 시골에 가면 아직도 많은 마을에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부락’이란 바로 일제가 한국인에게 심어놓은 나쁜 용어다. 순수한 우리말 마을´이나 ‘촌락’ ‘동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일본인 공무원들이 한국인을 깎아내리기 위해 사용하게 된 ‘천민동네’라는 의미의 부락이란 단어를 자꾸만 사용하는가 하는 점이다. 스스로 우리 동네는 ‘천민들이 사는 마을 입니다’하고 선전하는 꼴이다. 만일 일본인들이 관광 와서 그런 마을에 들린다면 ‘역시 한국에는 아직도 향소부곡과 같은 천민마을이 있
1873년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내탕금(內帑金)을 들여 경복궁(景福宮) 북편에 정치적 독립 의지를 드러낸 건청궁(乾淸宮)을 짓기 시작하며 흥선헌의대원왕의 섭정(攝政)을 종식하고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는데, 근대 문물,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외교통상정책으로 전환하였으며 고조 광무제는 1884년부터 건청궁에서 임어(臨御)하면서 정무를 처리했다. 1887년 건청궁에 최초로 전등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중국,일본보다 2년 앞선 것이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서양 문물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도모한 건청궁(乾淸宮)은 크게 장안당(長安堂)·곤녕합(坤寧閤)·복수당(福綏堂)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장안당 서쪽에는 각감청(閣監廳)이 있고, 남쪽에는 연못, 섬과 향원정(香遠亭)이 있다. 고조의 서재로 쓰인 집옥재(集玉齎)는 중국식 벽돌로 지어졌으며, 장안당 뒤쪽의 서양식 건축 관문각(觀文閣)은 외국 외교관들을 접대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삼국간섭(1895) 이후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명성황후(明成皇后)는 친러·친미 정책을 추진하여 10월 민영환(閔泳煥)을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하고 미군 장교 다이가 훈련시킨 시위대(侍衛隊)를 중용하며 친러계 이범진(李範晉)
어보(御寶)는 왕위 계승,권력 이양, 책봉(冊封)·존숭(尊崇)·추숭(追崇), 외교 문서, 행정, 서적 반사(頒賜)의 의례에 사용하였으며 왕권을 상징하고 제왕(帝王)의 권위와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제작한 인장(印章)이다. 제왕(帝王)을 상징하는 인장(印章)은 원래 새(璽)와 보(寶)가 있는데 중국의 제후국 조선의 어보(御寶)는 새(璽)를 쓰지 않고 보(寶)와 인(印)을 사용하였으며 1897년 대한제국(Daehan Empire)이 건국되고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를 제작하면서 어보(御寶)에 새(璽)가 사용되었다. 조선의 어보는 크게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국새인 대보(大寶), 어명의 발동을 위한 행정 절차에 사용된 어보, 각종 의례에 사용된 어보로 나누어지는데 대보(大寶)는 국가를 상징하고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며 왕위계승이나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사용하였다. 조선은 국왕의 즉위나 왕세자 책봉의 경우 중국의 승인을 받았는데 중국은 임명장에 해당하는 고명(誥命)과 함께 도금(鍍金) 인장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보내고 조선은 이 인장을 국가와 제왕을 상징하는 대보(大寶), 즉 국새(國璽)로 사용하였다. 세종 대부터 중국이 보내온 국
1897년 경운궁으로 이어(移御)한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황제위에 등극하기 전 대신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국호를 의논하고 제후국에서 황제국(皇帝國)으로 국격이 격상되어 정사를 모두 새롭게 시작하며 모든 예가 다 새로워졌으니 환구단에 첫 제사를 지내는 지금부터 새 국호(國號)를 정하여 써야 하며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고구려,백제,신라)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고 천명(天命)을 새로 받았으므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삼대(三代) 이래로 황제(皇帝)의 나라에서 이전의 나라 이름을 그대로 쓴 적이 없고 조선은 당당한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다. 대한(大韓:COREA)이란 이름은 황제의 정통을 이은 나라에서 쓴 적이 없고 한(韓)이란 이름은 고유한 우리나라의 이름이며, 고구려, 백제,신라의 삼한(三韓)을 아우른 것이니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니 대한(大韓)을 국호로 한다. 국호를 ‘대한(大韓)’이라 정해져 환구단에서 행할 고유제(告由祭)의 제문과 반조문(頒詔文)에 ‘대한(大韓)’으로 썼다. 단군(檀君) 이래 강토가 나뉘어 서로 웅(雄)함을 다투다가 고려(高麗)에 이르러 고구려·백제·신라의 삼한(三韓)을
태묘(太廟) 신주(神主)에 훙서(薨逝)한 조선 국왕,붕어(崩御)한 대한제국 황제는 묘호(廟號), 시호(諡號), 존호(尊號)를, 왕후는 휘호(徽號)를 제주(題主)하였는데 조선왕조는 명(明)국의 제후국(諸侯國)으로, 조선 국왕이 훙서(薨逝)하면 명국에 청시(請諡)하여 사시를 받고 나서 제주하였다. 태조부터 인조의 아버지 원종까지 신주는 먼저 명나라의 사시(賜諡)를 쓰고 다음에 조선의 묘호, 시호, 존호를 썼고 인조부터는 조선의 묘호, 시호, 존호만 썼다. 묘호(廟號)는 글자 그대로 태묘(太廟) 신주(神主)의 이름 즉, 조(祖)와 종(宗)을 말하며 조(祖)와 종(宗)은 유공왈조(有功曰祖) 유덕왈종(有德曰宗)으로 이는 조선 1대 태조- 25대 철종과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2대 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까지 적용되었다. 조(祖)는 태조,세조,선조,인조,영조,정조,순조,고조 광무제 등 건국 또는 큰 정치적 업적을 남긴 왕,황제에게, 종(宗)은 치적(治積)을 계승하고 덕이 많은 왕,황제에게 붙여졌다. 시호(諡號)는 생전에 행한 업적이므로 대행(大行)이 있는 분은 대명(大名)을 받고, 세행(細行)이 있는 분은 소명(小名)을 받는다. 대왕이 8자, 왕후가
1882년 최초의 서양식 화폐인 대동은전(大東銀錢)이 등장하였고 1883년 근대 화폐를 발행할 전환국(典圜局)을 설치했으며 1884년 묄렌도르프는 독일에서 압인기(壓印機) 3대를 수입하여 을유년(乙酉年)이 표시된 1냥 은화와 5문 동화(五文銅貨)를 시주(始鑄)했고, 1885년 선혜청(宣惠廳) 별창(別倉) 자리에 신축한 경성전환국은 1886년 개국 495년(開國四百九十五年)이 표시된 금화·은화·동화 등 15종의 압인주화(壓印鑄貨)를 시주했다. 1891년 은본위제를 표방하는 신식화폐조례(新式貨幣條例 )가 반포되었고 1892년 인천전환국이 설립되어 5냥 은화, 1냥 은화, 백동화, 적동화, 황동화 등을 소량 시주(始鑄)했다. 신구화폐의 교환 업무를 관장할 태환서(兌換署)를 한성에 설치했는데 문란한 화폐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구권화폐를 태환권(兌換券)과 교환하여 구권화폐의 유통을 정지시키고 난 후 태환권으로 신권화폐를 교환해 주기 위한 수단으로 발행하기 위해 태환서(兌換署)를 설치했다. 태환서(兌換署)는 태환(兌換) 업무를 위해 1893년 50냥, 20냥, 10냥, 5냥 4종류의 지폐(紙幣) 태환권(兌換券)을 준비했으나 미 발행에 그친 상징적인 우리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