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이름의 국가인권 위원회가 날이 갈수록 너무나 가관이다. 아니 가관을 넘어 점입가경이다. 상임위원, 비상임위원의 사퇴 이후, 전문위원, 자문위원, 상담위원, 57명도 사퇴를 선언했다. 얼마 전에는 인권위 직원들의 성명도 있었다. 이런 사태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권위원회라면 없애버리는 것이 차라리 나은 일인지도 모른다.국가인권위원회는 좌,우 이념과는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는 조직이다. 그저 순수하게 국민들의 인권 신장에 기여하고 억울한 국민들의 인권을 되 찾아 주는 역할만 하면 된다. 그런데도 국가의 일개 기관이 마비하다시피 한 사태가 이 지경까지 왔지만 왠일인지 정치권은 적극적으로 나서질 않고 있다. 물론 국정감사는 하기는 했다. 이러는 사이 사태는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행정안전부가 규모와 조직을 축소 할 때부터 이러한 사태는 예견되어 있었다, 국가 인권을 주무하는 부서의 장은 누가 봐도 이념을 초월하여 인권과 직결된 삶을 살아온 경력의 소유자를 수장으로 임명해야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인권 분야와 관계없는 친정부 인사인 교수 출신을 위원장으로 임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을 계기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복제를 개혁하여 양복을 입게 되었다. 1895년 4월 9일 칙령(勅令) 78호로 육군복장규칙(陸軍服裝規則)을 제정하여 전립, 이엄, 동달이, 전복, 목화로 구성되어 있는 구군복(具軍服)을 폐지하고 서양식 육군복장을 제정하고, 1900년(광무 4년) 4월 17일 칙령 14호로 문관복장규칙(文官服裝規則)을 정하였고, 칙령 15호로 문관대례복제식(文官大禮服制式)을 정하여 서양식 관복으로 바꾸었다. 1900년에 반포된 문관 복식(復飾)은 대례복(大禮服),소례복(小禮服),상복(常服) 등 3종으로 무궁화(無窮花) 수는 대례복에 나타나 등급을 나누는 것으로 쓰였다. 문관 대례복(大禮服) 장식은 광무(光武) 4년에 정해지고 광무(光武) 10년에는 상의가 개정되었다. 문관 대례복(大禮服) 상의는 가슴부분에 금수(金繡)한 무궁화(無窮花)의 수로 칙임관(勅任官)의 등급을 나누었는데 각각 1등은 9개,2등은 7개,3등은 5개,4등은 3개의 무궁화를 수식(繡飾)하였다. 1895년 4월 서양식 군복이 처음 도입되었으며 광무 3년(1899) 6월 22일의 조칙(詔勅)에 따라 대한제국 육·해군의 통수권자 고조 광무제(高祖 光
의친왕(義親王)은 종로구 사동(寺洞)에 있던 의친왕의 친왕부(親王府)인 사동궁(寺洞宮)에서 고조(高祖) 광무제와 귀인(貴人) 장씨(張氏)의 황자(皇子)로 태어났으며 1895년 특파대사에 임명되어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을 순방하고 1900년 8월 의친왕에 책봉되었으며 1905년 6월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됐다. 1919년 대동단(大同團)과 모의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망명을 결정하여 김가진(金嘉鎭)·전협 등과 함께 33인 명의로 최후의 1인까지 항전을 벌일 것을 강조한 선언서를 준비하고 11월 탈출을 감행하여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安東)에 도착했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강제로 송환되었으며, 일제가 도일(渡日)을 강요했으나 의친왕(義親王)은 이를 거부했고 일제의 삼엄한 감시하에 살면서도 배일정신(排日精神)을 고수했다. 1955년 의친왕이 훙거(薨去)한 안동궁(安洞宮)은 종로구 안국동에 있었는데 고조(高祖)가 원자(元子)를 얻어 그를 왕세자로 책봉하고 왕세자의 가례소를 미리 마련하고자 영건을 명하고 경연당(慶衍堂) · 정화당(正和堂) · 현광루(顯光樓) · 정상루(定祥樓) 등의 건물이 건립했다. 고조(高祖) 18년 세자빈으로 민태호(閔台鎬
의궤(儀軌)는 조선왕조, 대한제국시대에 조선 왕실,대한 황실의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으로 훗날에 참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으며 대개 1-4책의 필사본으로 제작되었지만, 8-9책에 달하는 분량이 활자로 인쇄되어 폭넓게 반포된 것도 있다. 행사가 끝나면 의궤(儀軌)를 편찬할 기구와 담당자가 결정되고 주관 관청인 도감(都監)과 관련 관청의 기록들을 자료로 삼아 편찬하였으며 제목은 해당 행사를 주관한 도감(都監)의 명칭에 의궤를 붙여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의궤(儀軌)는 대한제국 황후·황태자 및 조선 왕비·왕세자 책봉(冊封)하는 책례(冊禮),대한제국 황태자 및 조선 왕세자의 혼례인 가례(嘉禮), 조선 왕족,대한 황족의 지위를 높이는 추숭(追崇)이나 존호가상(尊號加上), 빈전(殯殿),혼전(魂殿),국장(國葬),산릉(山陵),천릉(遷陵),봉릉(封陵)에 이르는 상례(喪禮), 신주를 태묘(太廟)에 모시는 부묘(祔廟)를 비롯한 제례(祭禮),국왕이 몸소 농사를 짓는 친경(親耕), 궁궐의 영건(營建), 공신 녹훈(錄勳), 왕실 인장(印章), 어진(御眞)의 제작 등 주요 행사에 편찬됐다. 임금과 신하 사이의 명령 및 보고 또는 관청들 사이에 오고간 전교
삼국간섭(1895) 이후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명성황후(明成皇后)는 친러·친미 정책을 추진하여 10월 민영환(閔泳煥)을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하고 미군 장교 다이가 훈련시킨 시위대(侍衛隊)를 중용하며 친러계 이범진(李範晉)을 등용하는 등 배일정책을 강화했다. 이토 히로부미 일본 총리는 한반도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미우라를 주한 일본 공사로 임명하였고 명성황후의 영향력을 제거할 방책을 모색한 미우라 주한 일본 공사는 일본 군대,경찰관과 훈련대 간부 우범선(禹範善)을 포섭하여 1895년 8월 20일 새벽 경복궁을 공격하여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을 살해(殺害)했다.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명성황후가 부국강병 근대화를 추진한 건청궁(乾淸宮)에 난입하여 궁내부대신 이경직(李景稙)을 살해한 뒤, 곤녕합(坤寧閤)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무참하게 살해(殺害)했을 뿐만 아니라 증거를 없애기 위해 녹산(鹿山)에 시신을 화장하는 야만적 행동을 저질렀고 고조 광무제, 러시아인 사바찐, 미국인 다이 등 목격자가 많아 사건의 은폐에 실패했다. 만행을 목격한 외국인들은 외교관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고 미국공사대리 알렌과 러시아 공사 베
임금의 초상화를 어진(御眞)이라 하며 어용(御 容)·왕상(王像)·어영(御影)·진용(眞容)·진영(眞影)·수용(晬容)·성용(聖容)·영자(影子)·영정(影幀)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1713년(숙종 39) 이후 어진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어진(御眞) 제작은 임금이 생존해 있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리는 도사(圖寫), 임금이 돌아가신 후에 그리는 추사(追寫), 어진이 훼손되었거나 새로운 진전(眞殿)에 봉안하게 될 경우에 기존에 그려진 어진을 본 떠 그리는 모사(模寫)의 3종류가 있었다. 어진(御眞)은 임금로 생각되었으며 국가를 상징하였으므로 어진의 제작을 위해서는 도화서 화원 중에서 발탁하는 어용화사(御容畵師), 화원(畵員)과 공장(工匠)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원과 세심한 배려가 따랐다.어진 제작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주로 도감(都監)이 설치되었지만, 왕실의 종친(宗親)들이 주도하는 종부시(宗簿寺)가 관장하거나 몇몇 대신들의 감독 하에서 행해지기도 하였으며 기술적인 부분을 화원에게 조언해 줄 수 있는 유화(儒畵)가 참여하여 미진한 부분을 충고하였다. 어진(御眞)의 초본(草本)을 완성하면 비단 위에 먹으로 초본을 옮겨 그리고 채색
1884년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落成宴) 때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閔泳翊)이 개화파 인사들에 의해 치명적인 자상(刺傷)을 입었고 미국 선교사이자 마이애미 의과대학에서 공부한 의사였던 알렌이 나타나 민영익을 살려냈다. 고조 광무제는 알렌(Horace N. Allen)을 궁정의 시의관으로 임명하고,1885년 2월 29일 한성(漢成)의 재동(齋洞)에 활인원(活人院)과 혜민원(惠民院)을 개편해 서양식 근대 의료 기관인 광혜원(廣惠院) 설립을 윤허하였다. 광혜원(廣惠院)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 소속되어 있었고 광혜원의 원장은 광혜원당랑(廣惠院堂郞)으로 불렸으며 1885년 3월 12일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하였다.1886년 3월 29일에는 양반 자제 중에서 학생 16명을 선발하여 이 중 12명이 본과에 진급하였다.1893년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였던 올리버 에비슨이 제중원을 인계받았으며 1899년(광무 3)에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뽑아 의학교육을 실시했다. 1899년 4월에 설립된 내부병원(內部病院)은 1900년 6월에 광제원(廣濟院)으로 개칭되었고, 1907년 3월 광제원이 폐지됨에 따라 대한의원(大韓醫院)으
대한제국 황제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궁중 길상(吉祥)장식화인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는 5대 명산 5악(五嶽:백두산·묘향산·금강산·계룡산·지리산)과 붉은 해, 흰 달, 붉은 소나무,계곡 폭포수,강의 파도를 그린 그림이며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일월곤륜도(日月崑崙圖)라고 부른다. 경운궁 중화전 등 정전(正殿)의 어좌(御座) 뒤에 놓았고 황제의 어진을 모신 진전(眞殿)이나 황제의 신위를 모신 혼전(魂殿)에도 두었다. 절대 황권을 상징하므로 황제가 임어하는 곳에 항상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가 있으며, 주로 병풍 위에 그려놓아 일월오악병((日月五嶽屛)이라 이른다.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병풍은 8폭의 병풍 형태로 된 것과, 별도의 받침대에 끼워서 세우는 대형 가리개 형태로 된 것이 있다. 진전(眞殿)에 어진(御眞)을 봉안할 때에는 여러 폭으로 이루어진 일월오악도 병풍을 정면에 세우고 양쪽 옆에 한 폭으로 된 작은 병풍을 2중으로 세우기도 했다.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왼쪽에는 흰 달이, 오른쪽에는 붉은 해가 떠 있고, 가운데에 녹색과 청색으로 채색된 5대 명산, 5악이 솟아 있다. 양쪽 계곡에는 폭포수가 쏟아지고, 5악(五嶽) 아래는 반원꼴의 물결과 파도가 큰 강
길례(吉禮),가례(嘉禮)에 입는 대례복(大禮服)인 면복(冕服)에 쓰는 면류관(冕旒冠)은 곤복(袞服)과 함께 착용하였으며 황제는 12장복(十二章服) ,황태자와 조선 국왕은 9장복,왕세자는 7장복을 입었다.폭이 7치, 길이 1자 2치의 전원후방(前圓後方)의 평천판(平天板)에 앞 4치, 뒤 3치의 수류(垂旒)를 달고 면관(冕冠)의 좌우 양옆 귀쪽에 주광(黈纊)과 옥진(玉瑱)을 늘어뜨리고 굉(紘)과 담(紞)으로 장식되어 있다. 면류관은 방형의 천판에 옥구슬을 매단 관이며 조선 국왕은 9류면(九旒冕)이고, 왕세자는 7류면(七旒冕)이었으나 광무 원년(1897년) 대한제국 1대 고조(高祖) 광무제는 12류면(十二旒冕)이 되었고 황태자관은 9류면(九旒冕)이 되었다. 곤복(袞服)은 중단(中單),의(衣),상(裳)을 입고 대대(大帶),폐슬(蔽膝),옥대(玉帶),패옥(佩玉),방심곡령(方心曲領),후수(後綬),홍말(紅襪),적석(赤舃),옥규(玉圭)를 착용했다. 중단(中單)은 겉옷 안에 입는 옷이로 소매가 넓으며 깃에는 불문이 금박되어 있다.의(衣)는 저고리, 상(裳)은 치마, 대대(大帶)는 후수를 매어다는 허리띠와 비슷한 것
적의(翟衣)는 친애, 해로(偕老)를 의미하는 꿩무늬 적문(翟紋)을 짜넣은 포(袍)이며 대한제국(大韓帝國) 황후,황태자비,의친왕비(義親王妃)가 대례복(大禮服)으로 착용하던 적의(翟衣)는 길례(吉禮),가례(嘉禮) 등의 중요한 행사 때에 착용하였으므로 화려한 것이 특징이고, 여기에 딸리는 부속 의장품이나 머리 장식물이 복잡하다. 적의를 착용할 때는 머리에 각종 비녀와 마리삭금댕기로 장식한 대수(大首)머리로 장식하는데 위보다 아래가 넓은 삼각형 형태의 가체를 어깨 높이까지 곱게 빗어내리고 양끝에 봉(鳳)이 조각된 비녀를 꽂으며, 뒷머리 가운데에는 숱이 많은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자주색 댕기를 늘이고 머리 위 앞부분에 반자와 봉잠으로 장식한다. 적의(翟衣)는 속에 중단(中單),의(衣), 상(裳)을, 겉에 대대(大帶), 후수(後綬), 폐슬(蔽膝), 패옥(佩玉), 하피(霞奸), 옥대(玉帶) 등으로 장식하고, 청석(靑舃)을 신는다.적의(翟衣)는 영조 대에는 대홍단(大紅緞)으로 지었으며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 대의 적의(翟衣)는 심청색이며 이화문(李花紋) 168개가 있다. 적의 앞뒤에 금실로 수놓은 오조원룡보(五爪圓龍補)를 붙이고 앞면의 보 아래에서 옷단에 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