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친왕(英親王)은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비 엄씨(貴妃 嚴氏)이고 2대 순종 융희제와는 이복형제간이다. 1900년(광무 4) 8월 영친왕(英親王)에 책봉되었으며 1907년 12월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대한제국 강제 병합의 볼모로 영친왕을 일본에 데려갔다. 1910년 8월 일제가 대한제국을 불법 병합하면서 고조 광무제를 이태왕으로, 순종 융희제를 이왕으로, 영친왕을 영왕으로 격하시켰다. 일제 총독부는 대한제국 합병의 정당화를 선전하기 위해 1920년 영친왕을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의 딸 마사코와 정략혼인을 시켰다. 1926년 6월 순종 융희제가 붕어하자 일제 총독부가 영친왕을 이왕으로 계승시켰다. 영친왕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을 거쳐 육군중장을 지냈으며 1963년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에 걸려 있는 상태로 국적을 회복하고 귀국했다. 영친왕릉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 옆에 있다.
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는 1874년 고조 광무제와 명성황후의 2남으로 태어났으며 1875년 조선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1895년 홍범 14조 반포와 동시에 왕태자로 올랐고, 1897년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1898년 김홍륙(金鴻陸)이 고조 광무제와 황태자에게 해를 가할 목적으로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넣었는데, 고조 광무제는 맛이 이상함을 알고 곧바로 뱉었으나, 순종 융희제는 다량을 복용하여 치아가 망실되고 혈변을 누는 등 심한 몸살을 앓았다.1907년 고조 광무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상설,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였고 일제 통감부와 정미칠적의 강박으로 강제로 황제위에서 퇴위되었으며 순종 융희제는 일제 통감부에 의해 황제위에 등극하였다. 1905년 이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대한제국에서 서양 강대국을 몰아내고 대한제국의 후견국을 자처하면서 대한제국 강제 합병의 발판을 공고히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일제 통감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에게 하얼빈에서 저격당하였다.1910년 8월 일제는 조약 체결권자인 순종 융희제에게 경술늑약에 공식적으로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순종 융희제는 경술늑약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으며, 8
의친왕(義親王)은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의 다섯째 아들로 1877년에 태어났으며 어머니 귀인 장씨는 명성황후의 미움을 받아 궐밖으로 축출되었다. 귀인 장씨는 의친왕을 낳고 명성황후의 박해를 피해 궁 밖에서 살다가, 1900년 숙원(淑媛)에 추증받고 1906년 귀인(貴人)에 추증되었다. 의친왕은 유년기에 윤치소, 이종훈, 권동진 등과 필운학당에서 수학하였다.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졌고, 1893년 12월 6일 김사준의 딸 김수덕(金修德)과 혼인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듬해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였다.1900년 8월 의친왕에 책봉되었으며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되었다. 그 해 6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대한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받았다. 이후 고조 광무제의 후궁 귀인 엄씨의 견제를 받았다. 2대 순종 융희제의 다음 서열로 황위 승계 1순위이었으나 귀인 엄씨의 견제와 이토 히로부미 일제 통감의 방해로 대한제국 황태자에 오르지
덕혜옹주(德惠翁主)는 1912년 경운궁에서 출생하였다.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의 고명딸로서 5살 때 준명당에 유치원이 만들어질 정도로 고조 광무제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이름 없이 복녕당아기라고 불리다가 1921년 5월 4일 덕혜옹주라는 이름을 받았다. 한성의 히노데 소학교를 거쳐 일본에 강제 유학을 간 덕혜옹주는 1925년 도쿄 학습원대학(学習院大学)에 입학하였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였다. 1930년 모친 귀인 양씨의 죽음을 계기로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였으나 이내 호전되었다. 일본 왕실의 명령으로 1931년 5월 8일 도쿄에서 대마도 도주인 소 다케유키와 강제 혼인하여 이듬해 8월 14일, 딸 마사에를 낳았으나 출산 후 지병이 악화되어 1953년 남편 소 다케유키에게 버림받았으며 1955년 딸 마사에마저 행방불명되는 불행을 겪었고 정신장애로 도쿄 인근의 마쓰자와병원에 입원하였다. 1962년 1월26일 대한민국에 돌아왔으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으며 창덕궁에서 생활하였고 1989년 4월 21일 수강재(壽康齋)에서 사망하였으며 덕혜옹주묘는 홍유릉 뒤에 있다.
완친왕(完親王)은 귀인 이씨(貴人 李氏)와 고조 광무제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로, 완화군(完和君)으로 봉해졌다. 고조 광무제는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와 가례를 올리기 이전 귀인 이씨를 총애하였고 1868년 귀인 이씨가 완화군을 낳자 흥선헌의대원왕은 첫 손자인 완화군을 총애하였으며 명성황후와 귀인 이씨 간에 치열한 다툼이 전개되었다. 흥선헌의대원왕이 완화군(完和君)을 매우 총애하여 세자에 책봉하려 했으나 1874년 음력 2월에 태어난 명성황후의 아들 척(坧)이 이듬해 음력 2월 세자 책봉되었으며 완화군은 1880년에 병을 얻어 죽었는데 귀인 이씨는 아들 완화군을 잃은 슬픔에 실어증이 걸려 병을 앓다 죽었고 고조 광무제가 대한제국을 건국하면서 완친왕(完親王)으로 추존되었다.
명성황후(明成皇后)는 인현왕후의 사가로서 아버지 민치록의 소유의 한성 감고당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홀어머니를 섬긴 외동딸이므로 외척으로 인한 폐해가 없으리라 기대한 흥선헌의대원왕의 뜻에 따라 초간택과 재간택, 삼간택을 거쳐 1866년 음력 3월 6일 왕비로 최종 간택되어 운현궁에서 지내다가, 음력 3월 20일 왕비가 되었다.아버지 민치록은 의정부 영의정에게 추증되었고, 아버지의 본부인 해주 오씨는 해령부부인에 추증되었으며, 생모 감고당 한산 이씨는 한창부부인의 작위를 받았다. 1874년 음력 2월에 태어난 아들 척(坧)이 이듬해 음력 2월 세자가 되었다.1873년 11월 고조 광무제가 친정을 시작하자 명성황후는 민씨 집안 사람을 조정의 요직에 앉혔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발탁하여 우의정에 등용하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게 하고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공업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황쭌센의 조선책략의 연미론(聯美論)을 접한 명성황후는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비밀리에
홍계훈(洪啓薰)은 무예청 별감으로 관직을 시작하였으며 1882년 8월에 일어난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를 업고 피신시킨 공으로 출세하였다. 1894년 장위영 영관(領官)을 지냈다. 그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출전하여 전주를 탈환하고 그 공으로 훈련대장이 되었다.1895년 미우라 주한 일본공사의 명성황후 살해사건 때 경복궁 광화문 안에서 일본군의 침입을 저지하다가 총을 맞고 죽었다. 홍계훈은 미우라 공사의 명성황후 살해사건 때 명성황후를 지키다가 죽은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더불어 1900년 장충단에 제향되었다.황현은 매천야록에서 홍계훈이 미우라 일본 공사의 명성황후 살해사건 때 일본군의 총을 맞고 쓰러진 뒤 며칠 뒤에 죽었으며 인품이 염결(廉潔)하고 근신(勤愼)했다고 하였고 이사벨라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들에서 일본군 장교의 칼에 찔린 뒤 8발의 총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고 썼다.
신뢰사회가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인다.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지난 14일, 경북 구미시 상모동 소재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서 열린 93회 탄신제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얘기하면서 여기서 만족하지 말고, “국민의 행복과 삶의 질이 어느 나라보다 높고, 집안 사정이 어떻든 정직하고 성실히 노력한다면 누구나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이는 박 전 대표가 누누이 강조한 ‘신뢰사회’의 연장선에서 누구든 열심히 일하면, 다른 외적 요소가 아닌 정직하고 올바른 사회구조에 의해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성공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당연한 이야기다.지금처럼 가문의 뒤 배경으로 남들 다 가는 군대 빼먹거나 심지어 행방불명까지 의지를 가지고 해 가면서 고시에 합격한 후 고령이란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는 자가 출세를 해서는 안 된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건장한 젊은이가 4대 의무 중 하나인 병역을 면탈하고 편법, 불법, 위법, 탈법을 통해 부를 축척한 후 선출직 국회의원이나 그 이상의 직책에 출마하여 당선됨은 참으로 있어서는 안 될 불신사회요, 후진국가라 할 것이다.이에 앞으로
이경직(李耕稙)은 1892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고 12월 전라도 삼례역(參禮驛)에 모인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는 소장을 제출하자 동학은 이단이므로 계속 금압할 것이며, 교도들에 대한 지방 관리의 침학을 금단하겠다고 약속하여 동학교도들을 해산시켰다. 이듬해 동학교도 40여 명이 과거 응시를 가장하여 한성으로 올라가 경복궁 광화문 앞에 엎드려 고조 광무제에게 직접 교조 신원(伸寃)을 요구하였고 동학교도들의 상경을 막지 못하여 파면되었다. 이경직은 1895년 궁내부대신이 되었으며 8월 20일 이토 히로부미 일본 총리의 사주를 받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일본군과 낭인을 동원, 경복궁으로 난입해 명성황후를 살해할 때 침전인 건청궁 옥호루(玉壺樓)에서 난입하는 일본군과 낭인들을 막다가 총탄을 맞고, 고조 광무제가 보는 앞에서 일본군의 칼에 찔려 죽었다. 1897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 직계, 1899년에는 의정부(議政府) 의정(議政)으로 추증(追贈)되었으며 1900년 장충단(奬忠壇)에 제향(祭享)되었다.
최제우(崔濟愚)는 1859년 경주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련했다. 1860년 4월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종교체험을 했다. 이후 1년 동안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했다.1861년 포교를 시작하여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정부에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으므로 1862년 3월까지 남원의 은적암(隱寂庵)에 피신해 있었다. 은적암(隱寂庵)에서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려고 노력해 논학문(論學文)을 써서 서학을 비판하고, 안심가(安心歌)·교훈가(敎訓歌)·도수사(道修詞) 등을 지었다. 경주에 돌아와 제자 중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 전도에 힘쓰게 하여 입교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1862년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로 하여금 관내의 신도를 관할하게 하여 신도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접은 경상도·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설치되었으며 교세는 계속 신장되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 접소는 13개소에 달했다. 그해 7월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北接主人)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道號)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2대 교주로 삼았다. 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