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호(李軫鎬)는 아관파천으로 친러파가 득세하자 유길준, 우범선, 이두황 등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관련있는 인물들과 함께 일본으로 피신했다.1907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한 뒤 돌아와서 중추원 부찬의, 평안남도 관찰에 임명되었다. 관서 지방에 민족 의식을 고양하는 사립 학교가 많이 세워지는 분위기를 견제하고자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가 설립되었을 때는 교장을 역임했다.1910년 경상북도 장관, 1916년 전라북도 장관, 1919년부터 1921년까지는 전라북도 지사에 임명되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났을 때 총독부가 친일 관료와 지방의 지주들을 규합하여 자제단을 구성하자 전라북도에 전북자제단을 조직해 대한광복운동의 확산을 막았다.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 촉탁(1921), 조선중앙위생회 위원(1921), 조선구락부 발기인(1921)를 거쳐 1924년에는 총독부 학무부 국장에 임명되었다. 1934년에는 중추원 참의, 1941년에는 부의장, 1943년에는 고문이 되었고, 귀족원 의원에까지 올랐으며 태평양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각종 친일 단체에도 적극 참여했다.
신립(申砬)은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도총부도사·경력·진주판관 등을 지냈다. 1583년(선조 16) 온성부사로 있을 때 두만강 방면의 여진족 추장인 니탕개가 쳐들어왔다. 니탕개는 선조 초년부터 6진(六鎭)에 자주 드나들며 공순(恭順)의 뜻을 보였으므로 정부에서 관록(官祿)을 주고 후대했으나, 진장(鎭將)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부근의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경원부로 침입, 아산보(阿山堡)와 안원보(安原堡)를 점령했다. 이에 기병 500여 명을 동원하여 첨사 신상절(申尙節)과 함께 1만여 명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 공으로 1584년 함경도북병사에 오르고 환도(環刀)와 수은갑두구(水銀甲頭口) 등을 받았다. 1587년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에 침입한 왜구 격퇴를 위해 우방어사로서 좌방어사 변협(邊協)과 함께 출진했다. 1588년 고미포(古未浦)의 여진족 부락을 공격하여 적병 20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1590년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고, 이듬해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가 되어 선조로부터 보검을 하사받고 김여물(金汝岉) 등의 군관과 함께 모집한 수백
정여립(鄭汝立)은 1570년(선조 2)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에 올랐다. 서인으로 이이와 성혼(成渾)의 후원을 받았으나, 이이가 죽은 뒤 집권세력인 동인 편에 서서 이이·성혼·박순(朴淳)을 비판하여 서인의 집중적인 비판의 표적이 되고 선조의 눈밖에 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짓고 사회(射會)를 열어 강론을 펴는 등 활동을 전개하면서 인근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했다. 대동계는 신분에 제약을 두지 않고 가입을 허가했으며 보름마다 1번씩 무술훈련을 하는 등 호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갔다. 1587년에는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대동계원을 이끌고 전라도 손죽도(損竹島)에 침범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 그뒤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 해주(海州)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 등과 왕래하면서 대동계(大同契)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1589년 한강이 언 틈을 타서 입경, 대장 신립(申砬) 등을 죽이고 병권을 탈취하려 한다는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등의 고변(告變)으로 관련자들
한백겸(韓百謙)은 1586년(선조 19) 천거로 관직에 올라 중부참봉(中部參奉)·경기전(慶基殿) 참봉·호조좌랑·형조좌랑을을 지내다가 외직인 황해도의 안악현감으로 발령받아 2년간 근무하다가 다시 함종현령을 지내고 강원도 영월군수에 부임했다.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 때 연좌되어 귀양갔다. 임진왜란 때 석방되어 적소에서 적군에게 아부하여 난을 선동한 자들을 참살한 공으로 내자직장(內資直長)이 되었다. 1602년 청주목사를 지내고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다. 장예원 판결사(掌隸院 判決事)와 호조 참의를 지냈다. 1608년에 선조가 승하하였을 때 대신들은 한백겸이 예(禮)에 밝다 하여 빈전(殯殿)의 모든 상례(尙禮)를 맡겼다.1612년 파주목사에 발령되었으나 벼슬을 사퇴하고 낙향하여 학문 연구에 몰두한다. 1615년 명저인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저술하였다.
허준(許浚)은 1569년 6월 부제학 류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였다. 1569년 이조판서 홍담(洪曇)과 류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 의관으로서 출사했으며, 1570년 류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한성에서 고관대작들에게 이름이 알려지면서 명성을 높였다. 종4품 내의원 첨정에 오른 이후 뛰어난 의술로 조선 왕실의 병을 고쳐 내의(內醫)로서의 명성을 높였다.1573년 정3품 통훈대부 내의원정에 올랐다. 1575년 선조의 중병을 고쳐 신망을 얻게 되어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 어의(御醫)로 임명되었다.1578년 9월 허준은 내의원 첨정으로 있을 때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新刊補註銅人腧穴鍼灸圖經)을 임금으로부터 선물로 하사받았다. 1587년 심신이 허약해진 선조의 건강이 회복되어 수고로 내의원 책임자와 어의들이 모두 포상을 받았다. 구안와사에 걸려 입이 돌아간 공빈 김씨의 남동생을 진료하여 완쾌시켰고, 1590년 허준이 왕자 신성군을 살린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여 건강을 돌본 공로로 허준은 공신의 대열에 끼게 된다. 1596년 광조의 병을 맡게되어 이를 고친 공로로 허준은 정2품
안정복(安鼎福)은 이익의 문하에서 일생 동안 사사하면서 학풍을 계승하여 조선 역사의 독자성에 입각한 역사 발전 주류의 계통화는 조선 역사의 체계적 파악 가능성을 높였다.동사강목 (東史綱目)등을 저술하여 과거의 역사와 지리학을 비판하고, 우리 역사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내세웠다. 또한 천주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여 당시 학자들이 천주교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경고하였다. 이익의 대표적 저서인 성호사설을 수정 가필하고 요령있게 정선한 성호사설유선이라는 대작을 편찬하였다. 학문의 목표를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두고 이를 위해 진력하였다. 영조 25년(1749)에 만령전(萬寧殿) 참봉(參奉)에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내직으로는 감찰·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목천현감(木川縣監)을 지냈다. 그의 학문은 이익의 가르침을 받는 한편, 성호학파의 여러 학자들과 어울려서 경세치용의 구체적인 모색을 위한 사상적인 정립을 모색하여 갔다. 이러한 사상적 성과는 순암선생문집(順庵先生文集) 30권 15책을 비롯한 많은 저술로서 집대성되었다.
이익(李瀷)은 1705년(숙종 31년) 증광과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의 형 이잠(李潛)이 당쟁으로 희생된 후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몰두하여, 류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의 대가가 되었으며, 특히 천문·지리·의약·율산(律算)·경사(經史)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영조는 그의 명성을 듣고 1727년(영조 3년) 선공가감역(繕工假監役)으로 임명했으나 사양하고 저술에 힘쓰는 한편 서학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천문략(天文略), 천주실의(天主實義), 주제군징(主劑軍徵), 칠극(七克), 진도자증(眞道自證) 등을 연구하였다.그는 평생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광주 첨성리(瞻星里)에 머물러 학문을 연마하였으나 항상 국가 부흥을 위한 자기의 이상과 포부를 저술하여 불교와 세유(世儒)의 실용적이지 못한 학풍을 배격하고 실증적(實證的)인 사상을 확립시켰다. 역사 서술의 태도에서도 종래의 방법을 버리고 비판적·고증적(考證的)인 파악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당쟁의 폐단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투쟁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양반이 실제적인 산업에 종사하지 않고 관직을 얻음으로써 재산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한정된 직제(職制)에 비해 너무 많은 수의 관리가 배출되므로 자연히 당파
류형원(柳馨遠)은 1654년 진사시에 급제했지만, 당시 과거제의 폐단이 극심한 것을 보고 이후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뒤 고금의 전적 1만여 권을 보면서 현실사회를 구제하기 위한 학문연구와 저술에 몰두했다.그는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악습을 제거하고 정치를 바로잡아 나라를 부강하게 하며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원하는 실학적인 목적을 추구했다. 따라서 종래에 소홀히 되었던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어학을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개혁을 위한 정치·경제 문제의 연구에 힘썼으며, 국방을 위해 군사학도 연구했다. 류형원의 주저(主著)로서 26권 13책으로 되어 있는 반계수록(磻溪隨錄)은 전면적 개혁에 의한 국가재조책을 제시한 저술로, 전제(田制:토지제도, 재정·상공업 관계) 4권, 교선지제(敎選之制:향약·교육·고시 관계) 2권, 임관지제(任官之制:관료제도의 운용 관계) 1권, 직관지제(職官之制:정부기구 관계) 2권, 녹제(祿制:관리들의 보수 관계) 1권, 병제(兵制:군사제도의 운용, 축성·병기·교통·통신 관계) 2권과 각권의 고설(攷說)을 비롯해 속편(의례, 언어, 노예, 적전[籍田] 기타)과 보유(補遺:군현제)로 구성되어 있다.
채제공(蔡濟恭)은 1743년(영조 19년) 문과 정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수찬(修撰) ·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1747년(영조 23년) 익릉별검을 거쳐, 1748년(영조 24년)에는 승문원에 들어갔다. 같은해 가주서로 한림회권에는 참가할 수 없었으나 영조의 탕평을 표방한 특명으로 이권(二圈)을 더하여 소시(召試)에 응하도록 하여 뽑히도록 하는 등 특은(特恩)을 입었으며 이것으로 쳥요직인 예문관검열이 될 수 있었다. 1753년(영조 29년) 호서암행어사에 임명되어 균역법의 시행을 조사하고 실시과정상의 폐단과 변방대비 문제를 진언하였다. 이후 홍문관수찬, 사간원헌납, 홍문관교리, 사헌부집의를 거쳤고 특히 세자(世子)의 학문정진에 대한 많은 건의를 하였다. 1755년(영조 31년)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나자 문사랑으로 활약하였고, 그 공로로 승정원 동부승지가 제수되었다. 이후 이천도호부사와 대사간을 역임하고, 열성지장(列聖誌狀) 편찬에 참여한 공로로 1758년(영조 34년)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어 세자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목숨을 걸고 이를 극력 막아 철회
김정희(金正喜)는 1810년(순조 10)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갔다. 6개월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까지 하였으며, 김정희가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조선에 돌아온 뒤 벼슬에 나가지 않고 실사구시설을 발표하여 북학(北學)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한편 성리학적 관념론을 비판했다. 김정희는 청나라에서 고증학을 배울 때 금석학도 함께 배웠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친구인 김경연, 조인영 등과 함께 비문을 보러 팔도를 답사했고 북한산비 비문에 적힌 “眞興太王巡狩”라는 구절을 통해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혀냈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금석과안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실사구시설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김정희는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전각(篆刻)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차(茶)를 좋아하여 초의 스님, 백파 스님과 친분을 맺었다. 18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