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헌(申櫶)은 1828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에 임명된 이후 중화부사·전라도우수군절도사·전라도병마절도사·도총부 부총관 등을 역임했다. 1857년 좌승지·삼도수군통제사·형조 판서·한성부 판윤·공조 판서·우포도대장을 지냈다. 고조 광무제가 즉위한 후 흥선헌의대원왕의 신임을 얻어 형조·공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강화도를 수비했다. 1876년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구로다와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했으며, 1882년에도 전권대관의 자격으로 미국의 슈펠트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국방책으로 정약용의 민보방위론(民堡防衛論)을 계승하여 민간 자위(自衛)에 입각한 민보방위체제를 주장했고, 병인양요를 거치면서 서양식 근대무기를 수용하여 수뢰포(水雷砲)와 마반차(磨盤車) 등 신식무기를 제작했다.
오경석(吳慶錫)은 1853년(철종 4)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가 파견될 때 역관으로 베이징에 가서 11개월 동안 머물렀다. 서양열강들의 침략과 태평천국운동으로 위기에 처해 있던 중국의 상황과, 중국의 지식인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신서(新書)를 간행하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 1853~58년 4차례 중국을 왕래하면서 중국의 개혁문제를 걱정하는 지식인들과 광범위하게 교제·토론하는 한편 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박물신편(博物新編) 등의 신서를 구입·연구했다. 1860년 10월 진하 겸 사은사 신석우(申錫愚) 일행을 따라 역관으로 베이징에 갔다가 이듬해 3월에 귀국했는데,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사건으로 인한 중국의 대혼란과 위기를 체험했다. 1866년 5월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 프랑스 동양함대의 조선침공이 준비되자 조선정부가 사태를 해명하고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청국에 파견한 주청사(奏請使) 일행의 역관으로 다시 베이징에 가게 되었다. 이때 서양의 침략에 경험을 가진 중국의 정책가들을 방문하여 프랑스 함대의 동태와 그들의 조선침략 대책수립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중국은 프랑스의 침공에 전혀 관계되어 있지 않으며 프랑스군은
박규수(朴珪壽)는 1861년 2차 아편전쟁 직후 영-프연합군 점령하의 청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사행(使行)을 지원하여 거대한 서양 세력을 목격했고, 중국 문인과의 교유를 통해 실학적 학풍을 다졌다. 귀국 후 대사성을 거쳐, 1862년 2월 진주민란의 안핵사로 임명되어 국내현실의 모순을 처리했다. 1864년 고조 광무제 즉위 후 도승지·대사헌·대제학·이조참판을 역임하고, 1865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866년 2월 평안도관찰사로 전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대동강에서 격퇴시켰다. 1872년 강문형(姜文馨)·오경석(吳慶錫)을 대동한 2차 중국사행에서 서양침략에 대응하는 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하고 개국의 필요성을 확신했다. 귀국 후 형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면서 흥선헌의대원왕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자 1874년 9월 사직했다. 1875년 초 판중추부사가 된 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한거생활에 들어갔다. 그의 사랑방에 김윤식·김옥균·유길준·박영효 등 젊은 양반 자제들을 불러모아 연암집(燕巖集)·해국도지(海國圖志) 및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역관들이 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강의하여, 세계의 대세를 살피도록 하고 개화사상
이광수(李光洙)는 1910년 메이지 학원을 졸업한 뒤 이승훈의 추천으로 오산학교 교원이 되고 최남선이 주관하는 잡지 소년에 단편을 발표하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했다.1917년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발표하여 최남선과 함께 신문학 개척기의 선구자가 되었다.1918년 2·8 대한광복운동을 모의하면서 연락차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가담하였고, 여운형을 당수로 삼아 조직된 신한청년당에도 관여하였다. 안창호의 민족주의 운동에 감화를 받아 일본 와세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1919년 2월 백관수·최팔용·송계백 등과 재일 청년독립단을 조직하였다.1919년 2월 8일 2·8 대한광복선언의 선언문을 기초하였고,상해 임시정부의 설립에 참여하였고, 독립신문 주필로도 활동하였다. 이광수는 귀국 후 흥사단 활동과 저술을 통한 국민계몽을 했다.1919년 잡지 독립을 발행하였고, 사장 겸 주필, 임시정부 사료 편찬위원회 주임이었다. 이 잡지를 통해 대한민국의 자주성과 우수한 민족문화를 소개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고, 출판부장으로 주요한을, 기자로는 조동호 등을 영입하였다. 독립은 창간 후 주 2~3회 발간하였으나 자금난이 심해지자 1925년 18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였다.1923
홍명희(洪命熹)는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에 괴산에서 충청북도 최초로 참여하였다. 상하이로 건너가서는 이광수를 다시 만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이광수와 친밀하게 지내며 그에게 톨스토이를 권했다고도 한다. 홍명희는 조소앙, 이광수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궁핍한 생활을 계속하였는데, 이광수는 도저히 상하이 생활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귀국길에 오른다. 하지만 홍명희는 이광수를 버리지는 않았다. 항일 독립운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루면서도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교장 근무, 신간회 결성 등의 업적도 남겼다. 1927년 현대평론이 창간되자, 그 창간호에 이관용(李冠鎔)·안재홍·김준연·이순탁(李順鐸)·백남운(白南雲)·이긍종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40년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못이겨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던 소설 임꺽정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칩거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는 1625년(인조 3) 세자로 책봉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주에 내려가 남도(南道)의 민심을 수습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자진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 및 주전파 재신(宰臣)들과 함께 인질로 청나라 선양에 가서 9년간 머무르는 동안 양국간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했다. 1644년 9월 명나라를 정벌하는 청나라 군사를 따라 베이징에 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독일인 신부 J. 아담 샬에게 천주교와 서양 과학문명을 배워, 천문·수학·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천주상(天主像)을 가져 왔다. 1645년 2월 18일 한성으로 돌아왔으나, 조정은 서인들이 반청친명정책(反淸親明政策)을 고수하여 소현세자의 태도에 부정적이었고, 인조도 소현세자의 선양에서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또한 세자빈 민회빈(愍懷嬪)과 관계가 좋지 않던 인조의 총비 조소용(趙昭容)이 여러 가지로 소현세자를 모함했다. 소현세자가 귀국한 지 2개월 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急死)하였고 시신의 9혈에서 출혈하고 있었으며 진흑(盡黑)으로 변해 있어 민회빈(愍懷嬪)과 여러
양녕대군(讓寧大君)은 1402년(태종 2) 원자(元子)로 봉해졌으며, 1404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09년 이후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일정한 범위 내에서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나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세자로 책봉된 직후부터 학문에 게으르고 무절제하다고 하여 태종에게 지적을 받았으며, 나이가 들면서 방종이 더욱 심해져, 태학(怠學)·정강(停講)이 계속되었다. 또한 매와 개 등 완물(玩物)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군소배들과 어울려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다. 1417년 태종이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라고 준 왕친록(王親錄)을 열어봄으로써 더 큰 불신을 받게 되었으며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인군으로서의 자질과 덕망을 쌓도록 권하고 벌을 주기도 했지만 끝내 이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1418년 5월 류정현(柳廷顯) 등의 청원으로 폐위되어 동생인 충녕대군(忠寧大君 : 世宗)에게 왕세자의 지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그후 풍류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으며, 세종과 돈독한 우애를 유지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배려로 무사했으며 시와 글씨에 매우 뛰어났다.
정종은 1377년 아버지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했고, 1389년 절제사 류만수(柳曼殊) 밑에서 해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다. 1390년 밀직부사(密直副使)·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삼사우사(三司右使)를 역임했다. 조선이 건국되자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지고, 1398년(태조 7) 1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李芳遠)의 영향력 아래에서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1399년(정종 1) 3월에 개경으로 천도했고, 집현전을 설치했다. 그해 8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제정하여 권귀(權貴)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1400년 2월 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하여 아우 방원을 세제(世弟)로 책봉했다. 그해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병권을 의흥삼군부에 집중시켰다.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면서 군·정 분리체제를 이룩했다. 6월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을 설치했다.
연조는 폐비 윤씨가 사사(賜死)된 뒤인 1483년(성종 14)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 시절 허침(許琛)·조지서(趙之瑞)·서거정(徐居正) 등에게 학문을 배웠다.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고 변경지방으로 백성을 이주시키는 한편, 녹도(鹿島)에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치고 건주야인(建州野人)을 토벌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사창(社倉)·상평창(常平倉)·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는 등 빈민구제를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부활시켰으며, 경상우도지도(慶尙右道地圖)·국조보감(國朝寶鑑)·동국명가집(東國名歌集) 등을 간행하고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역대제왕시문잡저(歷代帝王詩文雜著)·여지승람(輿地勝覽)을 완성했다. 홍문관과 사간원을 없애고 경연(經筵)과 상소제도를 중단시키는 등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여론제도를 크게 위축시켰다. 1506년 성희안·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성종의 둘째 아들 중종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은 선조가 임진왜란중에 세자로 책봉한 광조는 적장자가 아니며 명(明)의 책봉도 받지 못했다는 명분상의 약점이 있었다.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류영경(柳永慶) 등의 척신과 소북(小北) 세력이 세자의 개봉(改封)을 건의했으나, 선조의 갑작스런 승하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선조는 임종 전에 류영경·한흥인(韓興寅)·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 등 7대신에게 영창대군을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1608년 광조가 즉위한 뒤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정권(大北政權)은 임해군(臨海君)을 살해하고 류영경 등을 파면시켰으며, 왕권을 위협하는 첫번째 인물로 영창대군을 지목했다. 1613년 강변칠우(江邊七友)의 은상(銀商)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이이첨은 박응서(朴應犀) 등을 사주하여 강변칠우들이 은을 모아 김제남을 영입하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고변하여 김제남은 사사(賜死)되고 7대신들도 처벌당했으며,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곽재우(郭再祐) 등이 혈육간의 정분과 연소함을 들어 전은(全恩)의 논리를 폈으나, 대북세력의 다수는 토역(討逆)의 논리를 내세워 죽일 것을 주장했다. 이항복 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