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귀(李貴)는 1582년(선조 15) 생원이 되었다. 이듬해 박근원(朴謹元)·송응개(宋應漑) 등 동인이 당쟁을 조장한다며 스승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자 상소를 올려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뒤 강릉참봉으로 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고, 평양으로 피난한 선조를 찾아가 방어대책을 올렸다. 이어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으로 임명되어 군사·군량·군마 등의 모집과 수송을 맡았다. 도체찰사(都體察使) 류성룡(柳成龍)을 도와 모집한 군졸과 양곡을 개성으로 운반하여 한성을 탈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듬해 장성현감·군기시판관·김제군수 등을 거쳤다. 1603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그뒤 형조좌랑·안산군수·양재도찰방·배천군수·함흥판관을 지냈다. 1616년(광조 8) 숙천부사로 있을 때, 이이첨(李爾瞻)의 일파를 처형한 이유로 옥에 갇힌 최기(崔沂)를 만나보고 공초를 수정했다는 탄핵을 받았다. 1622년 평산부사가 되었고 1623년 김유(金瑬)·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과 함께 광조를 몰아내고 선조의 손자인 인조를 임금으로 추대했다. 이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이어 호위대
이괄(李适)은 1622년(광조 14)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떠나기 직전 신경유(申景裕)의 권유로 광조 축출을 결심,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김유(金瑬)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광조를 몰아내고 선조의 손자인 인조를 새 임금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반란계획이 누설되자 합류 장소에 늦게 도착한 거의대장(擧義大將) 김유를 베려다가 주위의 만류로 그만두는 등 김유와의 갈등이 싹트게 되었다. 인조반정 뒤 한성판윤·포도대장의 벼슬을 받는 데 그치자 불만이 더욱 커졌다. 같은 해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북방에 파견된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의 천거로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었다. 왕에게 포차(砲車) 사용과 요충지 방어를 건의한 뒤, 평안도 영변에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성책을 고치는 등 국경경비에 힘썼고 3개월 후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봉해졌다. 인조반정 뒤 공신들간의 알력이 심해지면서 1624년 아들 이전(李旃), 한명련(韓明璉), 정충신(鄭忠信), 기자헌(奇自獻) 등과 함께 반란을 꾀한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괄은 인조의 신임을 얻고 있었으므로 심문대상에서 제외되었으나, 영변의 군중(軍中)에 머물고 있던 아들
이수광(李睟光)은 1585년(선조 18) 별시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호조와 병조의 좌랑 겸 지제교(知製敎)를 지냈고, 1590년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으로 종군했고,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가 되어 함경도 지방에서 이반한 민심을 돌이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뒤 동부승지·병조참지를 역임했다. 1597년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며 진위사(陳慰使)로 2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베트남의 사신과 교유했다. 1601년에 홍문관부제학으로 고경주역 古經周易)을 교정했고, 이듬해 주역언해(周易言解)를 교정했으며, 1603년에 사기를 교정했다. 1605년에 안변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돌아와 1607년 홍주목사로 부임했다. 1609년(광조 1) 중앙으로 와서 도승지·예조참판·대사헌·대사간 등을 지냈다. 1611년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청하는 사절의 일원으로 3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유구(琉球)와 타이의 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을 기록했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사직했다가, 1616년 순천부사가 되었고 임기를 마친 후에는 관직을 사양하
조소앙(趙素昻)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해 단연동맹(斷煙同盟)을 조직해 활동했다.1909년 1월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를 창립하고 5월 창간된 대한흥학회보의 주필로 활동했다.1913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신채호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개조해 박달학원을 창립하고 청년들의 교육에 힘썼다. 1915년 국내외 동포의 대동단결을 유도하기 위해 육성교(六聖敎)를 제창했으며 1917년에는 국내외 동포에게 대동단결선언서를 작성·선포했다. 만국평화회의에 출석할 준비로 주권불멸론(主權不滅論), 주권민유론(主權民有論), 최고기관 창조의 필요론을 골자로 한 취지서를 작성해 이를 스웨덴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대회에 대한국 문제를 의제로 제출하여 통과시켰다. 1918년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에 선출되었으며 11월 지린에서 여준(呂準)·김좌진·황상규(黃尙奎)·박찬익(朴贊翊) 등과 무오독립선언서를 작성해 김교헌(金敎獻) 등 독립운동가 39명과 공동서명하여 발표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후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헌장기초위원, 심사위원, 임시의정원법기초위원, 초대 국무원비서장, 국무위원 등으로 활동했
이청천은 1919년 4월 간도의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서 교성대장(敎成隊長)이 되어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전력했다. 1920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교관이 되었고 10월 일본이 훈춘 사건을 빌미로 출병하여 간도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무차별 살육을 자행하자 서로군정서군 400여 명을 인솔하고 백두산 북록(北麓)의 2 군사기지로 대피했고 청산리전투에 참여했던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에 합류해 안도현(安圖縣)의 밀림으로 이동했으며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여단장이 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 달네레첸스크 일대로 이동했고 레닌 정권의 치타 지방정부와 공동작전 및 협조에 관한 협정을 맺고 치타 정부의 원조하에 이르쿠츠크로 이동해 고려혁명군단을 조직하고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치했는데 이때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준비되자 김동삼(金東三)·배천택(裵天澤) 등과 함께 서간도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해 군사위원에 선출되었다. 1924년 11월 남간도의 독립단체를 통합한 정의부(正義府) 중앙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상비군 8개 중대를 두고 총사령관이 되었다. 1930년 7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창당에
사직단(社稷壇)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든 때에 의식을 행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제도에 따라 경복궁 동쪽엔 태묘를, 서쪽엔 사직단을 배치하고, 태조 4년(1395) 정월부터 공사를 착수하였다. 사직에 올리는 중요한 제사는 4대향(四大享)이라 하여 풍년을 빌기 위해 정월 상순 신일(辛日)에 지내는 제사인 기곡(祈穀), 2월과 8월의 상순 무일(戊日)에 행하는 중삭(中朔), 동지 뒤의 셋째 술일(戌日 또는 未日)인 납일(臘日)에 한 해 동안 지은 농사 형편을 신에게 고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인 납향(臘享)이 있었고 홍수나 한파, 유행병과 전쟁에 행하는 기제(祈祭)·책봉(冊封)·관례(冠禮)와 혼례(婚禮)에 행하는 고제(告祭)의 소사(小祀) 등이 있었다. 사직단(社稷壇) 주변에 동ㆍ서ㆍ북쪽 산기슭을 따라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신실(神室)을 두었는데, 임진왜란 때 신실 등은 모두 불타버려 선조 말년에 수복(修復)되었고 신문(神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이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단(社壇)은 동
수표(水標)는 청계천의 물의 높이를 측정하기 위해 6각 방추형 돌로 만든 하천 수위계(水位計)이다. 조선 세종 대에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어 강우량을 측정하고 청계천과 한강에 수표를 설치하여 수위를 재도록 하였다. 세종 대의 한강변의 것은 바윗돌에 직접 눈금을 새긴 것이고, 청계천의 것은 마전교(馬廛橋) 서쪽에 낮은 돌기둥 위에 나무기둥을 세운 형태였다. 청계천의 수표는 성종 대에 화강암 사각기둥에 눈금을 새겨 계량한 것이며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삿갓 모양의 머릿돌이 올려져 있고 아래에 직육면체의 초석이 땅 속 깊이 박혀 있다. 수표석(水標石) 아래에는 ‘계사경준(癸巳更濬)’, 또 초석에는 ‘기사대준(己巳大濬)’이라고 청계천(淸溪川) 바닥을 걷어낼 때 바닥까지 흙을 쳐냈음을 밝히는 기록을 음각했으며 현재의 수표는 그 상한이 성종 대가 되고, 그 하한이 기사년 즉 영조 25년(1749)이 된다. 돌기둥 양면에는 1척에서 10척까지 1척(21.5㎝)마다 눈금을 새기고, 3․6․9척에는 O표시를 하여 각각 갈수(渴水),평수(平水),대수(大水)라고 표시하였다. 6척 안팎의 물이 흐를 때가 보통 수위(水位)이고, 9척이 넘으면 위험 수위로 보아
정업원(淨業院)은 조선 6대 단종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단종의 명복을 빌면서 살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성과 우애가 있어 태묘(太廟)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하여 단종 원년(1453) 간택되어 이듬해에 왕비에 책봉(冊封)되었다. 단종 3년(1455) 6월 숙부인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함에 따라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에 봉해졌다. 이듬해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들의 단종 복위(復位)운동으로 세조 3년(1457)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에 유배되자 부인으로 강봉되었다.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의 나이 18세로 흥인지문 밖에서 눈물로 이별하고 영월 쪽을 바라볼 수 있는 정업원(淨業院)에 작은 초가를 짓고 3명의 시녀를 데리고 거처하였다.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암자 동쪽에 솟아 있는 동망봉(東望峰)에 올라가서 영월 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冥福)을 빌었다. 머리를 깎은 송씨는 세 시녀와 함께 초가인 정업원(淨業院)에서 나날을 보내다가 82세로 세상을 마감하였다.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敬
함춘원(含春苑)은 창경궁(昌慶宮) 동쪽에 있는 후원(後苑)이며 성종 15년(1484) 창경궁을 창건하면서 풍수지리설에 의해 궁궐 동편의 지세를 보강하기 위하여 나무를 심고 담을 둘러 출입을 금하였던 것에서 시작되었고 성종 24년(1493) 2월 함춘원이란 이름이 정식으로 붙여져 창경궁 후원(後苑)이 되었다. 연조 대에는 함춘원 담장 밖 민가를 철거하여 확장하고, 기묘한 화초를 심어 더욱 심원하고 엄숙하게 하였다. 담 밖에는 별정군(別定軍)을 배치하여 통행을 금하고, 대문과 함께 함춘원 북쪽에 성을 쌓았다. 영조 40년(1764)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를 이 곳에 옮겨 지었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수은묘를 경모궁(景慕宮)으로 고쳐 불렀는데 정조가 친히 편액(扁額)을 써 달았으며, 서쪽에 일첨(日瞻),월근(月覲)의 두 문을 내어 창경궁(昌慶宮) 쪽의 문과 서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정조 9년(1785) 8월 경모궁(景慕宮)과 사도세자의 원묘(園墓)에 대한 의식 절차를 적은 궁원의(宮園儀)를 완성하는 등 이 일대를 정비하였다. 헌종 5년(1839) 12월 봉안각(奉安閣)이 소실되었으나 곧 중건되었다. 광무 3년(1899) 8월 사도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철종 12년(1861)에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22첩으로 구성된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의 전국지도이다. 우리 나라를 남북으로 120리 간격으로 구분하여 22층을 만들고, 동서를 80리 간격으로 한면으로 했는데, 축척은 16만분의 1로서 각 층마다 20.1cm 크기의 8폭으로 접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두 면이 한판으로 구성되어 각 층의 판을 병풍식으로 접어 첩으로 만들고 펴면 1장의 지도가 되도록 제작되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지지(地志)에 기초하여 풍부하고 상세한 정보를 수록하였으며 조선 후기 지도 발달의 성과를 종합한 것이다. 지도 첫머리인 1층에는 좌표와 지도표(地圖標), 지도유설(地圖類說), 도성도(都城圖), 경조5부도(京兆五部圖) 등이 실려 있다. 좌표에 방안(方眼)을 그리고, 매방십리(每方十里)라 표시하였으며, 읍과 읍 사이의 도로에 10리마다 눈금을 표시하여 거리의 축척을 알기 쉽도록 하였다. 지도유설(地圖類說)에는 지도 제작의 경위와 지도의 중요성, 지도의 도법, 지도의 실용가치 등에 대하여 서술하고 전국 해안선의 길이와 6대 간선도로의 총길이를 기록하였고대동지지(大東地志)를 별도로 저술하여 지도와 같이 이용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