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황궁 경운궁(慶運宮)은 임진왜란 뒤 선조가 세조의 큰 손자인 월산대군의 사저를 왕의 시어소(時御所)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한 뒤 광조가 이 곳에서 즉위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1623년 인조가 경운궁에서 즉위하였으며 1897년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이어하면서 비로소 대한제국 황궁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큰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고 1905년 태극전(太極殿)·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다.경운궁과 경희궁 사이에 후원 상림원(上林苑)과 경운궁과 경희궁,경운궁과 의정부(議政府)를 연결하는 운교(雲橋),영성문(永成門) 포덕문(布德門) 대안문(大安門) 인화문(仁化門)이 있었다.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 중화전(中和殿),고조(高祖) 광무제의 침전 함녕전(咸寧殿),고조 광무제가 등극한 태극전(太極殿), 귀빈을 접견하던 편전 덕홍전(德弘殿), 어진을 봉안하는 선원전(璿源殿),황실 도서관 중명전(重明殿),접견실·연회장 정관헌(靜觀軒),구성헌(九成軒),환벽정(環壁亭),순종 융희제가 등극한 돈덕전(惇德殿), 고조 광무제의 침실과 접견실
1897년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건국(建國)한 근대적 자주독립국 대한제국(Daehan Empire) 정부가 1899년 8월 17일 반포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헌법적 법전의 명칭은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였다.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는 총 9조로 구성되어 있고,대한국국제 1조에서 대한제국이 세계 만국의 공인된 자주독립국임을 밝히고 있으며 대한제국(大韓帝國) 황제(皇帝)의 육해군 통수권, 계엄령 발포권, 법률 제정·반포권, 문·무관 임면권, 외국과의 조약(條約) 체결권·선전 강화권·사신 파견권 등을 규정하고 있다. 한반도,간도에서 러일전쟁 발발 징후가 보이자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러시아와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 국외 중립을 선언했다. 일본제국주의는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도발과 동시에 대한제국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 대한제국 황성을 공격하여 황궁 경운궁을 점령한 뒤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 늑결하고 독도를 비롯한 전국의 군사 요충지를 강제 점령했다. 대한제국 영토를 군용지로 하는 한일의
세종은 수시력(授時曆) 시행 이후 그 계산법을 알지 못하여 빼놓았던 일월교식(日月交食)과 오성(五星)을 추보(推步)하여 보완케 했고, 세종 15년(1433) 정인지(鄭麟趾), 정초(鄭招), 정흠지(鄭欽之), 김담(金淡), 이순지(李純之) 등의 학자들에게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편찬하도록 했다.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은 수시력과 명의 대통력통궤(大統曆通軌)를 바탕으로 하여 오차를 교정하여 역일(曆日), 태양(太陽), 태음(太陰), 중성(中星), 교식(交食), 오성(五星), 사여성(四餘星)의 칠정(七政)과 천행제율(天行諸率), 일행제율(日行諸率), 월행제율(月行諸率), 일월식(日月食)의 한도 등에 대하여 서술했는데, 세종 24년(1442)에 완성되어 세종 26년(1444)에 간행되었다.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은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이 편찬된 뒤 회회역경통경(回回曆經通經)과 가령역서(假令曆書)를 개정 · 증보하였으며 그 내용은 태양(太陽), 태음(太陰), 교식(交食), 오성(五星), 태음오성릉범(太陰五星凌犯) 등으로 나뉘어져 내편(內篇)의 칠정(七政)과 다른 것으로, 내편(內篇)은 2권 2책이었으나 외편(外篇)은 3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다.이 달력은 한성의
이명박 대통령은 ‘G20정상회의를 통해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사의 주체가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우리의 외교현실은 주권국가라고 하기에는 창피하다. 우리 정부가 긴급한 외교현안을 다루기 위해 중국 외교부와 통화를 시도했으나 긴급통화마저도 번번이 성사시키지 못해 애를 태워왔단다.중국 외교 당국자들이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주중 한국대사관 직원들이 중국 외교부를 찾아가도 당국자를 만나지 못했다. 결국 정부는 중국 외교부에 전달할 메시지를 주한 중국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전달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체결한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가 이런 것인가? 게다가 정부는 중국이 보낸 외교 메시지조차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천안함 사건 이후 중국은 ‘우리가 북한을 잘 설득하고 있으니 한국도 군사훈련을 자제해 달라’고 여러 차례 메시지를 보내왔다. 우리 정부는 중국이 북한에 강한 경고를 한 것으로 해석했지만, 중국은 북한에도 ‘우리가 한국정부를 자제시키고 있다’는 똑같은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지난달 북한의 당대표자회 직전에도 ‘북한이 경제개발과 개혁․개방에 관심이 많은것 같다’고 메시지를 보내와 우리 정부에선 북한의 개혁
서원(書院)은 명목상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고 선현을 제사지낸다는 설립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지방 사족(士族)의 지위를 강화해 주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사화(士禍)로 말미암아 향촌에 은거하여 생활하던 사림(士林)의 활동 기반이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급속히 발전하였다.서원(書院)은 유학의 성현들을 모시는 사당 또는 사묘(祠廟)의 역할, 향약(鄕約) 등의 향촌 질서를 정하고 백성들을 계도하는 역할, 단순한 교육이 아닌 학문 연구와 발전의 기능을 하는 연구소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향촌의 사림(士林)을 결집하는 역할도 하였다. 1542년(중종 37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서 고려의 학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이라 한 것이 조선 최초의 서원이었고 그 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서원이 생겼으며, 1550년(명종 5년)에는 퇴계 이황의 건의로 임금이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을 하사하고 책·노비·전결(田結) 등을 주어 장려하였으며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으며 국가의 보조를 받는 서원이 각처에 설치되어 명종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대에는 1백 24개, 숙종 대에는 1도에 80 ~ 90개를 헤아리게 되었다. 서
[더타임즈] 4학(四學)은 동(東) · 서(西) · 남(南) · 중학(中學)의 총칭으로서 조선 초기에는 4부학당(四部學堂)이라 하였다. 동(東) · 서(西) · 남(南) · 중부유학(中部儒學)으로도 불리우다가 세조 12년(1466)의 관제(官制) 개혁 때 동 · 서 · 남 · 중학으로 개칭되었다. 태종 5년(1405) 한양으로 천도하고 국가의 지도이념인 유학의 교육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동 · 서학당 외에 남부학당(南部學堂)이 태종 11년(1411) 6월에 설치되었고 그 해 10월 4부학당 중에서 최초로 남부학당의 독립적인 학사(學舍)가 한성부 남부(南部) 성명방(誠明坊)에 건립되었다.세종 4년(1422) 12월 중부학당의 독립 학사가 한성부 북부(北部) 관광방(觀光坊)에 신축되었다. 서부학당(西部學堂)은 처음에는 한성부(漢城府) 북쪽에 편재해 있던 경고(京庫)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생도들의 아침 · 저녁 왕래가 크게 불편하였기 때문에 세종 17년(1435)에 이르러 한성부(漢城府) 서부(西部) 여경방(餘慶坊)에 독립 학사를 신축하게 되었다. 불사(佛寺)를 이용하고 있었던 동부학당(東部學堂)은 세종 17년(1435) 8월 경술(庚戌)에 동부학당을 보수하도록 명
시험 결과에 대한 전형(銓衡)이 끝나면 소과(小科) 급제자(及第者)의 성명을 성적순으로 써서 국왕에게 입계(入啓)하는 동시에 급제자(及第者)의 명단을 발표하는 괘방(掛榜)을 하고, 길일(吉日)을 택하여 전정(殿庭)에서 창방의(唱榜儀) 또는 방방의(放榜儀)라 하는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시신(侍臣)과 사관(四館)의 참하관(參下官)들이 시립(侍立)한 가운데 거행되었고 생원(生員)은 동정(東庭), 진사(進士)는 서정(西庭)에 정열하여 국왕에게 사배례(四拜禮)를 올린 뒤 소과(小科) 합격증인 백패(白牌)와 주과(酒果)를 하사받았다. 소과(小科) 급제한 생진사도 문과 급제와 같이 어사화를 꽂은 급제자들이 말을 타고 천동 (天童)을 앞세워 악수(樂手)가 음악을 울리며, 광대가 춤을 추고 재인(才人)이 온갖 재주를 부리면서 3 - 5일 동안 시가를 행진하는 유가(遊街)를 하였다. 생진사들은 생원(生員)의 장원집에 모여 그 인솔 아래 대궐에 들어가 국왕에게 사은(謝恩)하고, 다음날에는 진사(進士)의 장원집에 모여 그 인솔 아래 문묘(文廟)에 가서 알성(謁聖)하였으며 문희연(聞喜宴)이라 하여 친척 · 친지를 불러 잔치를 베풀고, 시관(試官)들을 초대하여 은문연(恩門宴)을 열었다
성균관 유생의 특별시험 황감제 황감제(黃柑製)는 해마다 동짓달이나 섣달에 제주 목사(牧使)가 귤 · 유자 · 감 따위의 특산물을 진상(進上)하면 그 일부를 성균관(成均館)과 4학(四學)의 유생(儒生)들에게 나누어 준 뒤 어제(御題)를 내려 고시(考試)하여 거수자(擧手者)에게 급제(及第)를 준 것인데 1564년(명종 19)부터 시행되었다.그 고시절차를 보면 대제학(大提學)이 패초(牌招)를 받고 입궐하여 시제(試題)를 적어 임금의 낙점(落點)을 받는다. 대제학(大提學)은 승지 및 중사(中使)와 함께 성균관 명륜당(明倫堂)으로 가는데 승지(承旨)는 어제(御題), 중사(中使)는 귤을 가져간다. 명륜당(明倫堂)에 도착하면 어제(御題)는 북벽의 서안(書案) 위에, 귤은 상 위에 봉치(封置)한다. 중사는 동벽의 수좌(首座)에 앉고 승지는 그 다음에 앉으며, 대제학과 본관 당상관(堂上官)들은 중사 및 승지와 서로 읍례(揖禮)한 뒤에 서벽에 앉는다. 대제학이 무릎을 꿇고 승지 앞에 나아가 어제를 받아 제자리에 돌아가 앉는다. 대제학 · 본관 당상관 · 중사 및 승지에게 귤 5개씩, 제 낭청(郞廳)에게 2개씩을 나누어 주고 양재(兩齋) 재임(齋任)과 거재(居齋) 유생에게 1개
조선 건국 후 국가최고회의기관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권한이 너무 강대하므로 태조는 도평의사사의 병권(兵權)을 분리하여 삼군부를 설치하고 태조가 가장 신임하는 정도전(鄭道傳)을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에 임명하여 병권을 맡기고 한양 천도 후 경복궁을 창건하고 광화문 앞 동쪽 첫머리에 문직 최고기관인 도평의사사를 짓고, 서쪽 첫머리에 삼군부를 지었다. 태종 대에 도평의사사를 의정부(議政府)로 개칭하고 삼군부를 폐지하자, 도평의사사 건물을 의정부가 그대로 사용하고, 삼군부의 건물을 예조가 사용하였다.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은 1864년 2월 비변사(備邊司)의 권한을 줄이기 위하여 비변사를 의정부(議政府)와 비변사로 나누어 비변사는 국방과 치안만 관장하게 하였고 1865년 3월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이것을 의정부(議政府)에 합하였다가 1865년 5월 다시 군(軍) · 정(政)을 분리하여 삼군부(三軍府)를 설치하였다. 삼군부(三軍府)를 복설(復設)하자 국초(國初)와 같이 예조 청사를 삼군부 청사로 삼고, 예조는 광화문 앞 동쪽 이조와 호조 중간에 있던 한성부(漢城府)로 옮기고 한성부는 훈국신영(訓局新營)으로 옮겼다. 삼군부의 직제는 영삼군부사(領三軍府
조선시대 한성(漢城) 5부(五部) 내의 포도(捕盜),순라(巡邏) 등 치안(治安) 업무에 중심 역할을 하였던 기관은 좌포도청(左捕盜廳) · 우포도청(右捕盜廳)이었다.우포도청(右捕盜廳)은 혜정교(惠政橋)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좌포도청(左捕盜廳)은 파자교(把子橋)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한성(漢城) 5부(五部)의 치안 업무를 담당하였다. 1894년 7월 14일 설치한 경무청(警務廳)의 책임자 경무사(警務使)는 내무대신의 지시를 받아서 한성(漢城) 5부(五部) 내의 경찰 업무와 감금 업무(監禁 業務)를 수행하되 범죄의 경중을 구분하여 법사(法司)로 이송(移送)하는 모든 일을 관장하였고 한성 5부(五部)에 경찰지서(警察支署)를 두었으나 1895년 경무지서를 경무서(警務署)로 하였다. 경무서의 서장은 경찰 사무를 관장하여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고 관할구역 내를 순시하며 민정 시찰과 부하의 사무 집행을 감독하고 부하직원에게 상부 명령과 경무 법규를 주지시키고 주무관(主務官) · 군(郡) · 읍(邑) · 동장(洞長) 및 기타 관계 관청과 문서 왕복을 할 수 있으며 서장이 유고시에는 수석 총순(首席 總巡)이 서장을 대리하였다. 총순(總巡)은 순검의 행의(行儀)와 복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