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3월 이범석(李範奭)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의 부름을 받고 북로군정서 연성대장(硏成大長)으로 부임하였다. 1923년 10월 5일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청산리(靑山里)에 도착하였다.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이 청산리 주위를 포위하여 오자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은 임시 전투조직을 개편하고 총사령관 김좌진, 군정서 참모장 나중소(羅仲昭), 사령관 부관 박영희(朴英熙) 등으로 개편 편성되었으며 이범석은 북로군정서 연성대장(硏成隊長) 겸 중대장이 되어 보병부대 1개 대대를 백운평(白雲平) 숲속에 매복시켰다. 소총, 중기관총, 수류탄 80만발의 탄환을 집결한 뒤 10월 20일 새벽 그는 우진 이민화(李敏華), 좌진 한근량(韓根凉) 중우 진의 김동(金動), 중좌진의 이교성(李驕成)에게 각각 2백발의 탄환을 직접 분배하였다. 10월 20일 9시경부터 청산리 백운평에서 일군과 교전이 시작되어 날이 저물도록 격전을 전개하고 일본군의 선봉부대를 기습공격하여 섬멸시켰다. 일본군 주력부대 5만이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집중 사격을 가했다. 1차 선발대와 2차 선발대가 전멸하고 3차 선발대가 나타났다가 우왕좌왕 흩어질 때 이범석은 마상에서 독전 연
김좌진(金佐鎭)은 1905년(광무 9) 한성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7년(융희 1) 홍성에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한성으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오성학교(五星學校) 교감을 역임하였으며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1916년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간도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그 해 12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청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김좌진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으며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간도에서는 가장 막
홍범도(洪範圖)는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자 간도로 가서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였으며 1911년 함북 경원(慶源)의 수비대를 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약 400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 갑산·혜산·자성 등의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두었으며 만포진(滿浦鎭) 전투에서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20년 6월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19사단의 병력과 남양(南陽) 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鳳梧洞)을 공격해 오자, 홍범도는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였다. 9월에는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1연대장으로 참가하였다. 홍범도는 대한광복운동단체가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부총재가 되었으며 1921년 러시아령(領) 흑하자유시(黑河自由市)로 이동하여 스랍스케 부근에 주둔, 러시아 레닌 정부의 협조를 얻어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의 실력 양성에 힘썼다.
[더타임스 여동활 칼럼니스트] 한나라당 대표 경선,....이제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20만명의 대의원구성을 놓고 볼 때 과연 대의원 선정기준을 어떻게 정하였는가? 전국 여러 곳에서 강력하게 항의가 빗발치고 있다, 과연 작금의 현실을 누가 대변해 줄 것인가?대의원 선정 기준을 밝혀라, 부산에서는 여러해 동안 당비를 납부하여도 대의원에 단 한번도 선정되지 못했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호남 특히 전남광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당비를 꼬박꼬박 납부했는데도 불구하고 대의원에서 탈락되었다는 주장도 있다.또 지난 27일 호남에서 후보유세현장에서는 한나라당과 전혀 관계없는 이웃들이 대거 유세에 참여하고 있는현장이 목격되고 있다. 대의원 선정과정에 어떤 흑막이 도사리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이 간다. 누가 시원하게 대변 좀 해야 터지는 가슴을 식혀 줄 수 있지 않겠는가?이번 당대표가 선출되는 자가 앞으로 최소한 내년 총선과 더나아가서는 대선까지 한나라당을 견인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표를 비롯 최고위원에 뽑히기 위해 모두 계파별로 이미 진흙탕속에서 묻지마식의 혈투를 벌이고 있다.친이계측에서는 단 한명의 당 대표와 최고위원 자리를 독식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고 친박의
[더타임스 장팔현 칼럼니스트] 요즘 터무니없이 비싼 대학 등록금으로 사회가 들썩인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통계청 발표만 봐도 올해 1분기 평균 물가 상승률은 4.5%에 달한다고 한다. 뭐든지 세계 1등해야 속이 풀리는 대한민국 국민성 따라 그런지 2011년 1분기 물가상승률도 OECD국가에서 최고 수준인 2위를 기록하였을 정도다. 이에 질세라 대학 등록금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미국 다음으로 비싼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정말 자랑(?)스럽다.80년대 중반 대학생활을 한 필자의 경험으로 당시 한 학기 등록금은 40~45만원(국립대) 대였고, 사립대가 90만 원 선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동안의 평균 물가보다 더 빠른 속도로 올라 국립대가 그 때보다 네 배 정도, 사립대는 년 1천만원대에 이르고 있는 처참한 실정이다. 경제학자들은 한국의 고물가 현상을 ‘2010년 6.2% 성장으로 경기회복을 한 이후에도, 금융완화 정책과 함께 수출 대기업 경쟁력을 위한 고환율 정책을 과도하게 실시한 탓’으로 보고 있다. 네티즌들은 이러한 정책을 일러 곧잘 ‘고환율 정책으로 인한 수출 이익은 대기업만 살찌우고, 중소기업과 서민은 희생됐다’고
김상옥(金相玉)은 동흥야학교(東興夜學校)를 설립해 계몽교육에 헌신했으며 경북 풍기에서 결성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 참여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직후 본격적으로 대한광복운동에 뛰어들어 윤익중(尹益重), 신화수(申華秀), 정설교(鄭卨敎) 등 동지들과 함께 반일 비밀결사 조직인 혁신단(革新團)을 결성한 뒤 기관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배포했다. 1920년 김상옥(金相玉)은 풍기 시절부터의 동지인 한훈(韓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김동순(金東淳)과 함께 요인 암살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구체적인 암살 계획까지 세운 것이 드러나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고 임시정부 의연금·독립자금 등을 모금하여 상하이로 전달했다. 김상옥은 1922년 10월 무기와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안홍한(安弘翰), 오복영(吳福泳) 등과 함께 한성에 잠입한 뒤 1923년 1월 12일 대한광복운동 탄압의 본거지로 악명이 높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다나카 형사부장을 죽였으며,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열흘 후인 1월 2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의
필자는 오늘의 ‘친박연합’이라는 정당이 있게 한 장본인이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친박연합은 대구, 경북, 부산, 경남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의 틈새시장에서 박근혜의 적극적 배척 속에서도 친박(親朴)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 한나라당에 이어 명실상부한 제2당으로 승리를 거두고 획기적 정치마켓팅에 성공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대표였던 박준홍의 공천장사에 이은 구속과 주변을 기웃거리던 몇몇 얼빠진 정치부나방들로 인하여, 자칫하면 더 이상 생물정당의 생을 잇지 못하고 내년 총선에서 나락으로 떨어져 영원히 그 생을 마감할 수도 있는 위험지경에 이르렀다. 친박연합을 탄생시킨 필자가 친박연합은 지난 6.2지방선거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그 생을 마감했다고 보는 이유다. 필자는 친박연합이 처한 오늘의 현실을 애석해 하기 전에, 지난 6.2지방선거에서 친박연합을 그토록 아끼고 사랑해 준 영남의 마음에 죄송할 뿐이다. 필자는 오늘이 처한 내 고향 영남의 울분과 시대적과제를 깊이 자각한다. 영남민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영남으로부터 당파를 넘어, 영호남으로부터 비롯된 골 깊은 지역갈등을 치유해야할 책무가 있음을 더욱 아프게 토로한다. 지역당의 출현은 시대적 요청새로운 지방
[더타임스 장지연 칼럼니스트]4.27재보선의 참패로 이어진 한나라당의 위기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부산저축은행 사건으로 터진 부산시민들의 정부에 대한 분노가 김황식 국무총리가 감사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이미 그 문제점을 청와대에 보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국적인 정부의 불신으로 확산되고 있다.또한 어느 철없는(?)자문위원의 몰상식한 행동은 한나라당 전체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다. 사실 한나라당 정책위원회의 자문위원은 그 다지 중요한 직책도 아니고 책임이 있는 자리도 아니다. 한나라당 정책위원회에서 다 방면의 의견을 청취하고 정보를 공유하고자 2010년에 신설된 비상근 기구로 분야별 수 십 명씩 수 백 명이 참여 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반 국민들은 한나라당 자문위원이라고 하니 높은(?) 직위와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으로 비추어져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을 더욱 불러오고 있다. 소위 겨우 “저런 자질을 가진 사람이 한나라당 자문위원이라니...” 한나라당의 수준을 알만하다는 식이다.물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방법과 논리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한나라당 직함을 내세우며 공개한
[더타임스 여동활 칼럼니스트]친박은 일전불사를 각오해야 살아남는다,전투는 시작됐다,그러나 죽기를 각오한다면 반드시 희망은 있다,현재 친이계의 허접한 숫자에 고개숙이면 미래는 참담하다,한나라당은 이미 붕괴수준을 밟고있는 식물정당이다,아직도 미련이 남는가?과거 열린우리당이란 거대정당이 추락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바라본 적도 있다.이제 또 하나의 열린당이 될 한나라당도 비참한 말로가 시작되고 있다.죽어가고 있는 줄도 모르는 이재오는 이제 휘하의 추종자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워 친박들을 우롱하고 있다. 후안무치하다반드시 퇴출돼야 할 이재오는 마지막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전국을 배회하면서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몸부림을 칠 것이다.한나라당은 이재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왜 이재오를 방치하는가 ?그가 ‘개헌’이라는 낡아빠진 헝겊조각을 휘날리며 계속 정국을 유린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다어떻게 살린 한나라당인가?피눈물을 흘리면서, 사족이 짓무르면서 한번만 더 살려달라고 국민들에게 매달렸던 박근혜 전 대표의 울부짖음을 벌써 잊었는가?그것을 잊고 있는 친이계는 반드시 국민들에게 냉혹한 칼날의 심판을 받아야된다.홍준표는 또 뭐라 했는가? 홍사덕 의원이
[더타임스 여동활 칼럼니스트]사실이라면,모든 친박들은 여기에 깊은 고뇌를 해야된다,분명히 현재 한나라당은 국민에게 희망을 앗아간 정당이다박근혜 전 대표의 앞날을 위해서라기보다 대한민국의 국운을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면 대한민국 정치는 환골탈태해야 된다.2012년 대선이 바로 대한민국 정치를 환골탈태시키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국민에게 믿음을 주고 정치에 대한 불신을 불식시킬 수 있는 선진정치의 표상을 심어줄 계기가 될 수 있다.바로 국민과 정치가 서로 믿음을 주고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박 전 대표의 정치신념을 바탕으로 국운을 상승시킬 시대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과연 친박진영에서 그 중요한 시대전환을 위해 통찰력있는 준비를 하고 있는가?무척 의구심이 많이 가는 이때에 친박좌장격인 홍사덕 의원의 분당설 제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정치세계는 온갖 암투들이 난무하는 곳이지만 그래도 싸움을 해야 한다면 반드시 이겨야 된다.바로 국민들도 그 확고한 정치력에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고 표로서 믿음을 준다.아무리 국민을 위해서 일하고 싶어도 국민들에게 확고한 정치이념을 심어주지 못한다면 국민들은 사정없이 외면하고 만다.바로 정권창출은 혁명적 이념이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