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타임스 장지연 칼럼니스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이 몰고 온 6일간의 폭풍은 한국정치에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자 기존 정치권에 대한 강력한 경고였다.정치권과 전혀 관계가 없었고 의사에서 백신개발자로서 성공을 거둔 벤처사업가이자 교수로 활동해 왔던 안 원장은 젊은이들의 맨토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그가 내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관련된 한 마디 말은 곧 돌풍으로 변했다. 예상을 깬 그의 발언에 언론들은 촉각을 곤두세웠고 곧 바로 시작된 여론 조사에서 그는 여야의 유력 서울시장예비후보자들의 지지율 보다 무려 두 배가 앞선 50%대를 넘어서면서 그의 위력은 태풍으로 변해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거세계 흔들어 놓았다.그 후 안 원장의 말 한 마디는 톱뉴스가 되었고 언론사 기자들은 그의 주위를 에워싸며 한마디의 말을 더 들으려 취재 경쟁을 벌였다.전 국민의 관심을 끌었던 서울시장 출마여부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그는 또 다시 기존 정치권에 어퍼컷 한방을 날렸다. 50%대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율을 가진 안 원장이 5%대의 지지율을 가지고 있는 박원순 변호사에게 서울시장 출마를 양보한 것이다.기존의 정치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안 원장은 편안한
[더타임스 여동활 칼럼니스트] 역사는 돌고도는 것인가? 노무현만 무너지면 좋은나라 될 것이라며 국민들은 지난 대선에서 500만표차란 압도적인 표차이로 이명박정부를 탄생시켰다분명히 “내가 BBK의 대표”라고 동영상이 유포되어도 국민들은 무조건 경제만 살려라 하고 묻지마 식의 지지를 보내주었다.그만큼 국민들은 당시 노무현정권에게 차가운 질타를 보냈다, 필자는 노 전 대통령의 자살후 서울에 차려진 분양소 두 곳을 관심있게 지켜봤다.물론 사자에 대한 애도의 뜻도 있었지만 또다른 이면을 살펴볼 요량이었다. 당시 그 애도의 물결을 보고 또 다른 국민정서를 읽고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했다,그후 촛불시위를 보면서 또 한번 놀라운 민심을 두눈으로 똑똑하게 목격했다, 분명히 대한민국은 또 다른 변혁의 물결을 온몸으로 받아야 된다는 직감을 느꼈다,민심은 그렇게 변화를 원하고 있는데 정치권은 이작도 민심의 변화를 제대로 간파를 못하고 있고 그 민심은 급기야 분노로 변하고 말았다.두눈을 떠서 똑바로 보라, ‘안철수신드롬’을 보고 있노라면 지난 노무현 사후 몰아쳤던 애도의 행렬이 다시금 부활하는 듯 하고 새로운 친노의 부활을 보는 듯 하다.지난 지방선거를 통하여 친노의 부활이란 신호탄
명색이 집권여당의 대표인 홍준표라는 자가,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로 방송인 손석희를 모시기 위해 러브콜을 했다고 한다. 어디 이 뿐인가? 요즘 깜짝 스타로 부상한 안철수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한국정치를 이끌어 가고 있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에서 서로 자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모시기 위해 물밑작업이 한창이라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정치의 자화상이라니 참으로 부끄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현재 한나라당과 민주당에는 서울시장 여론조사 1위를 달리고 있는 나경원과 한명숙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에서 후보감을 물색한다? 대한민국은 정당정치=의회정치=민주정치를 근간으로 한다. 후보감을 당내에서 선택하지 않고 외부에서 영입한다면 정당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현재 대권주자 1위를 달리고 있는 박근혜도 무시해 버리고 외부에서 영입하자고 할 텐가? 정당이란 공동의 생각아래 모인 정치결사체다. 정당간판은 왜 걸어 놓았나?자당의 서울시장 후보 하나도 당내에서 찾지 못하고 외부에서 영입하겠다며 허우적거리는 허약한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보노라면...과연?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이 나라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고 있는...국민이 신뢰할 만한 거대 여야 정당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더타임스 이종납 칼럼니스트]지난 한 주동안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그간 사회적으로 존경받던 박원순 변호사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출마할 것이란 보도가 나오면서 초가을 정국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특히 20-30대들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안철수 원장의 서울 시장 출마 가능성 발언을 놓고 여,야 정치권은 그의 출마에 따른 이해득실을 계산하느라 분주하고 온라인에서도 논쟁이 뜨겁다. 안 원장이 출마할 경우 실제 지난 주말 조사된 각종 여론조사결과에서 기존에 거론되어 온 각 정당의 유력 출마 예상자들 가운데 압도적인 지지율로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그는 그간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패배의식에 젖어 정치권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서울 시장은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것 때문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다만 그는 “서울시장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된 지 얼마 안 돼 대학원을 키워야 하고 신성장동력 육성 등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아 깊이 생각을 못해봤다”고 말했지만 “조만간 결론을 내겠다”고 말해 출마를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그의 뒤에는 자타가 인정하는 대선전략통으로 정평이 나있는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의 발언이 연일 뉴스거리다.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정 의원의 발언 대부분이 강력한 대권 후보로 자타가 공인하는 박근혜 전 대표를 향한 것이다. 그것도 긍정적인 면은 보기 드물고 헐뜯고 시기, 질투하는 발언으로 들려 듣는 국민 상당수는 매우 불쾌하다. 왜 그런 저질 정치 발언을 연일 밥 먹듯 하는가? 정상적인 경쟁으로는 그렇게도 자신이 없단 말인가?우선 정의원의 발언부터 반추해보자!1) 8월18일- “나는 박근혜 전 대표(59)의 초등학교 동창인데도 잘 안 된다. 능력을 보고 판단해야 할 것 같다......,정치인의 허상을 벗겨내는 게 언론의 역할인데, 일부 언론은 누가 대세라고 하니까 유착하고, 권력이 된다”- 과의 인터뷰에서2) 8월23일-“정치인들의 인기라는 건 목욕탕의 수증기하고 비슷하다”- CBS 라디오에 출연, ‘박근혜 대세론’에 대해 3) 9월1일- ①“‘특정 후보는 안 된다, 내 허가를 받으라’고 비칠 수 있는 가이드라인 제시는 안 된다”,②“홍 대표와 박근혜 전 대표가 카르텔을 맺었나”-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로 거론되는 나경원 최고위원을 ‘비토’(거부)해온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와 박 전 대표를 비난(천안 지식경제
민영환(閔泳煥)은 1861년 민겸호(閔謙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伯父) 민태호(閔台鎬)에게 입양되었다. 1878년 대과에 장원급제하였고 1881년 동부승지(同副承旨), 1882년 21세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승진하였으며 도승지·홍문관 부제학·이조 참판·한성우윤(漢城右尹) 등을 지냈다.1887년 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를 거쳐 예조 판서가 되었다. 1888년, 1889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893년 형조판서·한성부윤을 지냈다. 1894년 내무부독판사(督辦事) 및 형조판서를 다시 역임하였다.1896년 고조 광무제의 특명을 받아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러시아와 밀약을 맺기 위해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하였는데 러시아 외무대신 로마노프를 만나 협상을 벌였지만 미미한 성과를 얻는데 그쳤다. 민영환은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독일 등을 두루 거치면서 서양 문명을 처음으로 접하고 해천추범(海天秋帆)이라는 기행문으로 남겼다. 1897년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외유하였으며 신진 서양 문물에
김홍집(金弘集)은 1880년 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고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지고 돌아와 예조 참판으로 승진했으며 통리기무아문의 통상관계를 전담하는 당상경리사(堂上經理事)에 발탁되었다. 1882년 3월과 5월 미국·영국·독일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 때 전권대신들의 부사(副使)로 협상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마건충(馬建忠)을 상대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의정·조인했다. 1894년 7월 군국기무처가 신설되자 영의정 겸 군국기무처 총재관에 임명되어 내정개혁을 추진했다. 총리대신으로 제1차 갑오개혁을 주도하면서 과거제 폐지, 은본위제의 신식화폐제도 채택, 의정부와 궁내부의 관제 시행, 도량형제도의 채택 등의 개혁을 단행했다. 내무대신 박영효와 연립내각을 수립하여 홍범14조를 발표하고 제2차 개혁을 주도했다. 의정부를 내각으로, 각 아문은 부(部)로 개편하여 군제개혁·재정개혁을 시행했다.
김규식(金奎植)은 1919년 1월 파리에서 1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의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자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대표로서 회의에 참석했다. 1919년 3월 파리에 한국대표부를 설치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고한민족의 주장·대한국의 광복과 평화 등의 인쇄물을 출간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일제의 불법 침략과 한민족의 대한 광복에 대한 당위성을 널리 홍보했다. 김규식은 1919년 8월 미국에 구미위원부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지냈으며 1920년 10월 중국 상해로 돌아와 임시정부의 학무총장을 맡았다. 1932년 11월 남경의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으며, 1935년 6월 민족혁명당 주석으로 선임됐다. 1942년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연합전선이 형성되어 임시정부가 강화되었고 1942년 10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선전부장에 선임되었으며 1944년 2월 임시정부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8·15 대한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의 선발대로 1945년 11월 23일 귀국했으며 12월말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둘러싸고 민족 내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가 없자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고 12
[더타임스 장지연 칼럼니스트] 8.24 후 폭풍이 여의도 정가에 무섭게 요동치고 있다. 오세훈 시장의 조기 사퇴로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가시화 되면서 여야가 초비상 사태로 접어들고 있는 가운데 한나라당은 주민투표 패배에 대한 책임론 에 휩싸이고 있다.그 폭풍의 핵 가운데 박근혜 전 대표가 서있다. 벌써부터 보수 논객들은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비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보수논객의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인 조갑제 대표는 [조갑제 칼럼]을 통해 ‘한나라와 박근혜의 기득권을 부숴라’는 주제로 한나라당과 박 전 대표를 싸잡아 비난했다.그는 “8.24 서울시 주민투표는 형식상으론 오세훈 서울시장의 패배로 끝났으나 진정한 패자(敗者)는 한나라당과 박근혜 전 대표이다.”고 못 박았다. 조 대표는 “투표 참여자들은 학력, 교육, 재력 등 여러 면에서 서울의 중심세력이며 여론 주도층이다. 보수의 핵심이다. 이들이 한나라당과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하여 느끼는 배신감이 폭발하면 한나라당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것이고, 박(朴) 대표 獨走(독주)의 大選(대선)구도는 근본적으로 흔들릴 것이다.”고 박근혜 전 대표의 앞길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대표적 보수 인사인 이동복
2010년 8월 15일 국민대표 33인은 사단법인 만남이 주최하는 나라사랑 국민행사에서 세계 각국의 대사와 사절단이 함께한 자리에서 조국통일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날 행사는 민간단체가 주관한 8.15 광복절 행사로 1박 2일에 걸쳐 진행 됐고 이곳 행사장을 다녀간 사람만 10만 여명이 넘는 다는 언론 보도도 있었다. 사단법인 만남이 임진각과 통일전망대에 조국통일 선언문 비석을 설치했다. 이를 두고 보수 기독교 단체 목사들과 모 기독교 보수언론은 ‘광복의미를 훼손하고 있다’며 대서특필했다. 조국통일 선언문의 내용이 사단법인 만남의 이만희 명예회장과 신천지 예수교의 교리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광복이라는 말은 ‘빛을 회복 한다’. 또는 ‘빛으로 회복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빛은 모든 색을 담고 있어 사물을 명암을 밝히고 색의 특성을 알려준다. 언론은 사회의 빛과 같다. 그러나 특정단체나 자기만의 사상이나 편집 방향, 이익에 치우칠 때는 색깔이나 어둠이 되는 것이다. 70-80년대에 보수 기독교단체를 대표하는 한기총은 정치인 김 모씨와 정치목사들이 하나 되어 삼선개헌 통과와 새로운 국론 형성을 위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만들어졌다. 태생부터 국론통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