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어극40년칭경기념비(高祖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는 1902년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어극(御極) 40주년과 망육순(51세)에 기로소(耆老所)에 입사(入社)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를 보호하는 비전(碑殿)안에 있으며 고조어극40년칭경기념비에는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대한제국(大韓帝國)을 건국하고 황제위에 등극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비석은 귀부, 비신, 이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신 앞면에는 대한제국 순종 융희제의 글씨가 있으며, 비문은 윤용선이 짓고 민병석이 썼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건물로 기단 둘레에 돌난간을 설치했다. 비전의 남쪽에 설치한 문은 돌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는데, 문의 가운데칸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어 ‘만세문(萬歲門)’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기로소(耆老所)는 조선시대에 연로한 고위 문신(文臣)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명예 기구이며 국왕과 조정 원로의 친목, 연회 등을 주관하였으며 기로소는 1394년, 태조가 60세를 넘자 기사(耆社)라는 명예 관청을 설치하여 70세 내외의 2품관 이상의 관료를 선발하여 기사(耆社)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임금 스스로도 이름을 올려
한성순보(漢城旬報)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한문으로만 기사를 썼다. 1883년 8월 17일 고조 광무제는 통리아문 내에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여 신문을 발간하도록 명하였다. 박문국 초대 총재에 외아문 독판인 민영목(閔泳穆)을, 부총재에 김만식(金晩植)을 임명하고 10월 31일 창간호를 발행하였다.한성순보는 열흘에 한 번 발행하는 순보였고 전체 지면 수는 18쪽이었으며, 제본되어 잡지 형태로 발행하였고 관보(官報) 성격을 띠었다.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으로 한성순보를 발행하던 박문국이 불타자 1886년 1월 25일 한성주보(漢城周報)로 맥을 이었다. 독립신문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이 정부의 자금을 지원받아 1896년 4월 7일 창간하였고 민중을 위해 알기 쉬운 한글 전용 신문을 만들었다.1897년 1월 5일자부터 국문판과 영문판(The Independent)을 분리하여 신문을 격일간으로 주(週) 3회 발행하였으며 국민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변자가 되고, 정부가 하는 일을 백성에게 전하고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 알릴 것이며 부정부패, 탐관오리 등을 고발할 것을 천명하였다. 1898년 5월 14일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주필 겸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903년 어극(御極)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칭경식(稱慶式)을 전통예술극장인 협률사(協律社)에서 열었으며,경운궁(慶運宮)부터 협률사까지 행사 이동시 사용할 포드(Ford) A형 무개차 1대를 칭경식(稱慶式) 의전용 어차(御車)로 수입을 지시했다. 1902년 어극 40주년을 맞은 고조 광무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나라 잔치를 콜레라 발병으로 1903년 협률사(協律社)라는 극장에서 열게 되었으며, 칭경식(稱慶式) 기념 공연을 위해 팔도 광대들과 미기(美妓)들을 뽑아 미리 장악원(掌樂院)에서 풍악과 가무를 연습시켰다. 미국인 알렌을 통하여 샌프란시스코의 자동차 판매상 프레이저로부터 포드의 A형 4인승 무개차 1대를 어차(御車)로 수입하였다. 알렌은 1884년 대한제국에 와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최초의 서양 병원인 광혜원을 세워 신임을 받고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의 어의를 지냈다. 인천항에서 하역하고 1899년 개통한 경인선 철도를 이용하여 1902년 개통한 한강철교를 건너 남대문역에서 내려서 경운궁까지 가야 했으므로 칭경식이 끝난 후에 도착하였다.황제의 행차는 위엄이 있어야 하는데,차는 시끄럽고 빨리 달려 고조 광
대한제국 황궁 경운궁(慶運宮)은 임진왜란 뒤 선조가 세조의 큰 손자인 월산대군의 사저를 왕의 시어소(時御所)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한 뒤 광조가 이 곳에서 즉위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1623년 인조가 경운궁에서 즉위하였으며 1897년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이어하면서 비로소 대한제국 황궁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큰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고 1905년 태극전(太極殿)·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다.경운궁과 경희궁 사이에 후원 상림원(上林苑)과 경운궁과 경희궁,경운궁과 의정부(議政府)를 연결하는 운교(雲橋),영성문(永成門) 포덕문(布德門) 대안문(大安門) 인화문(仁化門)이 있었다.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 중화전(中和殿),고조(高祖) 광무제의 침전 함녕전(咸寧殿),고조 광무제가 등극한 태극전(太極殿), 귀빈을 접견하던 편전 덕홍전(德弘殿), 어진을 봉안하는 선원전(璿源殿),황실 도서관 중명전(重明殿),접견실·연회장 정관헌(靜觀軒),구성헌(九成軒),환벽정(環壁亭),순종 융희제가 등극한 돈덕전(惇德殿), 고조 광무제의 침실과 접견실
1897년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건국(建國)한 근대적 자주독립국 대한제국(Daehan Empire) 정부가 1899년 8월 17일 반포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헌법적 법전의 명칭은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였다.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는 총 9조로 구성되어 있고,대한국국제 1조에서 대한제국이 세계 만국의 공인된 자주독립국임을 밝히고 있으며 대한제국(大韓帝國) 황제(皇帝)의 육해군 통수권, 계엄령 발포권, 법률 제정·반포권, 문·무관 임면권, 외국과의 조약(條約) 체결권·선전 강화권·사신 파견권 등을 규정하고 있다. 한반도,간도에서 러일전쟁 발발 징후가 보이자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러시아와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 국외 중립을 선언했다. 일본제국주의는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도발과 동시에 대한제국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 대한제국 황성을 공격하여 황궁 경운궁을 점령한 뒤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 늑결하고 독도를 비롯한 전국의 군사 요충지를 강제 점령했다. 대한제국 영토를 군용지로 하는 한일의
세종은 수시력(授時曆) 시행 이후 그 계산법을 알지 못하여 빼놓았던 일월교식(日月交食)과 오성(五星)을 추보(推步)하여 보완케 했고, 세종 15년(1433) 정인지(鄭麟趾), 정초(鄭招), 정흠지(鄭欽之), 김담(金淡), 이순지(李純之) 등의 학자들에게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편찬하도록 했다.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은 수시력과 명의 대통력통궤(大統曆通軌)를 바탕으로 하여 오차를 교정하여 역일(曆日), 태양(太陽), 태음(太陰), 중성(中星), 교식(交食), 오성(五星), 사여성(四餘星)의 칠정(七政)과 천행제율(天行諸率), 일행제율(日行諸率), 월행제율(月行諸率), 일월식(日月食)의 한도 등에 대하여 서술했는데, 세종 24년(1442)에 완성되어 세종 26년(1444)에 간행되었다.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은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이 편찬된 뒤 회회역경통경(回回曆經通經)과 가령역서(假令曆書)를 개정 · 증보하였으며 그 내용은 태양(太陽), 태음(太陰), 교식(交食), 오성(五星), 태음오성릉범(太陰五星凌犯) 등으로 나뉘어져 내편(內篇)의 칠정(七政)과 다른 것으로, 내편(內篇)은 2권 2책이었으나 외편(外篇)은 3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다.이 달력은 한성의
서원(書院)은 명목상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고 선현을 제사지낸다는 설립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지방 사족(士族)의 지위를 강화해 주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사화(士禍)로 말미암아 향촌에 은거하여 생활하던 사림(士林)의 활동 기반이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급속히 발전하였다.서원(書院)은 유학의 성현들을 모시는 사당 또는 사묘(祠廟)의 역할, 향약(鄕約) 등의 향촌 질서를 정하고 백성들을 계도하는 역할, 단순한 교육이 아닌 학문 연구와 발전의 기능을 하는 연구소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향촌의 사림(士林)을 결집하는 역할도 하였다. 1542년(중종 37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서 고려의 학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이라 한 것이 조선 최초의 서원이었고 그 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서원이 생겼으며, 1550년(명종 5년)에는 퇴계 이황의 건의로 임금이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을 하사하고 책·노비·전결(田結) 등을 주어 장려하였으며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으며 국가의 보조를 받는 서원이 각처에 설치되어 명종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대에는 1백 24개, 숙종 대에는 1도에 80 ~ 90개를 헤아리게 되었다. 서
[더타임즈] 4학(四學)은 동(東) · 서(西) · 남(南) · 중학(中學)의 총칭으로서 조선 초기에는 4부학당(四部學堂)이라 하였다. 동(東) · 서(西) · 남(南) · 중부유학(中部儒學)으로도 불리우다가 세조 12년(1466)의 관제(官制) 개혁 때 동 · 서 · 남 · 중학으로 개칭되었다. 태종 5년(1405) 한양으로 천도하고 국가의 지도이념인 유학의 교육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동 · 서학당 외에 남부학당(南部學堂)이 태종 11년(1411) 6월에 설치되었고 그 해 10월 4부학당 중에서 최초로 남부학당의 독립적인 학사(學舍)가 한성부 남부(南部) 성명방(誠明坊)에 건립되었다.세종 4년(1422) 12월 중부학당의 독립 학사가 한성부 북부(北部) 관광방(觀光坊)에 신축되었다. 서부학당(西部學堂)은 처음에는 한성부(漢城府) 북쪽에 편재해 있던 경고(京庫)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생도들의 아침 · 저녁 왕래가 크게 불편하였기 때문에 세종 17년(1435)에 이르러 한성부(漢城府) 서부(西部) 여경방(餘慶坊)에 독립 학사를 신축하게 되었다. 불사(佛寺)를 이용하고 있었던 동부학당(東部學堂)은 세종 17년(1435) 8월 경술(庚戌)에 동부학당을 보수하도록 명
시험 결과에 대한 전형(銓衡)이 끝나면 소과(小科) 급제자(及第者)의 성명을 성적순으로 써서 국왕에게 입계(入啓)하는 동시에 급제자(及第者)의 명단을 발표하는 괘방(掛榜)을 하고, 길일(吉日)을 택하여 전정(殿庭)에서 창방의(唱榜儀) 또는 방방의(放榜儀)라 하는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시신(侍臣)과 사관(四館)의 참하관(參下官)들이 시립(侍立)한 가운데 거행되었고 생원(生員)은 동정(東庭), 진사(進士)는 서정(西庭)에 정열하여 국왕에게 사배례(四拜禮)를 올린 뒤 소과(小科) 합격증인 백패(白牌)와 주과(酒果)를 하사받았다. 소과(小科) 급제한 생진사도 문과 급제와 같이 어사화를 꽂은 급제자들이 말을 타고 천동 (天童)을 앞세워 악수(樂手)가 음악을 울리며, 광대가 춤을 추고 재인(才人)이 온갖 재주를 부리면서 3 - 5일 동안 시가를 행진하는 유가(遊街)를 하였다. 생진사들은 생원(生員)의 장원집에 모여 그 인솔 아래 대궐에 들어가 국왕에게 사은(謝恩)하고, 다음날에는 진사(進士)의 장원집에 모여 그 인솔 아래 문묘(文廟)에 가서 알성(謁聖)하였으며 문희연(聞喜宴)이라 하여 친척 · 친지를 불러 잔치를 베풀고, 시관(試官)들을 초대하여 은문연(恩門宴)을 열었다
성균관 유생의 특별시험 황감제 황감제(黃柑製)는 해마다 동짓달이나 섣달에 제주 목사(牧使)가 귤 · 유자 · 감 따위의 특산물을 진상(進上)하면 그 일부를 성균관(成均館)과 4학(四學)의 유생(儒生)들에게 나누어 준 뒤 어제(御題)를 내려 고시(考試)하여 거수자(擧手者)에게 급제(及第)를 준 것인데 1564년(명종 19)부터 시행되었다.그 고시절차를 보면 대제학(大提學)이 패초(牌招)를 받고 입궐하여 시제(試題)를 적어 임금의 낙점(落點)을 받는다. 대제학(大提學)은 승지 및 중사(中使)와 함께 성균관 명륜당(明倫堂)으로 가는데 승지(承旨)는 어제(御題), 중사(中使)는 귤을 가져간다. 명륜당(明倫堂)에 도착하면 어제(御題)는 북벽의 서안(書案) 위에, 귤은 상 위에 봉치(封置)한다. 중사는 동벽의 수좌(首座)에 앉고 승지는 그 다음에 앉으며, 대제학과 본관 당상관(堂上官)들은 중사 및 승지와 서로 읍례(揖禮)한 뒤에 서벽에 앉는다. 대제학이 무릎을 꿇고 승지 앞에 나아가 어제를 받아 제자리에 돌아가 앉는다. 대제학 · 본관 당상관 · 중사 및 승지에게 귤 5개씩, 제 낭청(郞廳)에게 2개씩을 나누어 주고 양재(兩齋) 재임(齋任)과 거재(居齋) 유생에게 1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