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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대한제국의 근대 신문(新聞)

한성순보(漢城旬報)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한문으로만 기사를 썼다. 1883년 8월 17일 고조 광무제는 통리아문 내에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여 신문을 발간하도록 명하였다. 박문국 초대 총재에 외아문 독판인 민영목(閔泳穆)을, 부총재에 김만식(金晩植)을 임명하고 10월 31일 창간호를 발행하였다.한성순보는 열흘에 한 번 발행하는 순보였고 전체 지면 수는 18쪽이었으며, 제본되어 잡지 형태로 발행하였고 관보(官報) 성격을 띠었다.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으로 한성순보를 발행하던 박문국이 불타자 1886년 1월 25일 한성주보(漢城周報)로 맥을 이었다.

독립신문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이 정부의 자금을 지원받아 1896년 4월 7일 창간하였고 민중을 위해 알기 쉬운 한글 전용 신문을 만들었다.1897년 1월 5일자부터 국문판과 영문판(The Independent)을 분리하여 신문을 격일간으로 주(週) 3회 발행하였으며 국민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변자가 되고, 정부가 하는 일을 백성에게 전하고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 알릴 것이며 부정부패, 탐관오리 등을 고발할 것을 천명하였다. 1898년 5월 14일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주필 겸 관리자로 운영을 맡은 윤치호(尹致昊)는 1898년 7월 1일부터 일간으로 발전시켰다.

제국신문은 1898년 8월 10일 이종일(李鍾一)이 창간하였으며 창간호부터 1910년에 폐간될 때까지 대한제국의 대표적 민족지로서 황성신문(皇城新聞)과 함께 가장 오랜 발행 실적을 기록하였고 한글 전용을 고수하여 일반 서민층과 부녀자들 간에 독자가 많았다. 제국신문에는 이종일을 비롯하여 이승만(李承晩)도 초기에는 논설을 집필하였고, 최강(崔岡) ·장효근(張孝根) ·정운복(鄭雲復) ·이인직(李人稙) ·이해조(李海朝)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처음에는 제호도 뎨국신문으로 한글을 사용하였으나, 1903년 7월 7일부터는 한자로 바꾸었고, 본문은 한글을 전용하여 국한문을 혼용하던 황성신문과는 색다른 특징을 보여주었으며, 한글의 보급과 대중화에 큰 업적을 남겼다.

황성신문은 남궁 억(南宮檍) ·나수연(羅壽淵) ·장지연(張志淵) ·박은식(朴殷植) ·류근(柳瑾) 등이 주 2회간이던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인수하여 황성신문으로 개제하고 일간신문으로 창간한 것이다. 국 ·한문 혼용의 이 신문은 애국적 논필로써 대한제국의 정국을 매섭게 비판하다가 1905년(광무 9) 을사늑약 직후 장지연의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장지연이 구금되고, 신문도 정간당하였다가 수개월 만에 복간되었으며 고조 광무제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2월 발발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대한제국에 왔던 영국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이 양기탁(梁起鐸)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7월 18일에 창간하였으며 논설진으로는 양기탁 외에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등이 있었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던 무렵은 일본이 대한제국 언론에 대해 검열을 실시하고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때였으나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이므로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민족 진영의 대변자 역할을 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당시 6페이지 중에서 2페이지가 한글 전용이었고, 4페이지는 영문판이었으며 1905년 8월 11일부터는 영문판과 국한문신문을 따로 분리하여 두 가지 신문을 발간하였다. 영문판의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 였고, 창간 당시는 순한글로 만들었던 국문판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발간하였다. 1907년 5월 23일부터는 따로 한글판을 창간하여 대한매일신보사(社)는 국한문 · 한글 · 영문판 3종의 신문을 발행하였으며, 발행 부수도 세 신문을 합쳐 1만 부를 넘어 당시 최대의 신문이 되었다. 더타임스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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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 날(4월7일)에 허경영 국가혁명배당금당 대표,‘코로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며
허경영 국가혁명배당금당 대표는 “총선 D-8일인 오늘(4월7일)이 보건의 날인데 코로나19로 정부 기념행사가 연기 된 것”에 유감을 표하고 “오히려 ‘1주일을 보건의 날 기념 건강주간’으로 정해 대대적인 보건 관련 행사를 벌여 코로나로 인한 국민의 보건의식에 경각심을 일으켜야 한다”며 “이 기회에 전 국민이 손 씻기 등 깨끗한 위생생활을 습관화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오염 시키는 행위들을 반성하고 불편하더라도 친환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기자들과 인터뷰 하는 허경영 대표> 허대표는 “코로나는 인간의 욕망으로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인간들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고 했다. 허대표는 코로나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유튜브 공개 강연이나 인터뷰를 통해 “코로나는 환경을 파괴하는 인간들에 대한 경고 메시지”라고 수시로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이 제안한 ‘코로나 긴급생계지원금 18세 이상 국민들에게 1억원씩 지급’하는 공약이 법으로 제정될 수 있도록 과반수 151석 이상을 국가혁명배당금당에 몰아 달라고 했다. <허대표의 기자회견을 열심히 경청하는 국가혁명배당금당의 당원들> 김동주 국가혁명배당금당 기획조정실장은 “코로나가 인간의 끝임 없는

지금이라도 외국인 입국을 차단하고 대한민국 국민들과 의료진을 보호하라.이은혜 (순천향대 의과대학 교수)
대한민국의 의료자원은 무한하지 않다. 국민들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지금이라도 외국인 입국을 차단하라 해외에서 유입된 감염성 질환에 대한 방역관리의 기본 원칙은 ‘해외 유입 차단’이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대한의사협회의 7차례 권고를 무시한 채 소위 ‘상호주의’에 입각하여 중국발 입국을 차단하지 않았다. 그 결과 대구를 중심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하였고 이제는 거꾸로 중국의 33개 성(省)과 시(市), 그리고 18개 자치구에서 각기 다른 기준으로 한국인 입국 시 격리 조치를 하고 있다. 최근 이탈리아를 선두로 유럽 전역에 코로나19 확진자가 증가하고 있는데 애초에 중국발 입국을 막지 않았던 문재인 정부는 이제 와서 유럽발 입국을 차단할 명분이 없다. 궁여지책으로 22일 0시부터 유럽발 입국자에 대한 ‘특별입국절차’로서 코로나바이러스-19 검사를 의무화했다. 시행한 첫날인 22일 입국한 1,442명 중에 무려 152명이 의심 증상을 보였고, 23일 신규 확진자의 21.9%가 유럽 등에서 입국한 ‘사람’들이며, 이는 전보다 4배 이상 증가한 수치이다. 박능후 장관 말대로 문 열어놓고 모기 잡겠다는 것인데 온 국민이 모기에 왕창 뜯겨서 죽어 나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