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치정(林蚩正)은 1904년 감리교인으로 세례를 받은 뒤 근대 학문을 수학할 목적으로 미국 본토로 건너갔으며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고 소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는 한편, 안창호가 설립한 친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안창호·이강(李剛) 등 미주지역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이주 한인들의 취업 알선과 의식개혁에 힘쓰며 한인공동체 형성에 노력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일제가 주권침탈을 노골화하고, 해외 한인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자 1905년 4월 공립협회(共立協會)를 결성하여 맞섰다.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공립협회 활동을 통해 재미동포들에 대한 상호부조 활동과 계몽운동, 그리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항일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주권을 상실하자 공립협회를 재미동포의 자치기관이자 국권회복운동의 중심기관으로 키워갔다. 대한제국 영사관을 대신할 공립관을 설치하고 기관지로 공립신보를 창간하여 발행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양하고 국권회복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갔다. 1907년 국내외 한인단체의 통합과 국권회복운동 역량의 결집을 모색하면서 안창호·이강 등과 함께 대한신민회를 발기하였다. 안창호(安昌浩)가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고, 표면적으로는 계몽운동을 펼치
남상목(南相穆)은 1904년 일제가 러시아와의 전쟁 수행을 위해 한일의정서를 늑결하고 강제로 대한제국의 인력과 재원을 수탈하기 시작하였고 5월에는 일제가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낙생면(樂生面)의 울창한 수목을 무기 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낙생면과 언주면, 돌마면 등 3개 면민을 동원하여 수목을 벌채하였으며 주민들에게 이를 운반하는 작업을 시켜놓고 노임도 지불하지 않는 만행을 저지르자 일본인 감독관 나가이(中井)를 폭행하는 등 이에 항거하였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1906년 2월 이강년(李康秊) 대장 휘하에서 참모관으로서 많은 전과를 세우고 단양.제천.연풍.영주.봉화 등지에서 수많은 일본 군경과 항일전을 전개하여 승전하였다. 1907년에는 경기도 광주와 용인지역에서 활동하며 의병대의 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8월경에는 김재선을 좌익장, 강춘선(姜春善)을 후군장, 송주상과 김태동을 종사, 김경화(金景化)와 이시영(李時永)을 포군으로 임명하여, 의병대의 전열을 정비하고 음성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유동하(劉東夏)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위해 중국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것을 논의하였다. 유동하(劉東夏)는 유승렬(劉承烈),안중근(安重根),우덕순(禹德淳), 조도선(曺道先),김성화(金成華),탁공규(卓公奎)와 함께 7인단지동맹(七人斷指同盟)을 조직하고 하얼빈 의거를 계획하였다. 러시아어에 능통한 유동하는 안중근과 하얼빈까지 동행하고 연락을 담당하는 임무를 맡았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7시경 유동하(劉東夏)와 안중근(安重根)은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안중근은 일경의 감시망을 피해 이토 히로부미를 환영하는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9시 30분경 3발의 총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졌다. 의거에 성공한 안중근은 대한국 만세를 뜻하는 코레아 우라를 크게 외쳤고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유동하(劉東夏)도 뛰쳐나와 대한국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일본 경찰은 유동하를 안중근과 함께 현장에서 체포하였다. 뤼순 감옥으로 압송된 후 일제의 모진 고문과 협박에도 당당히 맞서며 국권수호의
윤희순(尹熙順)은 일본이 1895년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단발령을 발표하자 여자들도 의병에 참여하고 의병대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며 안사람 의병가 등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촉구하였다. 1907년 일제가 고조 광무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자 군자금을 모아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고 탄환, 유황 등으로 화승총에 쓸 화약을 직접 제작·공급하는 탄약제조소를 운영하였다. 여자의병 30여 명을 모집하여 의병의 취사와 세탁을 도맡아하는 한편, 직접 의병훈련에 참가하였고 후방에서 적극 지원하며 의병운동에 힘을 쏟았다. 8편의 의병가(義兵歌)와 4편의 경고문을 남겨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인재를 양성하고자 환인현에 노학당(勞學堂)을 설립하였다. 노학당(勞學堂)의 교장으로 활동하며 학교운영자금을 모으는데 힘을 쏟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한국인과 중국인들에게 의병가(義兵歌) 등 항일애국노래를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양성된 50여 명의 항일운동가는 요동일대를 중심으로 일제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노학당(勞學堂)이 폐교되자 무순(撫順)의 포가둔으로 이주하
문화재관리 사무를 관장,총괄하고 법적,제도적 조치를 하여 한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민족문화유산인 문화재를 사전적,예방적으로 관리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여야 하는 문화재청은 문화재관리 정책 연구,제도 개선,경영 기획,문화 교육, 정책 홍보 및 지방자치단체,문화재발굴법인,문화재수리업체,연구기관,문화기관 지휘 감독 기능을 강화하여야 하며 발굴 조사,보수 복원,전시 기획 기능이 완벽하므로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국가귀속 문화재 관리기관을 이관받고 대한황실박물관,황실문화재관리소,지방박물관,민속박물관,한국전통문화학교로 직제 개정해야 한다. 문화재 관리체계를 전문화,특성화하고 황실문화재,지역 연고,국가 귀속 문화재를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고궁박물관은 대한황실박물관으로 개칭하고 민속박물관은 이전하여야 하며 문화재는 조직,전문인력에 의한 사전적 예방적 관리가 중요하므로 황실,민속,지방박물관의 직급 및 정원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문화재의 특성과 지역 연고에 따라 국보급 문화재를 이관하여야 하며 경희궁,별궁,행궁,환구단,사직단,선농단,선잠단,장충단,영희전,장생전,만녕전,장녕전,화령전,집경전,경기전,조경묘,장릉,준경묘를 흡수,통합하여 경운궁에 황실문화재관리소를 신설해
선농단(先農壇)은 농사짓는 법을 인간에게 가르쳤다는 고대 중국의 제왕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태조 대에 이미 적전령(籍田令)·적전승(籍田丞)을 두어 왕의 농경 시범과 치제의 의례를 관장케 하였다. 서적전(西籍田)은 개성부 동쪽 20리에 있었으며 동적전(東籍田)은 한성부 동교 10리에 있었으며 이를 전농(典農)이라 했으며, 태종 6년(1406) 적전단(籍田壇)을 보수하고 수호하는 인정(人丁)을 두었다. 흥인지문 밖 선농단은 성종 7년(1476)에 쌓았으며, 임금이 친히 경작하여 그 수확으로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제사지내던 토지인 적전(籍田)을 마련하고, 경칩(驚蟄) 뒤의 첫 번째 해일(亥日)에 제사를 지낸 뒤 왕이 친히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아 보임으로써 농사의 중함을 만백성에게 알리는 의식을 행하였다고 한경지략(漢京識略)에 기록되어 있다. 선잠단(先蠶壇)은 중국 상고 황제(皇帝)의 황후 서릉씨(西陵氏)를 누에신(蠶神)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며 조선 성종 2년(1471)에 처음 쌓고 뽕나무를 심어 궁중의 잠실(蠶室)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하였다.왕비는 궁중 안에 단을 꾸며 내명부ㆍ외명부들을 거
도성의 서산인 인왕산(仁王山)은 그 산세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앉은 만큼 그 산록을 따라 도성 안 곳곳에 아늑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가 펼쳐져 있으며 조선 전기에 인왕산 동록(仁王山 東麓)에 인왕사(仁王寺), 내불당(內佛堂), 금강굴(金剛窟),복세암(福世庵) 등의 여러 사찰이 자리잡고 있었다.인왕산 북록(北麓)에는 청풍동(淸風洞) · 백운동(白雲洞)의 아름다운 풍경이 있으며, 남쪽으로 옥류동(玉流洞) · 인왕동(仁王洞) · 누각동(樓閣洞) · 수성동(水聲洞)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이 많다. 인왕산(仁王山) 남쪽으로 내려오면 조선 중기의 명신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살던 필운대(弼雲臺)를 중심으로 하여 필운동(弼雲洞)의 황학정(黃鶴亭),사직단(社稷壇) 부근의 대송정(大松亭) 및 옥류동(玉流洞)의 등용정(登龍亭),누각동(樓閣洞)의 백호정(白虎亭) · 풍소정(風嘯亭) 등 사정(射亭)이 있어 유명하였다. 또 그 남쪽으로는 왕가의 길지(吉地)라고 하여 일찍이 광조 대에 경희궁(慶熙宮), 인경궁(仁慶宮),선왕(先王)의 후궁(後宮)이 거처하는 자수궁(慈壽宮) 등 새 궁궐의 창건이 이루어졌다. 인왕산록(仁王山麓) 중에서 제일 유수한 계곡에 위치한 옥류천
1873년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내탕금(內帑金)을 들여 경복궁(景福宮) 북편에 정치적 독립 의지를 드러낸 건청궁(乾淸宮)을 짓기 시작하며 흥선헌의대원왕의 섭정(攝政)을 종식하고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는데, 근대 문물,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적극적인 외교통상정책으로 전환하였으며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884년부터 건청궁(乾淸宮)에서 임어(臨御)하면서 정무를 처리했다. 수신사(修信使)는 1876년(고조 13) 조일조규(朝日條規:강화도조약) 이후 조선 정부가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단이며 1차 수신사(1876년 4월~7월)는 의례적인 일본 방문이었고 2차 수신사(1880년 5월~9월)는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의 외교 통상에 걸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2차례의 수신사 파견은 개화정책에 영향을 미쳤고 통상(通商)과 문물의 수용을 담당하는 정부기구의 설립에 기초가 되었다. 영선사(領選使)는 1881년 서양의 과학기술 학습과 미국과의 통상(通商)에 대한 사전 교섭을 목적으로 청국에 파견한 유학생의 인솔사행이며 김윤식(金允植)·어윤중(魚允中) 등의 온건개화파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이 도입한 서양 과학기술 및 병기의 도입과 학습을 위한 유학생을 파견하였으며
흥선헌의대원왕이 병인(1866)년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한 천주교도 8,000여 명을 학살하였다.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가 중국 톈진에 주둔한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조선의 천주교도 학살을 알렸으며 보고를 받은 베이징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는 한반도 진격을 표명하였고 흥선헌의대원왕은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변경(邊境)의 수비를 굳게 했다. 9월 18일 로즈 제독의 프랑스 군함 3척은 인천 앞바다를 거쳐 양화진(楊花津)을 통과하여 서강(西江)에까지 이르렀고 조선 정부는 어영중군(御營中軍) 이용희(李容熙)에게 표하군(標下軍) ·훈국마보군(訓局馬步軍)을 거느려 경인 연안을 엄중 경비하도록 했다. 10월 로즈 제독은 함대 7척과 6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부평부(富平府) 물치도(勿淄島)에 나타났다. 10월 14일 이 중 4척 함정과 해병대가 강화부(江華府) 갑곶진(甲串津) 진해문(鎭海門) 부근의 고지를 점거하였으며 프랑스군은 한강수로의 봉쇄를 선언하고, 16일 전군이 강화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무기 ·서적 등을 약탈했다. 10월 26일 프랑스군 약 120명은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정찰하려다
일본공사관은 1880년 11월 16일 돈의문(敦義門) 밖 청수장(淸水莊)을 이용하였으나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불타버렸고 일본공사관은 1882년 8월 16일부터 1884년 4월 16일까지 왜성대(倭城臺)에 있었다. 1884년 4월 17일 교동(校洞)의 박영효(朴泳孝) 저택(邸宅)을 임시 사용하였고 1884년 11월 3일 신축한 교동의 공사관 건물은 1884년 12월 7일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소실(燒失)되었으며 1885년 1월 3일 경기감영(京畿監營) 선화당(宣化堂)에서 잠시 머물다가, 1885년 1월 12일 남산 왜성대(倭城臺)로 옮겼다. 미국공사관은 1883년 5월 정동(貞洞)에 세워졌으며 1882년 5월 22일 (美國)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1883년 5월 19일 그 비준서를 교환하면서부터 한성의 정동에 공사관(公使館)이 설립되었다. 청국공사관은 1883년 10월 23일부터 충무로에 설치되었고, 상무총판(商務總辦) 진수상(陳樹裳)이 수장(首長)으로 있었으며 1885년 11월 원세개(袁世凱)가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관명(官名)으로 부임했고, 공사관(公使館)의 명칭이 청국이사부(淸國理事府)로 변했다. 영국공사관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