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하(劉東夏)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위해 중국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것을 논의하였다. 유동하(劉東夏)는 유승렬(劉承烈),안중근(安重根),우덕순(禹德淳), 조도선(曺道先),김성화(金成華),탁공규(卓公奎)와 함께 7인단지동맹(七人斷指同盟)을 조직하고 하얼빈 의거를 계획하였다. 러시아어에 능통한 유동하는 안중근과 하얼빈까지 동행하고 연락을 담당하는 임무를 맡았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7시경 유동하(劉東夏)와 안중근(安重根)은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안중근은 일경의 감시망을 피해 이토 히로부미를 환영하는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9시 30분경 3발의 총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졌다. 의거에 성공한 안중근은 대한국 만세를 뜻하는 코레아 우라를 크게 외쳤고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유동하(劉東夏)도 뛰쳐나와 대한국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일본 경찰은 유동하를 안중근과 함께 현장에서 체포하였다. 뤼순 감옥으로 압송된 후 일제의 모진 고문과 협박에도 당당히 맞서며 국권수호의 뜻을 잃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