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순(尹熙順)은 일본이 1895년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단발령을 발표하자 여자들도 의병에 참여하고 의병대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며 안사람 의병가 등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촉구하였다. 1907년 일제가 고조 광무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자 군자금을 모아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고 탄환, 유황 등으로 화승총에 쓸 화약을 직접 제작·공급하는 탄약제조소를 운영하였다. 여자의병 30여 명을 모집하여 의병의 취사와 세탁을 도맡아하는 한편, 직접 의병훈련에 참가하였고 후방에서 적극 지원하며 의병운동에 힘을 쏟았다. 8편의 의병가(義兵歌)와 4편의 경고문을 남겨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인재를 양성하고자 환인현에 노학당(勞學堂)을 설립하였다. 노학당(勞學堂)의 교장으로 활동하며 학교운영자금을 모으는데 힘을 쏟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한국인과 중국인들에게 의병가(義兵歌) 등 항일애국노래를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양성된 50여 명의 항일운동가는 요동일대를 중심으로 일제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노학당(勞學堂)이 폐교되자 무순(撫順)의 포가둔으로 이주하고 중국인들과 힘을 합쳐 한중연합단체인 조선독립단을 조직하였다. 1926년에는 항일인재를 양성하고자 조선독립단 학교를 설립하고 조선독립단 가족부대를 만들고 직접 군사훈련에 참가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