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내탕금(內帑金)을 들여 경복궁(景福宮) 북편에 정치적 독립 의지를 드러낸 건청궁(乾淸宮)을 짓기 시작하며 흥선헌의대원왕의 섭정(攝政)을 종식하고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는데, 근대 문물,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적극적인 외교통상정책으로 전환하였으며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884년부터 건청궁(乾淸宮)에서 임어(臨御)하면서 정무를 처리했다. 수신사(修信使)는 1876년(고조 13) 조일조규(朝日條規:강화도조약) 이후 조선 정부가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단이며 1차 수신사(1876년 4월~7월)는 의례적인 일본 방문이었고 2차 수신사(1880년 5월~9월)는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의 외교 통상에 걸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2차례의 수신사 파견은 개화정책에 영향을 미쳤고 통상(通商)과 문물의 수용을 담당하는 정부기구의 설립에 기초가 되었다. 영선사(領選使)는 1881년 서양의 과학기술 학습과 미국과의 통상(通商)에 대한 사전 교섭을 목적으로 청국에 파견한 유학생의 인솔사행이며 김윤식(金允植)·어윤중(魚允中) 등의 온건개화파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이 도입한 서양 과학기술 및 병기의 도입과 학습을 위한 유학생을 파견하였으며,근대 기계와 과학기술 서적이 대량 유입되어 1883년 최초의 근대 병기공장인 기기창(機器廠)이 설립되었다. 보빙사(報聘使)는 조선에서 최초로 미국 등 서방 세계에 파견된 사절단(使節團)이며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한 이듬해에 민영익(閔泳翊), 홍영식(洪英植) 등의 친선 사절단(使節團)을 서방 세계에 파견하였다. 미국 뉴욕에서 미국 대통령 체스터A.아서와 회동하고 국서(國書)를 전하였고 보스턴을 거쳐 대서양을 건너 유럽 각지를 여행한 다음 귀국하였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서양 문물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도모한 건청궁은 크게 장안당(長安堂)·곤녕합(坤寧閤)·복수당(福綏堂)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장안당 서쪽에는 각감청(閣監廳)이 있고, 남쪽에는 연못과 그 안에 만들어진 섬과 향원정(香遠亭)이 있다. 고조의 서재로 쓰인 집옥재(集玉齎)는 중국식 벽돌로 지어졌으며, 장안당 뒤쪽의 서양식 건축 관문각(觀文閣)은 외국 외교관들을 접대하는 장소로 활용됐다. 1887년 건청궁(乾淸宮)에 최초로 전등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궁정 설비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다.1895년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는 건청궁(乾淸宮) 안의 곤녕합(坤寧閤)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했으며 명성황후의 시신은 건청궁(乾淸宮) 옆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졌다. 고조(高祖) 광무제는 1896년 대한제국 황궁 경운궁을 건축하고 1897년 건청궁(乾淸宮)에서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移御)했다. 더타임스 김민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