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목(南相穆)은 1904년 일제가 러시아와의 전쟁 수행을 위해 한일의정서를 늑결하고 강제로 대한제국의 인력과 재원을 수탈하기 시작하였고 5월에는 일제가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낙생면(樂生面)의 울창한 수목을 무기 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낙생면과 언주면, 돌마면 등 3개 면민을 동원하여 수목을 벌채하였으며 주민들에게 이를 운반하는 작업을 시켜놓고 노임도 지불하지 않는 만행을 저지르자 일본인 감독관 나가이(中井)를 폭행하는 등 이에 항거하였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1906년 2월 이강년(李康秊) 대장 휘하에서 참모관으로서 많은 전과를 세우고 단양.제천.연풍.영주.봉화 등지에서 수많은 일본 군경과 항일전을 전개하여 승전하였다. 1907년에는 경기도 광주와 용인지역에서 활동하며 의병대의 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8월경에는 김재선을 좌익장, 강춘선(姜春善)을 후군장, 송주상과 김태동을 종사, 김경화(金景化)와 이시영(李時永)을 포군으로 임명하여, 의병대의 전열을 정비하고 음성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