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우(申錫雨)는 1915년 총독부가 한일 강제 병합 5주년을 기념해 홍보 목적에서 개최한 시정5년 기념 물산공진회에 군산협찬회 상의원으로 참가했고, 같은 해 군산신사의 건축위원과 일본적십사자 특별사원을 맡았고 군산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 군산청년야학교 교장, 군산부 참사, 부 협의회원 등 지역 유지들이 거치는 직함을 갖고 활동했다. 공공사업에 기부하고 교육 사업에 매진하는 등의 공로로 일제로부터 포상을 받았다.1920년 호남물산주식회사 취체역과 군산부 객주조합장, 1924년 호남물산 감사를 맡는 등 자본가로서도 왕성히 활동했으며, 1921년 한국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명예직인 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발탁되었다. 민원식 주도의 신일본주의 단체 국민협회에 관계했고, 1929년 유교 계열의 친일단체인 대성원의 전북총지원장을 맡았다. 일본인이 1917년에 쓴 인물평에 따르면, 사회공익을 위해 개인 재산을 내놓는데 인색하지 않은 통 큰 인물이며, 한일 강제 병합을 누구보다 기뻐하고 일상 생활에서도 메이지 일왕을 숭앙하여 메이지 신궁 건설에 거액을 쾌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시문에도 능하여 1916년 일본적십자사 특별사원 자격으로 도쿄에서 열린 총회에 참석했을 때 메
신헌(申櫶)은 1828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에 임명된 이후 중화부사·전라도우수군절도사·전라도병마절도사·도총부 부총관 등을 역임했다. 1857년 좌승지·삼도수군통제사·형조 판서·한성부 판윤·공조 판서·우포도대장을 지냈다. 고조 광무제가 즉위한 후 흥선헌의대원왕의 신임을 얻어 형조·공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강화도를 수비했다. 1876년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구로다와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했으며, 1882년에도 전권대관의 자격으로 미국의 슈펠트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국방책으로 정약용의 민보방위론(民堡防衛論)을 계승하여 민간 자위(自衛)에 입각한 민보방위체제를 주장했고, 병인양요를 거치면서 서양식 근대무기를 수용하여 수뢰포(水雷砲)와 마반차(磨盤車) 등 신식무기를 제작했다.
오경석(吳慶錫)은 1853년(철종 4)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가 파견될 때 역관으로 베이징에 가서 11개월 동안 머물렀다. 서양열강들의 침략과 태평천국운동으로 위기에 처해 있던 중국의 상황과, 중국의 지식인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신서(新書)를 간행하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 1853~58년 4차례 중국을 왕래하면서 중국의 개혁문제를 걱정하는 지식인들과 광범위하게 교제·토론하는 한편 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박물신편(博物新編) 등의 신서를 구입·연구했다. 1860년 10월 진하 겸 사은사 신석우(申錫愚) 일행을 따라 역관으로 베이징에 갔다가 이듬해 3월에 귀국했는데,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사건으로 인한 중국의 대혼란과 위기를 체험했다. 1866년 5월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 프랑스 동양함대의 조선침공이 준비되자 조선정부가 사태를 해명하고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청국에 파견한 주청사(奏請使) 일행의 역관으로 다시 베이징에 가게 되었다. 이때 서양의 침략에 경험을 가진 중국의 정책가들을 방문하여 프랑스 함대의 동태와 그들의 조선침략 대책수립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중국은 프랑스의 침공에 전혀 관계되어 있지 않으며 프랑스군은
박규수(朴珪壽)는 1861년 2차 아편전쟁 직후 영-프연합군 점령하의 청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사행(使行)을 지원하여 거대한 서양 세력을 목격했고, 중국 문인과의 교유를 통해 실학적 학풍을 다졌다. 귀국 후 대사성을 거쳐, 1862년 2월 진주민란의 안핵사로 임명되어 국내현실의 모순을 처리했다. 1864년 고조 광무제 즉위 후 도승지·대사헌·대제학·이조참판을 역임하고, 1865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866년 2월 평안도관찰사로 전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대동강에서 격퇴시켰다. 1872년 강문형(姜文馨)·오경석(吳慶錫)을 대동한 2차 중국사행에서 서양침략에 대응하는 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하고 개국의 필요성을 확신했다. 귀국 후 형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면서 흥선헌의대원왕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자 1874년 9월 사직했다. 1875년 초 판중추부사가 된 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한거생활에 들어갔다. 그의 사랑방에 김윤식·김옥균·유길준·박영효 등 젊은 양반 자제들을 불러모아 연암집(燕巖集)·해국도지(海國圖志) 및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역관들이 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강의하여, 세계의 대세를 살피도록 하고 개화사상
이광수(李光洙)는 1910년 메이지 학원을 졸업한 뒤 이승훈의 추천으로 오산학교 교원이 되고 최남선이 주관하는 잡지 소년에 단편을 발표하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했다.1917년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발표하여 최남선과 함께 신문학 개척기의 선구자가 되었다.1918년 2·8 대한광복운동을 모의하면서 연락차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가담하였고, 여운형을 당수로 삼아 조직된 신한청년당에도 관여하였다. 안창호의 민족주의 운동에 감화를 받아 일본 와세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1919년 2월 백관수·최팔용·송계백 등과 재일 청년독립단을 조직하였다.1919년 2월 8일 2·8 대한광복선언의 선언문을 기초하였고,상해 임시정부의 설립에 참여하였고, 독립신문 주필로도 활동하였다. 이광수는 귀국 후 흥사단 활동과 저술을 통한 국민계몽을 했다.1919년 잡지 독립을 발행하였고, 사장 겸 주필, 임시정부 사료 편찬위원회 주임이었다. 이 잡지를 통해 대한민국의 자주성과 우수한 민족문화를 소개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고, 출판부장으로 주요한을, 기자로는 조동호 등을 영입하였다. 독립은 창간 후 주 2~3회 발간하였으나 자금난이 심해지자 1925년 18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였다.1923
홍명희(洪命熹)는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에 괴산에서 충청북도 최초로 참여하였다. 상하이로 건너가서는 이광수를 다시 만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이광수와 친밀하게 지내며 그에게 톨스토이를 권했다고도 한다. 홍명희는 조소앙, 이광수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궁핍한 생활을 계속하였는데, 이광수는 도저히 상하이 생활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귀국길에 오른다. 하지만 홍명희는 이광수를 버리지는 않았다. 항일 독립운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루면서도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교장 근무, 신간회 결성 등의 업적도 남겼다. 1927년 현대평론이 창간되자, 그 창간호에 이관용(李冠鎔)·안재홍·김준연·이순탁(李順鐸)·백남운(白南雲)·이긍종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40년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못이겨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던 소설 임꺽정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칩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