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李光洙)는 1910년 메이지 학원을 졸업한 뒤 이승훈의 추천으로 오산학교 교원이 되고 최남선이 주관하는 잡지 소년에 단편을 발표하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했다.1917년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발표하여 최남선과 함께 신문학 개척기의 선구자가 되었다.1918년 2·8 대한광복운동을 모의하면서 연락차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가담하였고, 여운형을 당수로 삼아 조직된 신한청년당에도 관여하였다. 안창호의 민족주의 운동에 감화를 받아 일본 와세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1919년 2월 백관수·최팔용·송계백 등과 재일 청년독립단을 조직하였다.1919년 2월 8일 2·8 대한광복선언의 선언문을 기초하였고,상해 임시정부의 설립에 참여하였고, 독립신문 주필로도 활동하였다. 이광수는 귀국 후 흥사단 활동과 저술을 통한 국민계몽을 했다.1919년 잡지 독립을 발행하였고, 사장 겸 주필, 임시정부 사료 편찬위원회 주임이었다. 이 잡지를 통해 대한민국의 자주성과 우수한 민족문화를 소개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고, 출판부장으로 주요한을, 기자로는 조동호 등을 영입하였다. 독립은 창간 후 주 2~3회 발간하였으나 자금난이 심해지자 1925년 18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였다.1923년 5월 김성수와 송진우로부터 동아일보사에 입사할 것을 권고받았다. 권고를 받아들여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객원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