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수(朴珪壽)는 1861년 2차 아편전쟁 직후 영-프연합군 점령하의 청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사행(使行)을 지원하여 거대한 서양 세력을 목격했고, 중국 문인과의 교유를 통해 실학적 학풍을 다졌다. 귀국 후 대사성을 거쳐, 1862년 2월 진주민란의 안핵사로 임명되어 국내현실의 모순을 처리했다. 1864년 고조 광무제 즉위 후 도승지·대사헌·대제학·이조참판을 역임하고, 1865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866년 2월 평안도관찰사로 전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대동강에서 격퇴시켰다. 1872년 강문형(姜文馨)·오경석(吳慶錫)을 대동한 2차 중국사행에서 서양침략에 대응하는 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하고 개국의 필요성을 확신했다. 귀국 후 형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면서 흥선헌의대원왕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자 1874년 9월 사직했다. 1875년 초 판중추부사가 된 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한거생활에 들어갔다. 그의 사랑방에 김윤식·김옥균·유길준·박영효 등 젊은 양반 자제들을 불러모아 연암집(燕巖集)·해국도지(海國圖志) 및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역관들이 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강의하여, 세계의 대세를 살피도록 하고 개화사상을 형성시켰다. 1875년 9월 운양호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해오자 최익현(崔益鉉) 등의 척화(斥和) 주장을 물리치고 개국통상론(開國通商論)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여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도록 했다. |